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히토 인민공화국
萊仁人民共和國
국기 국장
위대한 지배자의 라이히토
偉大な支配者のライヒト
상징
국가 빛이 나는 사람들
국조
솔개
국화
풍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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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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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

  • 소비에트 민정청 1944년 4월 2일
  • 제헌절 1954년 8월 12일
  • 독립 1954년 11월 24일
  • 내전 1972년 3월 17일
  • 내전 종결 1983년 1월 8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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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하츠미 도
최대 도시
류케이치 도
면적
162. 226km²
내수면 비율
3%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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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2,103, 310명
밀도
116명/km2
인종
라이히토인 42%, 첨관인 35%, 일본인 15%, 한국인 5%, 기타 3%
출산율
0. 87명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일본 벤(사투리)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영어
종교
국교
국교 없음(국가 무신론)
분포
무종교 67%, 불교 21%, 토착 신앙 10%, 기타 2%
군대
라이히토 인민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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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
2부
6시
12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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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공산주의, 다당제, 단원제
민주주의 지수
5.42점(혼합적 체제)
국가 원수 (국가인민주석
당 위원장)
스기우라 뱌쿠야
정부
요인
당 총비서
미야마 코우지
라이히토 인민회의 의장
타야마 노부아키
내각 총리
야마오카 마사루
국가인민보안본부장
쿠제 류노스케
국가외무성장 겸 총서기
히로세 타츠야
여당
라이히토 인민당
원내 야당
행복인민당, 라이히토 사회민주당, 내부위원회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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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 체제
GDP
(PPP)
전체 GDP
$2조 891억
1인당 GDP
$65, 074
GDP
(명목)
전체 GDP
$1조 9480억
1인당 GDP
$59, 893
무역
수입
$1천 463억
수출
$2천 5230억
외환 보유고
$6천 104억
신용 등급
무디스 B+
S&P B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라이히토 엔 (RE¥)
ISO 4217
RE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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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 +7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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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63년
북한: 1954년
UN 가입
1957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조로1가길 빌딩 7층
ccTLD
.re
국가 코드
391, RE, REC
전화 코드
+37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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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전 지역[1]


라이히토 인민공화국(일본어: 萊仁人民 共和國 라이히토 진민쿄오와코쿠[*], 영어: People's Republic of Reichto 피펄즈 리퍼블릭 오브 라익토우[*])은 동중국해 해상에 위치한 도서국가이다. 지구상에 얼마 없는 공산주의 국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주석의 임기는 죽기 전까지이다. 수도는 하츠미 도이고 최대도시는 류케이치 도, 영토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의 라이히토는 일본 패망 직후 소련이 발빠르게 점령하여 군정을 세워 통치했다가 1944년에 독립했다. 첨관과는 달리 정세를 따라 일본계임을 자부하고 있지만 영토분쟁도 있는 편이다. 대만과 매우 친하여 대만과 일본, 러시아의 경제 지원으로 선진국이며, 경제 성장이 더뎠지만 시장 경제를 빠르게 도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몰락의 위기를 벗어났다. 군사력도 강력하며 대기업들보다는 중소기업 위주로 경제가 돌아가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통화는 라이히토 엔으로 한화 약 2500원이며, 3달러의 가치를 지녔다.

타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국민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며 선거는 치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주석들이 딱히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아니라서 혼합형 체제라는 점수를 가졌다. 현 국가주석은 명군이라 불리는 스기우라 마코토의 3째 아들인 스기우라 뱌쿠야다.

국호

나라 이름의 경위가 조금 웃긴데, 원래 이 나라 이름을 지을 때 스기우라 이츠시는 빛나는 나라라는 뜻을 짓기 위해 국명을 빛, 즉 라이트(Right)로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츠시의 집안이 미국에서 살았다곤 하였지만 가난하여 학교도 중졸이였다. 물론 중졸이어도 라이트 정도는 쓸 줄 알겠지만, 이츠시는 독립운동 탓에 그 단어를 까먹어 결국 어감대로 작성, 그리하여 라이트(Right)가 아닌 라이히토(Reichto)로 작성하였다는 어이없는 이야기... 참고로 영어로는 라익토우, 한자로는 라이렌련이라고 발음한다.

역사

선사 시대

기원은 오키나와와 타이완 섬에서 건너온 인구로 추측되며, 부족국가를 이뤄 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는 등 상당한 문화를 자랑했으며 특유의 문화로는 가축을 신처럼 모시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 이유를 추측하자면 본인들 태어나기도 전에 생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또한 뼈조각을 모아놓고 괴상한 물품을 만들었는데, 용도는 제사용 제단이거나, 그냥 악취미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이후 문화가 발달하자 전쟁이 일어나 결국 자멸했다.

형성

그러나 라이히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14세기 가고시마에서 살던 어부 가족이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여 이 섬에 도달하여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놀란 어부는 다이묘를 찾아가 거대한 섬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에 다이묘 역시 놀라 쇼군에게 이를 보고하고, 그리하여 쇼군의 명을 받은 17명의 개척단이 어부를 앞세워 섬을 찾아간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섬은 크지 않았고, 어쨌든 섬을 발견한 개척단들은 일출 때 이섬을 발견했다고 하여 큰 섬은 히노데노라는 이름을 붙이고, 중간 크기의 섬은 늦게 발견하여 아침 때 발견했다 하여 아사노 섬이라고 명명하고, 작은 섬은 무지개가 뜰 때 발견했다 하여 니지노 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후 쇼군은 개척단의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여기에 70명 정도의 인구와 다이묘를 파견하여 라이히토가 형성되고,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17세기에 정씨 왕조에서 12명 정도의 피난민들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도주하여 어쩌다가 이곳으로 도착하여 대만인들도 살게 되었다.

그러나 1850년대 이곳에서 다이묘가 너무 심하게 핍박하자, 결국 첨관의 소식을 들어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참다못해 맨주먹으로 맞서고 희생들을 치룬 끝에 다이묘를 쳐죽이고 히노덴 왕국을 선포한다. 그렇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 질질 끌다가 국가로 인정을 했지만, 곧이어 병력을 상륙시켜 헌병들이 많은 민간일들을 학살하고 결국 첨관처럼 일제 강점기가 되버린다.

라이히토의 일제 강점기

물론 말이 나빠서 일제 강점기지. 원래는 일본의 자치령 수준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인 카토 이치로를 불러와 총독 자리에 앉힌다. 이치로는 라이히토에 파견된 일본군 중위 출신의 엘리트로, 청일전쟁 당시 해전에서 매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치로는 곧바로 헌병들을 파견해 포로가 된 과거 히노덴 왕국군들을 모아 동료들을 쳐죽이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렇게 죽은 포로들의 머리를 따고 몸통은 개복한 뒤 머리는 효수하고, 몸통은 장기를 뺀 뒤 나무에 걸어놓는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해 히노덴 왕국 국민이었던 이들에게서 원성이 높았다.

일본군의 시위 진압

이러한 이치로의 만행들에 분노한 국민들은 독립을 인정하라는 시위를 벌였으나,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총소리 뿐이었다. 발포를 지시한 이치로의 부관 시노다 조장은 시위대를 즉결 처분하고 고유 문자를 탄압, 세뇌교육 등 전형적인 일본군의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집을 박차고 나온 젊은이들은 진작에 나온 중년들을 찾아가 해방군을 결성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해방군의 모습.

한편 해방군을 결성한 자들은 국내에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이와쿠 후마와 스기우라 이츠시라는 젊은이들이 1931년 장제스에게서 군자금을 받아와 질이 상승한다. 이에 해방군은 본격적으로 아사노 섬으로 진공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전원 수복은 실패했지만 40% 수복을 성공시키며 유종의 미는 거두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군에게 화력전과 게릴라전을 교묘히 섞어가며 싸우던 해방군은 수복할 지역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하...였지만 희생이 만만치 않아 소비에트 민정청 전까지 전원 수복하기에는 실패한다.

히노데노 섬에서 싸우던 중 일본군의 지뢰가 폭발한 모습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사실상 온 주민들이 해방군에 가까웠는데, 오죽하면 한 부락이 해방군 기지가 되어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전선에 직접 참전하여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 매우 맹렬히 싸워 한 미군은 이렇게 술회했다.

마치 여러 마리의 맹수들을 보는 듯 하였다. 내가 지금 바다에 있는지 밀림에 있는지 구별이 안 되었다.

전쟁 종결 이후, 카이로 회담에 따라 일본 제국에게서 독립한 라이히토는 미국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소련이 점령하여 이는 라이히토가 친러 국가[2]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으며,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영향을 미친다.

독립

1대 인민회의에서 헌법을 정하는 모습.
초대 국가주석 스기우라 이츠시

독립은 1954년으로 헌법을 정하고 11월 24일에 독립했다. 이미 세뇌로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가 된 라이히토를 이제 통치할 필요 없던 소련은 본인들은 24일에 떠날 것이라며 임시정부를 만들라고 한 뒤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후 지지 속에 스기우라 이츠시가 국가주석이 되고, 이와쿠 후마가 인민회의 의장, 타카모토 레이지가 총비서로 임명받는다. 첨관에 이어 라이히토까지 독립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일본은 국제사회에 독립 거부를 요청했으나, 소련이 무언의 압박으로 유엔에 압력을 넣어 독립하게 만들었다.

라이히토 초대 국가주석 스기우라 이츠시는 헌법을 공포하고 본격 취임 연설을 한 뒤, 나라 건국을 선언하고 군사를 만들고, 행정구역을 지정하여 국가의 기본 틀을 갖춰 나갔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57년 유엔에 가입해 당당하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였다. 인구들을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어떻게 먹여살리냐는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이와쿠 후마는 인민회의를 열어 주 국가의 산업은 '농업으로 하되 공업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제시한다. 라이히토에 자원은 없어보여도 땅만큼은 비옥하여 농사 짓기 좋은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원이 부족한 나라인 줄 알았던 라이히토에 석유와 금이 발견되며 상황이 역전된다. 정부에선 여러 복지 혜택을 해 한때는 아시아에서 복지가 가장 좋은 나라로 손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인민회의가 다시 개최되는데, 이유는 자원이 고갈되면 어떻게 하냐는 문제였다. 그러나 상술했듯 농업이 최근 성공을 거두며 농업으로도 부유하진 않지만 개발도상국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자원 고갈은 문제였기 때문에, 사우디나 브루나이 같은 나라에게서 석유를 수입하고 대한민국 같은 석유 안 나는 나라에게 석유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떼돈을 벌어들이자는 결의안이 제출된다.

내전과 그 이후

이처럼 풍요로운 나라였던 것 같은 라이히토에 위기가 닥친다. 라이히토의 2대 국가주석이었던 스기우라 신이치로는 권위주의는 아니었으나 상당히 공산주의적인 성격이었고, 그 덕에 국민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은 탄원서를 올리고 집회를 했지만, 탄원서는 위에서 처리되고, 집회는 최루탄으로 인해 해산된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후에도 똑같이 시위를 벌였고, 똑같은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기자인 카와무라 유스케는 이러한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이를 들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를 안쓰럽게 여긴 한 고문경찰이 그를 몰래 풀어주어서 유스케는 간신히 살아남지만, 더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유스케가 경찰서에서 몰래 권총 2정을 훔쳐 시민군을 결성한다.

3대 국가주석 스기우라 신이치로
반란군을 이끈 카와무라 유스케

시민군은 경찰들을 상대로 각목과 권총 2정으로 맞서고, 수많은 희생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그들을 몰아내고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기들을 탈취한다. 유스케는 이후 진민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선포하고 본인이 대통령이 된다. 이에 대응하여 신이치로 주석은 계엄령을 선포, 계엄군을 투입하여 사태를 확실히 마무리 지을 것을 명령한다. 그리하여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내전 초반에는 라이히토 인민군이 유리했다. 왜냐하면 국제 사회로부터 지지도 받았고, 화력부터 모든 게 월등하였기 때문. 하지만 중반에는 일본과 첨관에 지지를 받고 명목상 뜻은 좋았던 진민칸 시민군이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실을 접한 신이치로 주석은 필리핀 섬을 통일한 염사국에게 지원을 받기로 사인에 도장까지 받아 무기를 지원받았다. 이렇게 인민군 역시 질이 상승하며 시민군을 몰아붙였고, 결국 압박에 시민군은 영토를 빼앗기기 시작했고, 인민군이 수도인 방송국 청사 앞까지 도달하자 유스케 대통령은 한 마디 말을 남겼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모두가 행복한 국가는... 나의 헛된 이상이었던가.

 
— 카와무라 유스케의 녹취록 中

그는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고 한다. 이로서 라이히토 내전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신이치로 주석은 장남 마코토에게 직위를 넘겨주고 하야했고, 2017년 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편 마코토 주석은 사회와 경제를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전은 국가 전체가 아닌 서부 위주로 진행되어 그렇게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마코토 주석은 내전으로 피해를 본 유족들을 안정시키고 보상까지 해주었다. 또한 이번 내전의 원인이 체제에 있다고 보아 체제를 소폭 변경시켰고, 헌법도 조금 바꾸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었다. 이후 건강상의 문제로 뱌쿠야에게 넘겨주고 하야했다. 최근 임기가 잘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로 전임자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세습제를 택하고 있다. 다만 권력은 삼권분립이 되 있는데, 국가주석, 내각 총리, 인민회의 의장에게 공평하게 권력이 나뉘어져 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마냥 독재자가 생기지는 않는다. 이는 내전에서 교훈을 얻은 마코토 주석의 개혁으로 생겨났다. 또한 투표를 하지는 않지만 정치에서는 최소한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경제

섬이 세 개다 보니 통제 자체는 쉽지 않지만 단일국가 체제 덕분에 중앙정부에서 경제 권력을 독점하였다. 인구가 그리 많진 않지만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 덕분에 GDP는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국가이다. 주 산업은 관광업과 광산업, 농업으로 제 1산업이 농업, 2산업이 관광업이다. 농업의 경우는 상술했듯이 비옥한 옥토 덕분에 아시아에서도 쌀 수출은 중국과 베트남을 이어 상위권으로 주식이 쌀 음식이라 생긴 절차이다.

관광업은 화려하진 않지만 그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유적과 친절한 국민들 덕분에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으며, 이 지역에서 주는 쌀고기떡은 보드랍고 맛이 좋기로 유명한 음식이다. 특히 수도인 하츠미 도에는 쌀고기떡이 브랜드인 회사가 많으며, 쌀고기떡과 상추쌈을 해먹으면 맛이 매우 환상적이다. 관광 잡지에 따르면 소박한 문화가 매력적이라고 하며, 문화에 관심 있는 관광객들이라면 꼭 가야 할 필수 국가로 꼽힌다. 광산업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설치한 광산이 많아 발전한 편이며 제철업 역시 일본이 제철소를 많이 설치해 앞으로 제4의 산업으로 꼽히는 추세이다.

외교

대한민국·북한과의 관계

같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국가라 그런지 우호적이다. 대한민국과는 1963년에 수교했으며 북한과는 독립하자마자 여느 공산주의 국가들 포함해 수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6년 전두환 대통령이 류케이치 도에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였으며 북환과는 신이치로 주석과 김일성 주석이 매우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신이치로 주석은 김일성 주석에게 "존경하는 일성이 형님"이라고 부른 적이 있어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실제로도 김일성이 3살 형이라고 함.

일본과의 관계

국민감정은 매우 좋지 않지만 젊은층에서는 우호적인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일제 강점기 탓에 기성세대에서는 일본의 일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가는데,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세대에서도 나라가 발전하려면 어쩔수 없지만 역사는 기억한다 라는 입장이다. 다만 정부 측에서는 서로 우호적인 편인데 아키히토 천황이 사과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첨관과 똑같은 입장으로 일본이란 시장을 잃기는 싫기 때문에...

대만과의 관계

하나의 중국에서 대만을 지지하는 국가이다. 우호적인 관계이며, 중국과 수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교관계 차원으로 수교하고 곧바로 나는 중화민국이 곧 중국임을 믿는다라는 친서를 날려 아직도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다만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지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정부측에서도 골치아픈 입장.

미국·러시아와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에선 식민지 상황에서 해방시켜 준 입장인지라 우호적이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현 정부 수립에 도움을 준 국가이라 친러 국가이다.

첨관과의 관계

그럭저럭이다. 같은 상황을 겪은 국가라서 적대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이지도 않다. 다만 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적이 있다. 이유는 하술.

나루미 제도 영유권 논란

이유는 일본&미국 탓인데, 일본이 처음 라이히토를 발견했을 때 그때는 첨관을 발견 못하고 나루미 제도를 라이히토에 편입시켰기 때문. 물론 첨관 측에서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카이로 회담에서 쇼와 덴노가 우리는 나루미 제도를 라이히토 측에 편입시킨 것으로 아는데 왜 첨관 측에 있냐고 발언했고, 실제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역시 취소하긴 했지만 나루미 제도는 라익토우(라이히토) 땅인 것 같다는 실언을 한 적이 있다. 또한 이 탓에 일본의 이간질로 인해 무력충돌이 발생했고, 라이히토 정부는 멋대로 무력충돌을 일으킨 이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마코토 주석은 나루미 제도는 첨관 땅이다라고 해 사실상 영유권을 포기했다.

해성국과의 관계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그냥 서로서로 돕고사는 관계.

염사국과의 관계

정부군을 지원해서 사이가 좋다. 군사훈련도 같이하고 친밀한 관계.

유럽국가와의 관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다.

군사

라이히토 인민군 참조.

사회

인권이 좋은 편이라고 카더라.

각주

  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경보
  2. 물론 미국과 안 친한 건 아니다. 자세한 건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