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개요

김창암선(金昌巖線) 또는 김창암 독트린(Kim’s Doctrine)서울 강화조약 체결 이후 1953년 7월 10일 김창암 총리가 국민원 연설에서 발표한 외교 정책이다.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선 동부와 날짜 변경선 서부 사이의 지역(사실상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부분)에는 서방 국가들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주요 골자로, 한국의 아시아-오세아니아 패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배경

1945년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 공화국 임시정부가 독립을 선포하자 네덜란드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이 영국군과 함께 자바섬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운형 총리는 1944년에 인니 임시정부에게 독립을 약속했던 이위종-수카르노 회담의 결과를 지켜 인니 임시정부의 독립을 지지했다. 한국과 마찰을 벌이기 꺼린 영국군은 1946년 1월부로 인도네시아에서 철군하였고 네덜란드는 결국 1946년 7월 14일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이는 한국이 인도네시아로부터 서구 열강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마침내 1947년 1월 1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여운형 총리는 아태평양 전쟁 이후 서구 열강이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여전하다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194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베트남,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영국으로부터 버마를 독립시킨다. 말레이시아도 높은 자치를 인정받았고 독립은 1957년에 이루어진다.

또한 일본의 위임통치령인 남양군도 일대를 모두 한국의 신탁통치령으로 인정받고 1946년에 필리핀 자치령이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하자 막대한 경제지원을 약속하며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던 바타네스 제도를 할양받았다. 게다가 미국령인 괌은 영구히 비무장지대로 두어야 한다는 조약을 미국과 체결함으로써 서태평양에서의 배타적 패권 또한 확보했다.

또한 1951년 이란에서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가 집권하고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이란이 서방국들로부터 봉쇄되자 이란 정부는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여운형 총리는 페르시아만으로 제4함대를 파견하고 전격적으로 이란을 방문, 한국-이란 친선조약을 맺었으며 페르시아만으로부터 영국 해군이 철수할 것을 공동 요구했다. 결국 영국은 페르시아만 봉쇄를 해제했으나 모사데크를 축출하려는 공작을 벌였고 1953년 팔레비 2세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이란에 주둔하던 한국군에게 진압당했다.

한국은 아태평양 전쟁기 자신들에게 협력했던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게 독립을 약속하고 이를 지키면서 자신들의 영향권 내로 이들을 끌어들여 패권을 확장시키려했다.

영향과 결과

2차 세계 대전의 악영향으로 아시아 식민지들을 되찾으려는 서구 열강들의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다. 한국도 아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으나 한국이 서구 열강보다는 아시아 구 식민지들에 대하여 물리적 거리가 가까웠고 무엇보다 식민지인들이 한국을 지지했기 때문에 한국쪽에 힘의 무게추가 기울어져 있었다. 또한 한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제1세계, 소련이 주도하는 제2세계와 달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을 이끌어 나가며 독자적인 세력인 제3세계를 구축, 이들의 맹주로써 미국, 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운형과 김창암 총리의 외교정책은 당연히 서방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왔으나 서방국가들이 실질적으로 행할 수 있는 조치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패권주의 전략에는 막대한 물자가 투입되었기에 당연히 한국 국내 전후 복구도 늦춰졌다. 결국 이런 정책은 여운형 총리와 사민당이 1952년 총선에서 패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