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제국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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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제국 제5대 황제
滿悳帝
만덕제 | Emperor Manduk
출생 1932년 1월 27일
대백제국 경성수도시 종로구 창경궁
붕어 2006년 5월 13일 (74세)
대백제국 경성수도시 종로구 경복궁
즉위 1967년 12월 31일
대백제국 경성수도시 종로구 경복궁 근정전
국적 대백제국
작위 太皇敬 (태황경)
재위 대백제국 황제
1967년 12월 31일 - 2006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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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全州)
형 (炯)
군호 선화대군 (善華大君)
부모 부친 순치제, 어머니 태정황후 문씨
형제 선륭제
학력 황립 성균관대학교 (정치학 / 학사)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경제학 / B.A)
종교 유교 (성리학)
신체 169cm, 60kg
부인 신정황후 신씨
자녀 슬하 3남
장남 태원대군, 차남 건락제, 삼남 희청대군

개요

대백제국의 제5대 황제. 추존까지 포함할시 제30대 황제이다.

1932년 순치제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순탄한 인생을 보냈지만 4.11 안보 투쟁으로 형이자 4대 황제였던 선륭제가 거의 강제 퇴위 당하듯이 황제직에서 물러난 바람에 얼떨결에 황제가 되었다. 생각 이상의 역량을 보여주며 성군의 모습을 보여 한때 실추되었던 황실의 지지율을 크게 견인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이후 뇌종양 판정을 받고 2006년 12월 경복궁에서 붕어하였다.

생애

황제가 되기 이전

1932년 1월 17일 순치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때는 경희궁에서 자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군을 피해 장춘부에서 자라기도 했다. 날라리여서 성균관대 음대도 겨우 졸업했던 형 선륭제와 다르게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으며, 공부도 곧잘해 황립 성균관대학교 정치학부를 전체 83등으로 입학했다. 1955년 영국 유학을 떠나 런던 정경대에 입학했다. 영어에 미숙해 성적이 낮긴 했으나, 1961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겨우 받아내고 1966년까지 런던 켄싱턴 지역에서 살았다. 이때 엘리자베스 2세, 키스 리처즈 등 영국의 유명인들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황제가 되다

본래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영국 대학의 연구원이나 교수로 교편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1967년 예기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 대학생 운동권이 전국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여기에 반전, 황실 개혁을 지지했던 일반 시민이 합세하면서 4.11 안보 투쟁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1967년 4월 11일 경성 중앙광장에서 시작된 시위는 점차 황실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동아일보 등 진보 언론들이 황실의 부패상을 취재해 황실 지지율이 30% 밑으로 하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선륭제는 울며겨자먹기로 거의 반강제로 황제직에서 물러나, 영국 버밍엄으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이에 황실에서는 영국에 살고 있던 그를 황급히 귀국시켰으며, 1967년 12월 제대로된 준비도 안된 채 황제직에 올랐다. 선륭제의 무책임함으로 인한 만덕제의 고생하는 모습이 언론에 의해 부각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만덕제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고, 황실 지지율도 50% 위로 오르게 되었다. 당시 공화주의 전환 운동을 하던 사회당의 김성주 당수조차 "X은 형이 싸는데, 그 뒷처리는 동생이 다 한다"라며 신임 황제에 대한 동정심을 보였을 정도였다.

황제 시기

황제 시기에는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시켰다는 평가이다. 1960-80년대 자유당의 장기 집권으로 황실은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되었으며, 사회당 역시 강경파가 몰락하고 황실 개혁 정도만 추구하는 온건파들이 주류로 올라섬에 따라 선륭제 퇴위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 개인의 동정심을 자극해 꼭 필요한 황실 개혁을 어물쩍 넘어가 회피했다는 비판이 있다.[1]

황제로서는 이례적으로 대중들 앞에 자주 연설을 했으며 이로 인해 황실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높아졌다. 또 황제의 사생활을 공개함으로서 1980년대에는 거의 연예인급의 인기를 얻었다. 그 당시에는 미국과 경쟁 체제를 이어가면서 대백제국과 대백 황제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마이클 잭슨만큼 유명하다는 여론 조사가 나온적도 있다. 비록 1989년 경제 침체로 대백제국과 미국의 차이가 벌어져 미국 대통령에게 수모를 당하는 해프닝을 겪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헌신적인 태도로 전세계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1997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추모해 영국 국민들에게 영국 왕실보다 낫다는 평가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가정사는 다소 불행했는데, 그의 형 선륭제가 구토물에 의한 질식사로 사망했음에도 국민 여론 때문에 제대로 장례식조차 치뤄주지 못했다. 그의 아들 태원대군은 1980년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황태자 책봉을 거부해 큰 갈등을 겪었다. 거기다가 1969년 황제가 된 직후에는 그의 아내 신정황후 신씨희청대군을 출산하던 중 과다 출혈로 숨지면서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에 걸린적도 있다. 다행히 건락제가 7살이 되던 즈음에는 아들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 채워주려고 노력하면서 우울증을 극복하였다. 또 의절 직전까지 갔던 태원대군과는 1990년대 중반 사이를 회복하고 다시 좋은 부자지간 관계를 가져, 불행했던 가정사를 극복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년

2002년 급격하게 몸이 쇠락하면서 황태자였던 효원대군에게 사실상 왕위를 물려주었다. 2004년 뇌종양 진단을 받았으며, 세계 최정상급 의사들이 수술하겠다고 나섰으나 스스로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모두 거절했다. 2년동안은 그럭저럭 버티는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 3월 들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2006년 5월 20일 밤 11시 결국 붕어하였다.

건락제와 같은 황실 관계자나 대백 국민들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모두 슬퍼했고, 많은 조문객이 몰렸다. 그와 생전 좋은 관계를 쌓았던 키스 리처즈, 믹 재거, 전인권, 에릭 클랩튼 등의 음악가들이 사후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추모 콘서트를 열었다. 그의 시신은 남조선성 과천시에 묻혔다.

가족

성향

평가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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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부분은 후일 그의 아들이었던 건락제가 추진하면서 어느정도 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