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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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4대 황제
세조 무황제 | 世祖 武皇帝
출생 1870년 1월 3일
대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즉위 1921년 1월 1일 (50세)
대한국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961년 3월 9일 (91세)
대한국 천도부 평안궁 명정전
능묘 헌릉(憲陵)
재위 대한국 황태자
1890년 2월 10일 ~ 1920년 12월 31일
대한국 황제
1921년 1월 1일 ~ 1961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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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제4대 황제.

상당히 늦은 나이에 즉위했으며(만 50세),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것,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내었고 여러 후일담 때문에 현대에 들어와 가장 많이 언급되며 많은 존경을 받는 황제이기도 하다.

생애

난봉꾼 태자

섭정기

1912년, 세조는 이미 41세의 중년이 된데다가 원자까지 태어나자 1915년 7월 2일, 광종은 세조를 조선왕에 봉하고 섭정을 맡긴다. 이 때부터 대한국 황태자는 조선왕을 겸하게 되었다.

치세

신분제 정리

추밀원의원 조의진이 말했다. 선대 황제 폐하들의 능호는 모두 한글자였습니다. 그러나 작금 제후왕들의 능호도 한글자입니다. 천자와 제후의 차이가 없어서는 안될 일이니 폐하께서 이를 살피소서.
이어 추밀원 부의장 정헌욱이 말했다. 조위주와 사마진주들의 능호가 두글자였으니 본래 한글자 능호가 두글자보다는 격이 높습니다. 하나 태조 고황제 폐하의 능호는 두글자였으니 이를 본따 선대 황제 폐하들의 능호를 두글자로 다시 올려 제후왕과 격을 두소서.
차라리 그렇다면 건원릉의 호를 한글자로 고치고 제후왕의 능호를 두글자로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황제가 말했다.
세조실록

역사개수

정화 9년(1954년)은 세조의 역사개수가 활발해진 해였다. 조선 왕조 역대 국왕들의 묘호를 고쳐 올리거나, 이전 폐주들에 대해 시호를 내리는 등 다소 충격적인 역사개수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세조는 여러 국난을 거친 이후 국가를 재정비하고자 했다. 학문적 풍토가 자유로워지며 지존에 신성불가침이었던 군주의 권위가 점차 무너지고 민간에서의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역대 한국사 군주에 대한 보다 엄격한 학문적 잣대가 들이밀어지기 시작했다. 현대의 가치와 전통적 가치의 필연적인 충돌이었으나 세조는 이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2월 17일, 고려 제32대, 제33대 국왕이었던 우와 창을 왕씨로 인정하고 그들을 각각 회민왕(懷愍王), 양애왕(襄哀王)으로 추봉했다. 우창비왕설이라는 명분을 토대로 세워진 조선과 그 왕통을 이은 대한국 황제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현대 학술적으로 분석하였을때 우와 창이 공민왕의 자손이 맞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 결정에 대해서도 신료들이 대한국의 정통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끝내 밀어붙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많은 사학자들이 옛 고려 국왕이었던 우와 창이 신돈의 소생이 아니라 왕씨의 손이라고 한다. 짐은 이가 현대의 과학적 분석에 의거한 것으로 합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하여 우와 창을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고 시호를 내리어 제사를 지내코자 한다. 이에 대한 경들의 생각을 묻고 싶다.

이에 추밀원 의원 이규가 감히 말하였다.

신이 감히 말하옵니다. 우와 창이 경효대왕의 친손이 아님에 대해 옳고 그른지 논하는 것은 학문의 영역이며, 폐하께서 우창을 왕통으로 인정하려는 것은 정사를 다잡고 국가의 사직을 바로세우는 일과 하등 상관없는 것입니다. 부디 우창을 왕손으로 인정하여 스스로 불효를 자처하지 마시고 학자들의 주론을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하나의 설로 남기십시오.

황제가 말을 이었다.

태조께서 대업을 이루시고 문조께서 제국을 개창하시는 동안 수많은 국난이 몰아쳤으며 짐에 치세까지도 그러했다. 그동안 만방의 국가들은 수차례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지만 그럼에도 대한은 끝내 그러하지 아니했다. 고려는 이미 망징을 떨치지 못하고 무너진지 오래이다. 짐이 그들을 왕으로 추봉하는 것은 지금 옥좌에 앉아있는 이로서 덕을 베푸는 것이며 부담을 짊어지더라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선조께서 지고 계셨던 것을 짐이 해소하는 것인데 어찌 불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후대가 계속하여 짊어질 부담을 짐이 낙착코자 하는 것이니 경들은 짐의 뜻을 헤아리라.
세조실록

아울러 고려 말대 왕인 공양왕(恭讓王)에게도 소정왕(紹定王)이라는 새로운 시호를 올리고 고양에 위치한 릉을 재정비하여 왕릉의 형식으로 했다.

이전까지 연산군과 광해군이라는 봉호로만 불렸던 폐위된 조선 국왕들에게 각각 회양공(懷煬公), 장민공(莊愍公)의 시호를 올렸다. 물론 종묘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조선 인조의 아버지 원종에 대한 추존을 취소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능호도 장릉에서 정원대원군묘로 환원되었다.

승하

승하 불과 하루 전 조회에서 평소와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던 세조는 이튿날 아침인 1961년 3월 9일 눈을 뜨지 못하고 붕어했다. 갑작스러운 승하였음에도 세조는 당시 이미 91세의 고령이어서 온 국민은 물론 대신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침통하기 보다는 차분했고 다음 황제의 치세를 기대하는 밝은 분위기였다. 또한 세조의 유훈에 따라 한국 사상 최초로 국상이 5개월에서 3년이 아닌 1개월 가량동안만 진행되었는데 이에따라 국상 절차가 매우 간소화되었다. 이후 한국 황제의 장례식은 모두 1개월 안팎으로만 진행되게 되었다.

가족관계

총 6남 8녀
신헌무황후 정현무황후
자녀 없음 장남 선종 문황제
차남 헌왕
장녀 정명공주
4남 문왕
3녀 영명공주
5녀 숭명공주
은귀비 장씨 영귀비 금씨
차녀 정효공주
3남 의왕
5남 경왕
4녀 순효공주
6녀 장효공주
7녀 평순공주
6남 은왕
8녀 정순공주

자녀는 총 6남 8녀로 대한국 황제중에 가장 많다. 게다가 장남이자 처음으로 태어난 자녀인 선종은 세조가 41세에 낳은 자식이며 마지막 자녀인 8녀 정순공주는 무려 1951년생으로 세조가 만 80세일때 태어났고 현재도 생존중이다. 아울러 두번째 귀비인 영귀비 금씨는 1920년생으로 3남 의왕보다도 연하이다.

정현무황후는 1890년생, 은귀비 장씨는 1894년생, 영귀비 금씨는 1920년생이었다. 특히 정현무황후와 은귀비는 나이가 비슷하고 자녀들도 서로 나이가 비슷해 차기 황위에 자신들의 자녀를 올리기 위한 궁중 암투 같은 것이 있을거라 당대 사람들은 추측했지만 실상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황후와 두 귀비는 매우 사이가 좋았고 갑갑한 궁중 생활 속에서 서로서로에게 의지하는 의자매로 지냈다. 황후는 은귀비를 큰 아우, 영귀비를 작은 아우로 친근하게 부르며 자주 다과시간을 가졌고 자녀들도 친한 형제처럼 지냈다. 이로 말미암아 1920년대 중후기부터는 매우 보수적인 궁에서도 신분의식이 많이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후계자로 선종을 재빨리 확정하여 문제를 없애고 진보적 성향을 지녀 황실 제도를 뜯어고치고 내부의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한 세조의 공이다.

평가

오전 한림원 학사와 춘추관료들이 황제를 알현하여 시호와 묘호를 올리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던중 무리중 김관현이 황제께 아뢰었다.

대행황제께서는 차례나 되는 국난을 능히 이겨내셨으니 그 공이 중시조에 버금간다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광종 황제로주터 천명을 이어받아 그 위행과 업적이 많은 의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묘호는 마땅히 세조(世祖)로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에 황제를 비롯한 좌중의 신료들이 수긍하였다.

선종실록 정화 16년(1961) 3월 16일 기사

혼란스러웠던 아시아의 30~50년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한국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게한 명군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으며 서재필, 김창암, 여운형등 유능한 수상들이 연이어 출현하는 호재가 겹치며 평가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정당간의 권력 쟁탈전을 이용해 교묘히 헌법제정 이전의 황권에 버금가는 전제적 권력을 휘두른 최후의 황제이지만 의회를 존중하는 행보를 보였고 의회에서 의결한 사항에 대해 반대한적은 거의 없었다. 1934년 의회에서 다수당이 없을때 직접 이동휘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하여 혼란을 수습했고 1939년 이승만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인기를 잃어버리자 직접 해임한뒤 김창암을 수상에 보임했다.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올 정도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본인이 황제가 되면 정사는 의회와 정치인에게만 맡기겠다거나 자식은 정략혼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거나 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하였으며 성평등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12.10 운동 시기에는 신분고하, 성별에 관련없이 광범위한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익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광종의 승하 이후에는 광종의 모든 후궁들에게 재가를 허가하고 궁을 떠나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아울러 후궁 제도를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왕가는 물론 민간에서 행하던 일체의 적서차별을 금지했다. 세조 이전까지는 보통 정실 측실 구분 없이 아들은 친왕으로 구분했지만 정실 소생 여성은 공주, 측실 소생 여성은 옹주로 작위부터 달랐다. 또한 아들에 다 똑같은 친왕이라고 같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오직 정실 소생의 친왕만이 황제가 될 수 있었으며 내탕금 사용에도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러한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모든 남성 후손은 친왕, 여성 후손은 공주에 봉하고 내탕금 운용도 모두 평등하게 바꾸었으며 아울러 무조건 ‘장자’가 황제가 되도록 조치했다. 한마디로 정실 측실 소생에 상관없이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 차기 황제가 되도록 고친 것이다. 물론 이 조치에는 선종이 당시는 후궁인 재인 신분이었던 효현무황후 출생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적서차별 금지는 한국에서 처첩제가 사라지고 일부일처제가 정착하는데 공헌했다. 왜냐하면 첩의 자식이라며 서자를 종처럼 부려먹거나 하는 행위가 금지됐고 가주의 사후 재산상속 때도 적서자 모두 같은 대우를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조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재산이 이리저리 분할되어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게 된 귀족이나 자본가등 상류층 및 사회지도층이 앞장서서 일부일처를 실행하게 만든 것이다.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지켜야했던 전통적인 궁중의 합방 예절 또한 폐지했다. 동지나 하지에는 안된다거나 합방을 하기위한 길일을 정한다거나 객지에서는 안된다거나 하는 규칙은 모두 폐기되었다.

성격 및 일화

태자로 책봉된 뒤에 상당히 난잡한 생활을 이어가 부황 광종의 속을 썩였고 태자를 폐하자는 논의까지 이어졌으나 광종은 그것을 모두 물리쳤다. 1899년 뒤늦게 신숙희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신씨는 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2년 결핵에 걸려 고생한뒤로 몸이 약해져 두차례나 유산하고 만다. 그러다 태자비 신씨는 1914년 36살의 나이로 요절하는데 이후 세조는 문란한 생활을 접고 애인인 유근숙[1]과 동거에 들어갔으며 태자비 신씨는 1925년 신헌황후로 추존된다. 태자비 신씨가 몸이 약했기 때문에 세조 황제의 아들이자 태자인 선종도 신씨 소생이 아니라 유씨 소생이다. 유씨는 후궁 지위인 영비(英妃)에 봉해졌다가 1930년에서야 세조와 가례를 올려 황후로 책봉된다.

당대에 이름 날리던 미남이었다. 키도 당시 남성으로서는 장신이었던 179cm 가량이었던데다 잘생긴 얼굴덕에 동시에 여러명의 애인을 사귀면서 생활했다. 노년에도 잘생긴 얼굴을 유지했는데 80대에 찍은 사진임에도 6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정화 9년(1953년) 세조실록에는 대신들과 앉아있는 자리에서 다시 검은머리가 나고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는 기록도 적혀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뒤 한성부로 개선하면서 창덕궁에서 연호를 연강에서 정화로 바꾸는 칙령을 내렸다. 일세일원제는 명청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라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9년 군주의 피휘를 폐지했다. 이는 소급 적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문헌에 피휘로 인해 다른 글자로 쓰인 것까지 전부 원래 왕 또는 황제의 본명으로 바꾸게 했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던 바를 정(正)으로 고쳤는데 이 바를 정이 흔하게 쓰이는 한자라 그냥 피휘하는 관습을 없애버린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운동을 천대하던 당시 분위기를 홀로 바꾸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운동광에 체육 보급 활동을 펼쳤다. 1890년대 외국 유학 시절 골프와 축구, 럭비, 서양식 검술(펜싱)은 물론 각종 운동을 배웠으며 오히려 공부는 뒷전으로 제치고 하루종일 운동만 하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귀국후에는 귀족 가문에 운동을 장려하고 서구 종목들을 소개하는 등 체육활동을 펼쳤다. 1928년부터는 황제배 운동대회를 매년 개최하였으며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몇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949년부터 다시 개최되고 있다.

1955년 세종과 문종, 단종을 황제로 추존하였으며 단종의 후손을 자처했다. 전후에 학풍이 자유로워지고 조선 세조가 명분없는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한데다가 그리 유능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학술적 평가가 나오면서 평소 조선 세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황제가 곧바로 세종, 문종, 단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조선 세조를 간접적으로 격하한 것이다. 이 조치 또한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세조답게 가볍게 무시한뒤 본인의 의사를 관철했다. 아울러 세조(世祖)라는 묘호 또한 열종(烈宗)으로 고쳐 올렸다. 그리고 세조 묘호는 훗날 자신이 받았다.

황도 평안궁의 전반적인 구조의 설계를 몸소 맡았다. 오문삼조등 황제의 정궁을 짓기위한 기본 원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옛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옛 모습대로 중건한데 반해 평안궁은 철근콘크리트와 석재를 이용해 서양식으로 지었다. 이후 황실 일가는 사실상 평안궁에서만 생활하고 경복궁과 서울의 궁궐은 해외의 귀빈을 모실때만 사용하며 국민들에게 상시 개방해놓고 있다.

  1. 배우였다. 단천백 유홍서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