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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條英機狙撃事件
도조 히데키 저격 사건
南京起義난징의거, 중국어

개요

저격당해 난징 민국병원으로 이송된 도조 히데키



1950년(쇼와 25년) 6월 25일, 중국에 방문해 당시 중국 주석 천궁보와 정상회담을 한 일본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중국인 청년 우쳰잉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사건.

이 사건으로 도조 히데키는 향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중국의 천궁보는 도조 피살 사건의 관리 책임을 물어 축출되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의 거물급 지도자가 외국인에게 암살당한 두번째 사례로, 1909년 메이지 시대이토 히로부미가 조센인 청년 안중근에게 피살당한 뒤로 41년 만의 일이었다. 우쳰잉은 중국을 침탈해가는 도조에게 반감을 가졌고 그를 제거해 일본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고 진술하였다.

일본에서는 도조 히데키 저격 사건(東條英機狙撃事件)으로 불리고 중국에서는 냉전 시대엔 일본과 똑같이 불렀으나 현재는 난징의거(南京起義)또는 우쳰잉 의사 난징역 의거(吳傳英義士南京站義舉) 등으로 부른다.

배경

일본이 미국마저 항복시키고 중국에 공세를 퍼붓던 1947년, 중국은 결국 충칭이 함락되고 모든 지역이 일본군에 손아귀에 들어가며 일본에게 굴복하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해체되고 일본이 세운 왕징웨이난징 정권은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정권임을 자처하였으나 대부분중국인에겐 괴뢰 정부일 뿐이었다.

1945년 도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이것을 21개조의 서약문(21箇条の誓約文)이라 부르며 일중 화해의 상징으로 삼았으나 중국은 사실상 모든 것을 내준 체로 일본에 종속되었다.

일본은 산업화를 위해 농토를 개발하려 했고, 이를 위해 중국의 쌀을 헐값에 수탈했다. 일중전쟁으로 파괴된 인프라는 일본의 수탈에 대주는 통에 복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일부 친일파들을 제외한 중국 민중의 삶은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주요 요충지인 산동과 광동이 일본의 외지(外地)로서 할양되어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중국으로의 일본 자본가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진입, 또한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중국의 철도도 상당수가 일본 소유가 되어버렸다.

공동 방공의 명분 아래 중국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항일봉기 진압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친일 경찰들을 앞세워 중국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는 와중에 1950년, 중국인들에게 이 모든 상황의 원흉으로 지목된 도조 히데키가 방중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조는 천궁보와의 정상회담과 왕징웨이 사망 위로차 중국을 방문하기로 하였고, 그 시점은 1950년 6월 24일로 예정됐다.

이때 중국인 우쳰잉(1923~1951, 당시 27세)는 평소부터 증오해오던 도조를 암살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거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산 발터 P38 권총을 준비했다. 6월 24일, 도조는 예정대로 난징공항에 도착해 천궁보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6월 25일, 도조는 베이핑에 주둔한 주 지나 일본군 격려를 위해 핑한철도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중국군 병사들이 호위를 위해 줄지어 섰고 동원된 난징 시민들이 일장기와 화평건국기를 들고 도조를 영접할 준비를 했다.

사건 발생

우쳰잉은 6시 42분경 이미 난징역에 도착해 도조가 타고 갈 특급열차의 바로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경찰로부터 일장기를 받았다. 당시 군중은 번갈아가며 1명은 일장기, 1명은 화평건국기를 든 채로 도조를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 20분, 도조 히데키가 난징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등 관료들과 일일이 배웅을 나눈 뒤에 중국군 사령장 쑨뎬잉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이내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던 찰나, 군중으로 위장하고 일장기를 흔들고 있던 우쳰잉이 즉시 경호하던 군인들 사이로 치고 들어가 도조를 향해 2발을 격발한 뒤 제3탄을 허공에 쏘며 군인들에게 제압당했다. 본래 그는 쑨뎬잉 등 자리에 있던 "한간"들도 처리하기 위해 총탄을 모두 장전해왔으나, 조기에 진압되었다.

그는 도조에게 총을 쏘면서 "중국 만세!(中國萬歲!)라고 외쳤으며, 도조는 제1탄을 왼쪽 가슴에, 제2탄을 아랫배에 맞고 쓰러졌다. 우쳰잉은 군인들에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고 체포되었다.

도조 히데키는 난징 민국병원으로 옳겨졌다. 심장을 피해 총을 맞긴 했으나 과다출혈과 도조의 고령으로 인하여 소생할수 없었고 11시 7분경 이송 1시간여 만에 도조는 사망했다. 향년 65세.

반응

일본

悲報をお伝えします。 先ほど、支那に訪問中だった東條英機内閣総理大臣閣下が、南京から北京へ向かう列車に乗るために軍を査閲されていたところ、支那人暴徒に襲われて逝去されました。
비보를 전합니다. 방금 전, 지나에 방문 중이시던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 각하께서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르기 위해 군을 사열하시던 중 지나인 폭도에게 습격당해 서거하셨습니다.
도조 히데키 서거를 알리는 일본 라디오 방송


일본에는 즉시 소식이 알려졌다. 일본 전역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었고 쇼와 덴노마저 이례적으로 옥음을 내서 도조의 죽음을 추모했으며 제국의회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전쟁 영웅 도조 히데키의 저격과 사망은 일본 내의 여론에 불을 붙였다. 일본인들은 매우 격분하며 당장 남경의 총통부를 때려부수라고 전국민 규탄 대회를 열었으며 도조의 국장에는 일본의 정,재계 인사와 수백만명의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번 일로 지나의 제국 인사에 대한 허술하고 무성의한 경호가 드러났다."며 앞으로는 일본 인사가 방중하더라도 일체 일본군이 경호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또한 현장에 있던 경호병력 지휘관들을 중국이 처벌하기를 요구했다.

당시 일본의 학생들은 도조의 영면을 바라는 편지를 썼고, 심지어 도조의 보좌관은 죄책감에 이기지 못해 할복을 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국민적 분노로 말미암아,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안전 보장을 명목으로 주둔군을 증강시킬 것, 일본 조차지에서 중국인은 모두 퇴거할 것, 중국은 범인을 사형에 처하며 앞으로 재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했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이 납득할 만한 사후처리가 되지 않을 경우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이는 일본군의 재출정을 통해 중국을 다시 밞아버리겠다는 뜻이나 마찬가니였다.

심지어 일본 내에서는 난징 민국병원에서 의사들이 도조를 고의로 죽게 했다는 설까지 확산하였다.

여담으로, 조센과 다이완에는 본의 아니게 도조의 서거가 호재가 되었는데, 당시 문민 관료들은 조속히 조센 및 다이완의 내지 편입을 통해 완전한 일체화를 도모하자고 했으나 도조는 일본의 순수한 피를 지켜야 하지 않겠냐며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도조가 죽고 군인총리시대가 종료, 명목상 문민정부가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얼마 안가 1952년 두 지역의 내지 편입이 이뤄졌다. 도조의 서거는 최소한 내외일체를 10년은 앞당겼다. 최악의 경우엔 1차 대전 이후 영국의 인도처럼 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東條英機日本帝國總理東條英機,對閣下的噩耗,全中國和中國人民表示衷心的哀悼。 日本帝國人民感受到的傷心和憤怒,中國怎麼能不分享呢? 尤其是對東亞先行者犯下如此大罪的逆賊吳振英,必須接受上天的審判。 全體中國人民默哀。 爲了故人的長眠。
도조 히데키 일본제국 총리대신 각하의 비보에 전 중국과 중국인민은 마음으로부터 조의를 표합니다. 일본제국 국민들이 느낄 상심과 분노를 어찌 중국도 공유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특히 동아의 선구자께 그 같은 대죄를 저지른 역적 우쳰잉은 반드시 하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전 중국인민은 묵념합시다. 고인의 영면을 위하여.
당시 중국 중앙방송


중국은 그야말로 설설 긴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싹싹 빌었다. 대동아공영권 수장국이자 대동아회의 의장국이며 중국 난징정권의 숙주인 일본의 총리가 중국 수도에서 피살된 대참사였다.

거기다 일본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위협해오자 중국은 더욱 두려움과 트라우마에 떨었다. 특히 1950년의 중국은 5000만이 희생되고 나라 자체가 잿더미가 된 10년간의 일중전쟁이 끝난지 불과 3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다시 중국을 응징하러 온다는 것은 재앙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우쳰잉을 사형에 처함은 물론이고 일본에 부주석, 국무원 총리, 각부 수장 등은 물론 수행원 등으로 구성된 사죄 사절을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 제국의회까지 가서 도조를 추모하고 사죄를 했다.

심지어 일본이 아직도 만족하지 않자 천궁보 본인이 도쿄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이런 노력 끝에 겨우 "특단의 조치"라는 재앙은 면했으나, 오히려 도조 저격사건으로 그나마 남은 중국의 권리도 모조리 박탈당하고 말았다. 일본인 보호를 명목으로 주둔군이 더욱 증강됐고 조차지를 확장시켜 주는 등 일본이 내건 "납득할 만한 사후조치"의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즉 결과론적으로는 이 사건은 오히려 독이 되었던 셈.

독일

아돌프 히틀러는 이례적으로 직접 라디오 연설에 나서고 "오늘 일본에서 나의 친구를 잃었다.(Heute habe ich meinen Freund in Japan verloren.)"라는 말을 남겼다. 원수 헤르만 괴링은 "동양의 선구자로서, 그의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Als Pionier des Orients wird sein Werk für immer in Erinnerung bleiben)"라고 말했다.

이어 독일 외무부 및 주일 독일대사관도 퓌러의 뜻대로 일본에 엄중한 위로를 전달했다.

이는 꼭 립서비스라고 하기도 뭐했던 것이, 히틀러는 도조 히데키를 두고 환상의 콤비라고 했을 정도로 도조와 개인적으로도 각별했다. 특히 전후 급격히 양국의 이견이 늘어나는 와중에도 일독 추축동맹이 유지된 것은 도조의 친독 성향과 히틀러와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친독파인 도조가 피살되자 마자, 일본은 독일에게 매우 불손해졌고 이듬해 1951년 결국 추축 동맹은 깨져버렸다. 이는 사실 대일본제국의 출발에 있어 근본적인 원인도 있었는데, 군은 프로이센, 정치 체제는 영국을 참고했기에 각각 독일과 영국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민관료들은 대영제국을 멸망시킨 독일을 탐탁지 않아했다.

미국

적국의 총리였기에 미국에선 공식적으로는 어떤 입장도 내지 않았다. 다만 미국의 언론에는 제1면 특종으로 보도되며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결과와 영향

재판

중국 재판소는 우쳰잉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당시 현장에 있던 경호병력 지휘관 7명에게 종신형등 상당히 엄한 형에 처해졌다. 재판부는 우쳰잉에게 "맹방국 수장에 대한 살인행위는 피고가 주장하는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중국, 나아가 동아에 막심한 피해를 줄 뿐이다."고 질타하며 가차없이 사형을 내렸다.

1951년 1월 29일, 우쳰잉은 난징의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여담으로 그는 일본의 신질서가 지금부터 50년도 지나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는 유언이자 예언을 남겼는데 이는 1990년 공영권이 붕괴하며 39년 뒤에 실현되었다.

여담

사실 도조는 이 일이 아니어도 1952년에 총리직을 퇴임하고 막후로 물러날 예정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도조의 나이 66세면 상당한 고령이었고, 68세인 52년에 퇴임하는 것이면 적절한 은퇴 나이였다. 다만 도조는 은퇴를 준비하면서 후임으로는 다시 육군 출신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군인 총리 시대가 더욱 상당 기간 이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