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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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청 초대 황제
成祖 太皇帝
성조 태황제
출생 1883년 2월 12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사망 1953년 6월 2일 (70세)
옹청 섬서성 서안
능묘 경릉(敬陵)
재위 청 감국섭정왕
1910년 5월 2일 ~ 1945년 12월 31일
옹청 황제
1946년 1월 1일 ~ 1953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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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하늘이 청나라를 저버렸구나! 청나라의 명이 다하였구나!
(天棄淸! 淸命絶!)
헌무제가 보계 전투에서 패한뒤 내뱉은 탄식

옹청 초대 황제이자, 청나라의 2대 순현친왕. 묘호는 성조(成祖),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연호는 선통(宣統). 세조 황제는 헌무제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여 헌무황제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적법한 절차를 통해 제위를 승계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묘호는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옹청측에서 올린 묘호와 시호를 인정하였고 위패를 태묘에 모셨다. 시호는 태황제고, 여타 청 황제는 연호+제로 부르는 관습상 '선통제'로 호칭해야 하나 한국 민간에서는 절대다수가 헌무제로 부른다.

광서제의 선양으로 청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한 뒤에도 각지의 친황실 세력을 이끌어 중국 섬서 일대에서 청조를 재건한뒤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세력을 키워 중원과 사천성을 장악하였으며 장강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과 대치하는 양대 세력으로 거듭났으나 신장에서 세력을 키우다 동진한 공산군에게 보계 전투에서 패한뒤 서안에서 내응한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교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유능했던 인물이고 국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었으나 전투 하나로 몰락하여 최후를 맞이한 군주라는 점에서 전진 세조 부견에 비교되기도 한다.

생애

초기 생애

각지의 복벽파 세력(특히 감숙, 섬서, 사천, 호북, 하남성 지역의)을 이끌고 청조 재건에 힘썼다. 이후 한국 만주왕으로 있던 조카 베키투를 청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가 훙하자 주위 신료의 설득에 직접 청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한국대항하다.

1907년 10월 2일, 구국군은 하북성 남부 제남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한국군에게 패배하였고 자이펑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태산에서 농성을 벌였다. 황하 이북만 통치할 생각이었던 한국은 자이펑을 가만 두었다가는 하북 통치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 판단, 태산 남부의 태안과 래무를 점령하여 구국군을 포위 섬멸하려 하였다. 그러나 12월 6일, 약 2천여명의 구국군은 태안 동부에 위치한 한국군의 약한 거점을 공략하여 포위망을 뚫었고 약 90km를 행군하여 제녕시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서안에서

제위에 오르다

최후

궁내에서 내응한 반군들은 잠시동안이나마 진압당했고 그틈을 타 헌무제의 유해는 무사히 수습되었다. 유해는 한국에 있던 만왕 일가에게 송환되었고 1954년 2월 7일 심양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선통제는 하북에 있던 청서릉에 묻혔고 능호는 경릉으로 했다. 이후 2001년 5월 성도에 있던 아들 효종 의황제의 강릉(康陵) 옆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