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뉴트포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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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포드 초대 대통령
리처드 라이언
Richard Ryan
본명 리처드 덩컨 뉴트 라이언
Richard Duncan Newt Ryan
출생 1899년 11월 5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망 1972년 2월 1일 (72세)
뉴트포드 케터링 렉섬
국적 뉴트포드
임기 영국령 아인랜드 총독
1960년 1월 3일 - 1964년 7월 13일
뉴트포드 대통령
1966년 1월 1일 - 1972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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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이튼 칼리지 (졸업)
런던 대학교 (정치학 / B.A)
옥스퍼드 대학교 (사학 / M.D)
뉴트포드 국립 대학교 (사학 / 명예 박사)
정당 사회안전당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
신체 177cm, 66kg
가족 아버지 노던 라이언
부인 에밀리 라이언
약력 영국군 복무
영국 서민원 의원
보수당 원내 총무
영국령 아인랜드 총독
뉴트포드 초대 대통령
사회안전당 당수

개요

뉴트포드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독재자. 영국령 아인랜드의 총독으로 근무하면서 영국에 반기를 들어 독립을 쟁취해 승리한 뉴트포드의 국부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유색인종을 탄압한 독재자라는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생애

영국 시절

로버트 라이언은 1899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애비 로드가에서 부유한 아일랜드계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성적이 우수하여 이튼 칼리지에 입학했으며, 1917년 런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던 관계로 리처드 라이언은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영국군에서 복무했다. 1921년, 옥스퍼드 대학교 사학부에 진학했고, 1924년 석사 학위로 졸업한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으며, 1929년 정계에 입문해 영국 보수당 소속으로 버밍엄 핸즈워스(Birmingham Handsworth) 선거구에 출마하나, 노동당 루이스 앤더슨 펜(Louis Anderson Fenn) 후보에게 단 49표차로 패배한다. 1931년, 지역구를 바꿔 브리스톨 센트럴(Bristol Central) 선거구에 출마했고 노동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35년 총선에서 다시 노동당 J.J 테일러(J. J. Taylor) 후보를 2500여표차로 꺾고 재선되며,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보수당의 원내 총무(Chief)를 맡았다. 당시 그는 네빌 체임벌린의 '우리 시대의 평화'를 지지했으나, 1939년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입장을 번복하고 처칠을 지지했다. 거국 내각에서 그는 재무부 장관으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재무부 장관이 되지는 못하였다. 1943년, 독립노동당 제니 리(Jennie Lee)를 꺾고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1945년 총선에서는 노동당 스턴 어베리(Stan Awbery) 후보에게 6000여표차로 밀려 낙선했다. 1946년 그는 보수당을 탈당하고 사업에만 집중한다고 밝혔지만 1950년 입장을 번복하고 런던 첼시(Chelsea) 선거구에 출마, 노동당 레오 골드스턴(Leo Goldstone) 후보를 12000여표차로 꺾고 4선 의원이 되었다. 처칠 내각에서 그는 정무부 장관으로 거론되었으나 역시나 장관이 되지는 못하였다. 1951년 총선에서도 노동당 프레더릭 니오넬 톤지(Frederick Lionel Tonge)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1952년, 에밀리 핸더슨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고, 1953년 장남인 폴 핸더 라이언(Paul Hander Ryan)을 낳는 기쁨을 얻었다.

1955년, 그는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으며, 인도 옆의 아인랜드 식민지로 이주하여 식민지 사업을 벌였다. 얼마 안가 그는 아인랜드 내에서 큰 이득을 얻었고 아인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부자가 되었다. 그는 아인랜드 정계에도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보수당 내에서의 인연을 이용해 아인랜드 총독직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1960년 그는 해럴드 맥밀런 총리에 의해 꿈에 그리던 아인랜드 총독에 임명되었다.

아인랜드 총독

아인랜드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아인랜드 내의 경제 부흥을 주도하였으나, 1963년 느닷없이 해럴드 맥밀런 총리가 통수를 때리고 아인랜드의 속국령 독립을 추진하면서 리처드 라이언은 난데없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게 된다. 1964년 7월 13일, 그는 아인랜드 총독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속국령 독립은 제2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이유로 아인랜드 자체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며 아인랜드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뉴트포드 민족 전선을 수립하고 아인랜드 공산당, 아인랜드 사회주의 혁명당 등 좌파 정당과 연합해 거국 내각을 선언하였다.[1] 그는 인도계 주민들에게도 영국에 대항하여 백인-동양인 자치 정부를 세우자고 선동하였으며, 영국 정부는 이에 반발해 아인랜드 독립 진영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인랜드의 수도였던 센트럴 덕섬 내에서 인도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리처드 라이언이 사주한 백인 깡패 조직이 경찰을 제압함에 따라 1차적으로는 리처드 라이언과 민족 전선측이 승기를 잡았다.

1965년 1월 15일, 영국 공군의 아인랜드 공습으로 인해 아인랜드 주요 도시들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1965년 1월 17일 영국군의 아인랜드 상류긍로 인해 아인랜드 주요 도시가 영국군의 손에 넘어가는 등 아인랜드 독립 진영은 큰 피해를 입고 사실상 패배가 유력시되었으나, 리처드 라이언의 반전 연설을 통해 영국과 미국 내에서 반전 분위기가 돌았다. 또한 영국군의 공격이 가디언지를 통해 비판을 받으면서 보수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해 1965년 2월 노동당에 의해 더글러스 흄 총리의 불신임이 받아들여졌다. 1965년 2월 17일, 총리로 선출된 해럴드 윌슨은 아인랜드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독립운동을 중지할 것을 리처드 라이언에게 건의했으나 리처드 라이언은 이를 거절하고 영국군의 사과와 후퇴 없이는 평화 역시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1965년 3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영국을 비판하고 식민지의 시대를 끝낼 것을 촉구하였으며, 영국 내에서도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해럴드 윌슨 내각은 1965년 5월 17일 영국군의 철수를 결정했으며, 1965년 6월 1일 리처드 라이언은 아인랜드의 수도 렉섬에서 승리 선언을 하였다.

독립 이후

1966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뉴트포드 건국을 선언했다. 국호는 자신의 이름에서 따서 만들었다. 건국 기념식에는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총통, 대백제국함세현 외무대신 등이 참여하였다. 1965년 12월 31일 치뤄진 대선에서 그는 99.3%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영국과 사이가 나빴던 관계로 1966년부터 그가 죽은 1972년까지 리처드 라이언은 친나치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연히 독재적인 법안을 승인하면서 유색인종 사이에서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본래 리처드 라이언은 독립 시 유색인종 평등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를 뒤집고 유색인종 차별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는 1966년 3월 백인우월주의, 보수주의 성향 정당인 사회안전당을 창당했으며 나머지 정당을 모두 금지시키고 투표 역시 금지시켰다. 결국 1966년 7월 국가 출범 7개월만에 각지에서 동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지만 라이언 대통령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치 독일의 후원 덕에 안정적으로 국가 운영을 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나치 독일의 지원으로 주요 도시의 공업 시설을 회복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TV를 공산주의자들의 바보 상자라며 금지시키기도 했다. 또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로큰롤을 해로운 흑인적인 울부짖음이라고 비난하며 로큰롤 음반 수입을 금지시켜 젊은이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런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정책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나쁜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비밀 경찰 양성과 군사력 증강을 빌미로하는 계엄령 등을 통해 반사회 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잠시 1970년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측근이었던 아서 플레처에게 거의 모든 전권을 맡긴채 투병 생활을 해야했다. 1972년 1월 건강이 안좋아져 결국 생사를 해맸고, 1972년 2월 1일 사망하였다. 이후 대통령으로 아서 플레처가 당선되었으며 1972년 2월 3일부터 28일까지 성대한 장례식이 치뤄졌다.

평가

긍정적 평가

  • 비록 계기가 권력욕 때문이긴 했지만 영국 식민지 내에서 수탈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해방 운동을 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상 뉴트포드의 국부인 셈이다.
  • 경제 발전으로 뉴트포드를 동남아 최대 경제대국으로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줬다. 특히나 동남아 패권을 장악했던 대백제국의 도움 없이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점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부정적 평가

  • 위에서 언급했듯 사회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고, 청바지, TV, 로큰롤 등을 풍기문란하다면서 금지시켜 최근들이 뉴트포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한 편이다.
  • 자유 선거를 금지시키고 사회안전당 일당 체제를 6년동안이나 유지시킨 독재자적 면모 역시 비판받는다.
  • 나치 독일의 인종 학살을 묵인하고 히틀러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영국, 미국, 대백 등에서 비판받는다.
  • 인종 평등을 약속했으면서 정작 독립에 성공한 이후에는 독립에 큰 도움이 된 흑인 및 인도계 주민들을 오히려 차별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뒷통수를 때렸다는 점 역시 현대 들어서 비판받는 이유중 하나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보수당 1919 - 1946 정계 입문
무소속 1946 - 1950 창당
보수당 1950 - 1964 복당
무소속 1964 - 1966 제명
사회안전당 1966 - 1972 창당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29 제35회 영국 총선 버밍엄 핸즈워스 보수당 9,381표(48.2%) 낙선(2위)
1931 제36회 영국 총선 브리스톨 센트럴 12,094표(57.3%) 당선(1위) 초선
1935 제37회 영국 총선 11,167표(54.8%) 당선(1위) 재선
1943 제38회 영국 총선 13,111표(59.1%) 당선(1위) 3선
1945 제39회 영국 총선 8,731표(46.6%) 낙선(2위)
1950 제40회 영국 총선 첼시 18,084표(67.1%) 당선(1위) 4선
1951 제41회 영국 총선 18,111표(66.4%) 당선(1위) 5선
1965 초대 뉴트포드 대통령 선거 뉴트포드 무소속 7,038,416표(99.3%) 당선(1위) 초선
1970 제2대 뉴트포드 대통령 선거 사회안전당 10,000,052표(100.0%) 당선(1위) 재선

여담

  • 원래는 성공회를 믿었지만 장차 종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사생활에서는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원리를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재적인 면모와 별개로 사생활에 있어서는 역대 뉴트포드 대통령중 가장 청렴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 때문에 20세기의 로베스피에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가정적으로도 충실했으며, 특히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였다고 한다.
  • 생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팬이었다. 또 아스널 FC를 응원했다.

각주

  1. 다만 극소수의 인도인을 제외한 나머지 유색인종은 거국내각에 참여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