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愛新覺羅 努爾哈赤

누르하치의 어진.[1]
출생 1559년 2월 21일
사망 1626년 9월 30일
국적 해영국 해영국
별칭 요동대섭무대군(搖動大涉撫袋君)
직업 무장 혹은 정치인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중국어: 愛新覺羅 努爾哈赤)는 후금(後金), 즉 청(靑)나라 개국의 실질적 시조이며, 1583년부터 만주 조정에 입정하여 휘하의 여진족을 통솔하였다.

생애

그는 건주 여진 출신으로서, 조선 초 오돌리족 먼터무(孟特穆)[2]의 6대손이다. 1583년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의 뒤를 이어 만주 조정에 무관으로서 입정하여 군통수권자로서의 기반을 다져갔다.[3] 이후 푸순 동쪽으로 여진족 일대의 행정권을 만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으며, 이때 이성량은 만주 내부의 여진족들의 분란을 일으켜 약화시키는 과정에서 누르하치에게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배상이라는 명목으로 말과 땅 같은 특혜를 베풀어 친명 성향을 갖도록 유인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이를 계기로 만주 조정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기존의 여진족들의 네트워크를 통합함으로서 무분별하고 혼란했던 만주내에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러한 공으로 건주섭정대신(建州攝政大臣)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616년, 주위 여진족들의 지방 수장들과 함께 만주어의 실질적 사용을 위한 만주 문자의 제작을 명하였다. 이후 여진족 사회에서 그는 칸(Khan)으로 추대되었다.

여진을 통합하고 청이 세워지는 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성량과의 관계가 특히 중요시 되는데 이성량은 당시 '요동왕'으로 불렸을 정도로 요동 지역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요동지역은 엄연히 해영국 만주 조정에 귀속된 형태였으나, 이성량은 만주 조정에게 무리한 요구를 통해 군사 배치를 관철시켰고 이러한 군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요동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적극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요동지역의 여진인들은 이성량을 두려워 하였으며,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 이성량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허울뿐인 친분을 과시하고 많은 뇌물을 보냈다. 이후 이성량은 사치스러운 생활과 함께 요동 지방에서의 횡포 소식을 들은 명나라 조정에서 이성량을 결국 좌천시키고 새로운 관리를 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나라 조정의 선택은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는데 이성량의 개인적 됨됨이는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그가 요동지역에 대한 막대한 군권력과 누르하치를 비롯한 만주 조정의 세력 조절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고 명에서는 이성량의 공백을 급하게 메꾸고자 경험도 없는 관리를 요동의 선무군관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관리와 인사들은 본국에서 들은 바와는 달리 막대한 세력을 구축한 누르하치와 만주 조정에 크게 놀랐고 함부로 이를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누르하치는 만주 조정에 적극 건의하여 대응책을 마련했는데 이것은 다름아닌 뇌물이었다. 누르하치는 뇌물과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새로 부임한 요동 지역의 명 세력들에게 적대시하지 않았고 새로 요동에 부임한 이들로서도 누르하치의 세력권을 눈감아주고 재보를 받는 것으로서 묵인하였다.

명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도 섣불리 대책을 논의치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성해지는 누르하치와 만주 조정에 대항하여 무리한 군사 행동을 시도 했고, 실제로 전쟁까지 계획했으나,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 임진왜란은 당시 누르하치와 만주 조정에게는 천재일우로 작용했으며 명의 시선은 전부 조선으로 집중되어 누르하치와 만주 조정을 안중 밖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이후 만주 조정은 명과 급히 조약을 체결하여 명군의 조선 국경 진입을 위한 길을 이용할 수 있도록 명목상의 편의를 대주는 대신 누르하치와 여진족은 그 사이에 여진족의 완전한 통합을 위한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여담으로 누르하치는 만주 조정에게 2차례나 건의하여 조선 파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쪽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는데, 순수한 뜻으로서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고 조선 내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요동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을 제압하고 요동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제의로 파병된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도 담판을 벌였다.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광해군의 기미책으로 인해 조선과 누르하치 간의 충돌은 없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누르하치와 만주 조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정권이 들어 섰음을 알고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대안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620년, 사르후 전투가 끝난 뒤 만주 조정으로부터 요동대섭무대군(搖動大涉撫袋君) 직책을 임명받게 되면서 만주 지역내에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626년, 영원성 전투 도중 홍이포를 맞아 부상을 입은 뒤에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였으며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요동대섭무대군 직책을 그의 8번째 아들인 청 태종(太宗) 홍타이지가 물려받게 되었으며 1636년, 본격적으로 중원 이북을 장악한 뒤 청(靑)의 개국을 선포하면서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로 추숭하였고 이후 복릉(福陵)에 안장되었다.

업적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로서 행했던 팔기군을 1601년에 편성하였다. 팔기군은 만주 조정 시기에 청나라가 개국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몽골문자의 형태에서 비롯된 만주문자를 창제하기도 했다.

각주

  1. 누르하치는 살아있을 때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 후에 청 황실에서 정통성 확립을 위해 어진으로서 그린 것.
  2. 흔히 몽골식 이름인 몽케 테무르 혹은 조선왕조실록과 해영국의 기록에 남아있는 한국식 독음인 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로 알려져있다. 과거 만주 조정에서 무관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3. 참고로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요동에서 불법적으로 군사를 배치하여 '요동왕'으로 군림한 이성량에 대항하던 여진족 마을을 돕던 중 오인 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