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
관세 동맹에 의거된 국왕과 국민의 정부
독일어: Albestrenberger Bund
독일어: Regierung des Königs und des Volkes basierend auf Zollunion

 

18071873
국기 국장
라인동맹 가맹국1807~13
독일관세동맹 가맹국1834~66
알베스트렌베르크 관세동맹1807~73

검은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알베스트렌베르크 동맹 세력권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정치
공용어 독일어, 폴란드어
정부 형태 입헌적 동군연합체
국왕[1]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
Ludwig August I, 1807~1815 (초대)
카를 요제프 2세
Karl Joseph II, 1845~1873 (마지막)
입법 알렌슈타인 연방의회
Allenstein Bundestag
역사
 • 틸지트 조약 체결 1807년 7월 9일
 • 관세 동맹 수립 1807년 11월 6일
 • 빈 회의 1815년 6월 9일
 • 라스텐부르크 전투[2] 1866년 7월 1일
 • 통일 왕국 수립 1873년 4월 7일
지리
면적 66,370㎢
인구
1870년 어림 15,568,450명
기타
국교 가톨릭, 개신교
  1. 관세동맹 내 공식 칭호는 알베스트렌베르크에서의 국왕(König in Albestrenberg)이며,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의 대공이 해당 작위를 겸임한다.
  2. 보오전쟁쾨니히그레츠 전투 이전의 발발함.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독일어: Albestrenberger Bund)은 1807년부터 1873년까지 지금의 알베스트렌베르크 지역의 존속했던 국가이다. 틸지트 조약(Frieden von Tilsit)으로 동프로이센(Ostpreußen)과 서프로이센(Westpreußen)이 분리 독립된 뒤, 라인동맹(Rheinbund)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을 통해 비밀리에 협상하여 독립을 약속받았고, 빈 회의 이후로 독립은 인정받았다. 이후에 보오전쟁(Preußisch-Deutscher Krieg) 중 라스텐부르크 전투(Schlacht bei Rastenburg)에서 패배함에 따라 독일 지역 내 영향력을 잃고 연방에서 퇴출되었으며,[1] 그 뒤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 지역이 통일하여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 성립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카를 요제프 2세(Karl Joseph II)가 통일 왕국을 수립하면서 관세 동맹에 의거된 동군연합체적 성격은 소멸하게 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에는 국민국가적 성격이 강해짐에 따라 알렌슈타인 연방의회에 공인 아래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은 '관세 동맹에 의거된 국왕과 국민의 정부'(Regierung des Königs und des Volkes basierend auf Zollunion)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개요

성립 이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sche Kriege) 이전에 동프로이센튜튼 기사단국(Deutschordensstaat)의 정복 이래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773년의 하나의 주로 편입되었다. 서프로이센의 경우에는 뒤늦게 18세기 이후에 진행된 1차 폴란드 분할로 획득하게 된 영토였다.[2]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획득한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은 온건적 통치책을 펼치면서 폴란드인들이 믿고있던 가톨릭을 존중하였고[3] 학교 내에서의 폴란드어 교육을 허락하기도 했다.[4]

틸지트 조약과 관세 동맹의 수립

1806년에 독일 서남부의 국가들을 규합하여 라인동맹을 결성시킨 나폴레옹은 북독일의 중심국가였던 프로이센 왕국을 위협하게 됨에따라 프로이센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어 반나폴레옹 전선에 합류했다. 허나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군에 대응하지 못한 프로이센은 잘펠트 전투(Schlacht bei Saalfeld)를 시작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에서 연달아 패배함에따라 수도 베를린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을 포기하고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를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일라우 전투(Schlacht bei Preußisch Eylau)와 프리틀란트 전투(Schlacht bei Friedland)에서의 패배로 임시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마저 프랑스군에 함락됨에 따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게 되었다.

틸지트에서 이루어진 강화 조약은 프로이센으로서는 굴욕적이면서도 지나치게 가혹했다. 당시 프랑스 제국의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마저도 프로이센에 대한 지나친 패전 처우에 대해 반발했으나,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대항했던 프로이센에 대해 금전적, 영토적 배상을 요구하였고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의 강화 조건을 묵인할 수 밖이 없었다. 이렇게 성립된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의은 엘베강 서부 지역의 베스트팔렌 왕국,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프로이센 영토의 바르샤바 공국, 마지막으로 결사항전을 벌였던 동프로이센서프로이센을 묶어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으로 분리시키면서, 프로이센의 영토는 1/3 이하로 축소되었으며 상비군의 규모를 제한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은 당시 프랑스에 협조적이었던 피슈하우젠(Fischhausen) 후작,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Ludwig August I)를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을 겸임하여 통치하게 했는데,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명목적으로 아샤펜부르크 후작과 더불어 라인동맹의 가맹국 대표로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제국의 독단적인 행태에 질린 나머지 비밀리에 러시아 제국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과의 협력을 제의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대등한 국가로 대우하지 않은 채, 러시아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수립하고 오스만 문제에 러시아를 배제한 일에 대해 적대감을 갖추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의 협력 제의를 적극 받아들일 수 있었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틸리트 조약 이후로 분열된 동-서 프로이센 내부의 제후국들을 통합하여 알베스트렌베르크가 구심점의 역할을 하기 위해 별도의 관세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1807년 11월,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Albestrenberger Bund)의 성립을 선포했다. 프랑스 제국은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를 친나폴레옹 인물로서 인식하였기에 이 사건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5]

러시아 원정과 빈 회의 공인

유렵 최대의 원정군을 꾸려 러시아 원정(Russlandfeldzug 1812)에 나선 프랑스 제국은 라인 동맹과의 협정 조약에 따른 13만 명에 군사를 차출했는데, 이중에서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은 따로 2만 명에 병력을 원정 병력으로 구성했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이들에게 러시아 군과의 전투를 의도적으로 피할 것을 지시했으며, 상황에 따라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의기양양했던 나폴레옹의 원정군은 혹한의 추위를 비롯하여 다양한 요인에 따른 비전투 손실 병력이 상당하였으며, 표트르 바그라티온(Pjotr Iwanowitsch Bagration), 쿠투조프(Michail Illarionowitsch Kutusow) 등의 러시아 제국의 항전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함락한 모스크바를 결국 철수할 수 밖이 없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할 즈음을 기다려온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타우로겐 회의를 통해 프랑스 제국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날렸으며, 이 회의에 따라 프로이센은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독립을 인정해주는 대신, 알베스트렌베르크는 프로이센군과 협력하여 1806년 이전에 프로이센 영토 회복에 가담할 것을 선언했다. 이윽고 프로이센-알베스트렌베르크 동맹군의 10만명이 대불 전선에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대불 동맹군을 상대로 뤼첸 전투(Schlacht bei Großgörschen)와 바우첸 전투(Schlacht bei Bautzen)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충돌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동맹군과 오스트리아의 참전 준비, 지속적인 전쟁 운영으로 급격히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질적 문제가 제기되자 1813년, 양측은 세인트 헬레나에서 일시적인 휴전을 통해 병력 휴식 및 정비, 강화에 나서기로 했다. 이 시기에 40만명의 예비 병력을 갖추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두고 나폴레옹은 드레스덴 회담을 열었으나 당시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Klemens Fürst von Metternich)가 제시한 요구에 굴복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6]은 회담을 사실상 파기시키게 된다.

프라하 회담에서도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 간의 양측 입장이 좁혀지지 않음에 따라 회담은 결렬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약속대로 8월 11일에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스웨덴의 베르나도트(Bernadotte)[7]가 참전을 결의하면서 대불 동맹군은 85만명에 이르는 수준이 되었다. 이때 대불 동맹군은 트라헨베르크 계획(Trachenberg Plan)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계획의 핵심은 바로 '동맹군의 지휘체계를 세워 담당 권역을 배분하고, 협동작전 즉 1개군이 공격받을 경우 아군의 측면을 보호하며 나폴레옹의 측후면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각각 15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프로이센-알베스트렌베르크는 약 10만 명에 병력을 유지하여 3개의 군(Army)을 구성한 후 이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이후 드레스덴 전투(Schlacht um Dresden), 라이프치히 전투(Völkerschlacht bei Leipzig)에서 패배를 겪은 프랑스는 항복하였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에서 열린 빈 회의를 통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했다. 알베스트렌베르크는 비록 인위적으로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으로서 시작했으나, 러시아 제국의 독립 지지와 더불어 프로이센에게서는 구 영토 회복을 돕는 대신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독립을 인정받음에 따라 빈 회의에서 상당히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특히나 오스트리아프랑스, 영국 등은 러시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기 위하여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독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빈 회의 결과에 따라 알베스트렌베르크는 독립을 승인받을 수 있었으며,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피슈하우젠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동군 연합 국가가 인정받게 되었다.

산업화와 연방 혁명

카를 요제프 1세(Karl Joseph I, 재위:1815~1845)의 치세에는 근대 국가의 수립과 산업혁명에 따른 변환기를 맞이하는 시점이었다. 알베스트렌베르크는 1834년에 통합된 독일관세동맹(Zollverein)의 참여하여 1866년, 보오전쟁의 발발로 관세 동맹에서 퇴출되기 이전까지 프로이센 관세법을 자국 관세 동맹에 적용시켜 독일 내 공통의 관세율 조정에 협조했다. 이를 통해 알베스트렌베르크 내 국민경제형성이 발현될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카를 요제프 1세는 하인리히 폰 마리엔베르더(Heinrich von Marienwerder) 후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에 적극 동참하여 중앙 정부의 관제 체계를 정비하고 재정제도의 쇄신을 꾀하여 궁정 재정과 국가 재정을 분리한 뒤 국가 재정의 주수입원인 조세 제도를 재확립했다. 그후 조세 특권과 국가와 국민관계에 따른 국민국가 수립에 방해가 되던 기존 농노제를 폐지하고 유상농지분배를 통해 농촌에 개혁을 가하고 신분, 특권에 의해 제한되었던 법률적 조항을 폐지시키면서 국민간 경제적 기회 균등 실현을 목표로 두었다.

카를 요제프 2세(Karl Joseph II)는 뒤를 이어 산업화의 중심 역할을 해낼 교통산업에 고정자본 투하를 결심하면서 1840년대에 철도 건설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록 이런 국가 자본의 철도산업은 1847년에 일시적인 경제공황으로 주춤했으나, 1850년대부터 고정자본 투하는 더욱 확대되어 40년대와 50년대에 간격하에 연장된 철도 노선은 약 3배에 달했고 화물 운송량은 무려 8배에 달했다. 이런 자본의 집중 현상은 여러 상업 및 기타 은행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이루어진 산업화는 자본주의적 경영 요소가 깊숙히 뿌리내리면서 기술적 진보를 야기했고 특히나 이 시대에서 고안된 증기기관의 상용화는 광산업의 확대와 광산 노동자들의 증대를 가능하게 하였고, 프로이센 왕국과 같은 석탄산업 진출에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광산업의 발달은 기계 제조업과 금속가공업에서 두드러지는 전진을 이룩시켰고 1860년대 이후로 순환적 공황과 불경기의 변화로 소규모 섬유공업들이 파산하고 고도의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 섬유 공업이 형성되었다. 이에따라 기존 공장에서 운용되던 노화 기계들은 폐기되었고, 증기력을 이용한 근대 산업 증기기관들을 적극 채택하게 되었다.

산업화와는 별개로 빈 체제에 대한 불만과 자유주의를 표방하여 전유럽에 걸쳐 일어난 1848년 혁명(Revolutionen 1848/1849)이 발생함에 따라 프랑스에서 시작된 2월 혁명, 독일 내에서의 3월 혁명이 여파가 알베스트렌베르크까지 미쳐짐에 따라 융커와 자유주의자들과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프랑스에서의 공화정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입헌 체제와 국민 의회 수립을 요구하였고, 이에 카를 요제프 2세는 융커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황급히 군중들을 진압코자 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카를 요제프 2세는 융커들과 결별을 선언하고서 관세 동맹을 아우르는 알렌슈타인 연방의회의 창립을 승인했다.

연방의회에서 선출된 초대 의장, 베르너 폰 훔게른(Werner von Humgern)은 전 관세동맹의 시민들에게 자유-평등한 시민권과 민주주의적 제반 권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서 알렌슈타인 헌법(Allenstein Bundestag)을 제정 및 통과시켜 다수의 세습 군주들을 바탕으로 둔 의회제를 고안해 냈다. 이들은 기존 융커들의 불법적인 농지 운영과 확장에 대해 지적하여 새로운 지주법을 논의한 뒤 통과시켜 기존의 지주 지배체제를 약화시켰다. 카를 요제프 2세와 관세 동맹 내 제후들은 연방의회에 이러한 독단적 조치에 대해 반발했으나, 당시 연방의회가 '합법적'으로 보유할 수 있던 의회 상비군과 민병대의 압력에 따를 수 밖이 없었다. 이에따라 알베스트렌베르크는 연방의회를 중심으로 한 단일 국가 성격이 강화되는 한편, 이후에 독일 제국 통일의 영향을 받아 관세동맹을 해체하고 통일 왕국을 수립하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독일 분쟁과 통일 왕국으로의 길

프로이센 왕국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를 국가 수상으로 하여 독일 지역에 대한 프로이센 중심의 단일화 된 국가 수립을 추구하기 시작했다.[8] 이에 프로이센은 덴마크 위기, 보오 전쟁, 보불 전쟁을 거치면서 마침내 독일제국을 건립하게 되었다.

독일 제국의 성립 과정에서 프로이센은 범게르만주의에 의거하여 독일연방(Deutscher Bund)의 맹주였던 오스트리아와 함께 알베스트렌베르크를 통합시키고자 했으나,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와는 다르게, 자유주의자들과 입헌주의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알베스트렌베르크를 편입하게 될 경우 기존의 융커를 비롯한 귀족계층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었기에 최종적으로 프로이센은 소독일주의에 의거된 통일에 만족하기로 했다.

1866년, 보오 전쟁이 발발하자 알베스트렌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편을 들었으나, 라스텐부르크 전투(Schlacht bei Rastenburg)에서 대패함에 따라 독일 관세동맹에서 퇴출된 것은 물론이며,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지켜볼 수 밖이 없었다. 보오 전쟁 이후 독일 통일을 지켜본 카를 요제프 2세는 이에 자극을 받아 관세동맹을 해체하고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통일 국가 수립을 적극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입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를 요제프 2세는 연방의회에 만장일치로 1873년, 기존의 관세동맹 체제를 해결하고 자신이 '알베스트렌베르크의 국왕'(König von Albestrenberg)[9]으로 새로이 통일 왕국의 군주로 즉위할 것을 천명하였으며, 기존의 영지를 가졌던 제후들은 왕국 귀족으로 편입하는 방식으로서 기존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각주

  1. 당시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동군연합적 체제는 자체적인 관세동맹을 중심으로 유지한 채로 독일 지역과의 경제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는 점에서 이중 관세동맹의 모습을 보였다.
  2. 이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서프로이센을 편입하기 이전까지 동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를 기준으로 월경지 영토로서 유지되었다.
  3. 프로이센 왕국은 전신인 프로이센 공국의 성립부터도 마르틴 루터의 세속국가 수립의 영향을 받아 첫번째 프로텐스탄티즘을 추구한 국가였다.
  4. 이런 온건 통치책을 펼친 프리드리히 대왕은 개인적인 일화로서 폴란드인과 폴란드를 '더러운 유인원'과 '야만인의 종속된 정부'라는 혹평을 한 만큼,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5. 나폴레옹은 그가 유약한 성격을 가졌기에 쉽게 라인 동맹에서 이탈하는 행위나 러시아 제국과 협조하는데 두려움을 가질 것이라고 오판하기도 했다.
  6.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에게 바르샤바 공국 대공국 해체, 라인 동맹 해체, 프로이센의 영토 회복, 일리리아 반환,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 반환 등을 요구했고,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갓 전장에서 승리해온 이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7. 칼 14세 요한(Karl XIV Johan)으로 불리며, 스웨덴 왕실인 베르나도테 왕가의 시조이다.
  8. 유의할 것은,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융커 계층은 독일 통일에 대해 비협조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했다는 점이다. 비스마르크 역시 독일 통일에 대해 자유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책으로 인식했다.
  9. 이전까지 관세동맹의 맹주였던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의 군주는 대공의 직위 외에 '알베스트렌베르크 관세동맹 내에서의 국왕'(König in Albestrenberg)이라는 호칭으로 불려 외공내왕 체제를 유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