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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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23, 24, 27대 내각총리대신
김창암
金昌巖 | Kim Chang-am
출생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 운산현
(現 대한성 해주시 운산읍)
사망 1964년 7월 18일 (향년 87세)
심양시 황고구 국립심양병원
본관 신 안동 김씨 익원공파
재임기간 제23대 내각총리대신
1939년 1월 17일 ~ 1941년 10월 10일
제24대 내각총리대신
1941년 10월 10일 ~ 1945년 9월 2일
제27대 내각총리대신
1952년 4월 3일 ~ 1956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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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양무공 (襄武公)
부모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배우자 최준례
자녀 아들 김인, 김신
딸 김윤경, 김화경, 김은경
학력 벽성보통학교
종교 개신교 (감리회)
소속정당 대한국민당
약력 21대 문학부대신
23대, 27대 내무부대신


개요

대한국의 정치가이며 14대, 1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피튀기는 일본제국과의 항전끝에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고있다. 하지만 지나친 근왕파 성향, 엄격한 보수/반공주의 성향으로 인해 현대 진보주의자들에게 비판 대상이되기도 한다.

생애

전시내각의 지도자로

전쟁 직후의 실각

1945년 5월경 전쟁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치닫고 있었다. 한국은 점령당했던 대만과 해남을 수복했고 동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가져왔다. 결국 8월 3일, 도쿄 황궁에 태극기가 꽂히고 나서야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이런 화려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김창암 본인은 점점 국내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전시에 무리한 과로 때문에 건강이 크게 나빠져 몇차례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었으며 전쟁중에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바람에 국내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로인해 친공산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범국민적 단결을 주장했던 사민당은 이를 비판했고 결국 8월 13일 여운형이 참여한 대한국민당-사민당 대연정은 붕괴되었으며 세조는 국회에 해산명령을 내린다. 사실 여기에는 황제의 개인적 의견도 들어가 있었다. 직권으로 총리를 해임할 수는 없으니 간접적으로 김창암에게 이제 그만하고 쉬라는 메세지를 전달한 것이다. 김창암은 국회 해산을 충분히 거부할 수 있었지만 특별히 어명으로 포장된 배려였고 김창암 본인도 이제 쉬겠다는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다. 후일담으로 국회가 해산된 뒤 여운형이 병문안을 왔을때 김창암은 ‘빨갱이 왔는가?’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증언에 따르면 분위기는 꽤 훈훈했고 김총리 본인도 농담조로 던진말이었다고 한다.

2차 집권기

1952년 2월 25일, 대한국민당이 다시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며 김창암은 당당하게 총리직에 복귀했고 앞뒤 꽉막힌 보수주의자 인상을 지우기 위함이었는지 여러가지 사회개혁을 실시했다.

말년

1956년 총선에서 패하고 대한국민당 당수직을 내려놓은 그는 심양도급시 시장을 지내고있던 아들 김신의 자택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김창암선

김창암선(金昌巖線) 또는 김창암 독트린(Kim’s Doctrine)은 1953년 서울 강화조약 체결 이후 김창암 총리가 국민원 연설에서 발표한 외교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