도신설 7.17 항쟁
東新齧 7.17 抗爭
Toshinseol 7.17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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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69년 7월 17일 ~ 1969년 8월 2일
장소
월본 월본 도신설군 전역
배경과 원인
월본 군사정권의 독재
목표
월본 군사정권의 종식
결과
항쟁 실패, 군부의 진압 성공
  • 진압군의 도신설 시민군 진압 밎 도신설 점령
  • 군부의 민주화 저항세력 분쇄
시위 당사자
도신설군 주민
월본 군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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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도신설군 주민들
도신설대학교 학생들
도신설기술공업대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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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도신설군 주민
월본 군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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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시완 도신설시민군 지휘관†
박기태 도신설시민군 부지휘관
노우정 시민민주화투쟁회 회장†
이현구 시민민주화투쟁회 대변인
정민준 도신설자유의목소리 국장
성현 도신설대학교 총학생회장
지정천 시민민주화투쟁회 부회장
흑치정 시민총궐기회 대표
부여성훈 도신설기술공업대학교 총학생회장
김민현 일등병→시민군 지휘관보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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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완 내각총리대신
현우진 도신설 군수
부여진 신설군구 사령관
정혁준 신설군구 부사령관
박현이 작전지휘단장†
파일:월본 경무청 휘장.png 이민오 도신설군 경찰국장
병력
도신설군 주민
월본 군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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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약 10,000명
시위대 5~6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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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군구 병력 약 250,000명
파일:월본 경무청 휘장.png 도신설군 경찰국 약 30,000명
피해 규모
도신설군 주민
월본 군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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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750여명
실종 52명
부상 4000여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20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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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 127명 사망
군경 356명 부상
각주
  1. 본래 진압군에 속해 있었으나 후에 시민군측으로 전향, 진압 후 총살형에 처해짐


도신설 7.17 항쟁(東新齧 7.17 抗爭)은 1969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월본 도신설군 일대에서 발생한 반군부 시위이자 항쟁이다. 특히 현재의 산원부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군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는데, 시민들과 일부 경찰, 군인들은 이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강경하게 진압하여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였고 도신설군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월본 국황사의 묵인 내지는 방조 논란이 있었지만, 조사 결과 당시의 국황이던 소류 국황에게는 군사정권이 단순 소요 정도로 왜곡 보고한 것이 드러났으며 국황사는 이에 관여한 것이 전혀 없음이 밝혀졌다. 애초에 당시 소류 국황은 군부에게 삶을 통제 당하던 꼭두각시였으니 시위대나 군부 중 어느 한 곳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