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 공화국
蝦夷共和國 (えぞきょうわこく)
국기 국장
상징
국가
국조
두루미
국목
가문비나무 (사할린 가문비)
국화
해당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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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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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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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삿포로 특별시
최대 도시
삿포로 특별시
면적
120,634.95km²
접경국
일본국, 러시아 연방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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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출산율
1.21 명
기대 수명
87세
공용어
없음(사실상 일본어)
공용 문자
없음
종교
국교
없음
분포
군대
에조 공화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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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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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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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
1인당 GDP
$
GDP
(명목)
전체 GDP
$
1인당 G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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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수입
$
수출
$
외환 보유고
$
신용 등급
AA-
화폐
공식 화폐
에조 공화국 료(両)
ISO 4217
MJ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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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 기원
시간대
GMT +9
도량형
미터법
ccTLD
.ez / .えぞ / .エゾ / .蝦夷 / .com
국가 코드
EZ,EZO
전화 코드
851


에조 공화국(일본어: 蝦夷共和國 (えぞきょうわこく))는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국경은 동쪽과 서쪽,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일본과 접한다. 수도는 삿포로이다.

영토는 에조가시마(蝦夷ヶ島)와 북방영토(北方領土), 그 부속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중세 이전

고대에는 일본인이 에미시 또는 에조라고 부르던 아이누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이를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렀다. 일본이 동쪽으로, 북쪽으로 점령해 나가고 도호쿠 지방에 거주하던 아이누족은 야마토 민족과 동화되었고 에조가시마, 가라후토(사할린), 캄차카 반도 일대에 거주하던 아이누 민족은 존재하고 있었다.

근세

1853년 미국매튜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내항한 이른바 흑선내항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 200년의 국시였던 쇄국양이를 외국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지키지 못했던 사건이자, 일본 제일의 무력 보유자로서 각 번을 힘으로 찍어누르던 막부의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사건이었다. 더불어 막부는 1858년 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조인.[1] 덴노를 무시하고 조약도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으므로 당시 일본 각 지방 번에서 왕성하던 국학[2]을 신봉하던 젋은 무사층의 커다란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다.

실추된 막부의 권위와 무사층의 반발에 직면한 막부는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하여 조정과 반발무사층을 무자비하게 찍어누르는 대탄압 안세이의 대옥사를 결행, 국학파의 학자인 요시다 쇼인을 비롯 반막부 세력을 대규모로 처형한다[3]. 이에 미토 번의 탈번무사들은[4] 1860년 이이 나오스케를 에도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습격하여 참살하는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발생, 막부의 권위는 오히려 더더욱 추락하고, 각 번의 무사들의 증오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편 사쓰마, 조슈, 도사 등의 웅번들은 흑선내항 이전부터 내부 개혁에 성공, 세수 확대와 부국 강병을 이룩하면서 막부에 대항할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각 번의 요직을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차지하는 일이 많았다. 점차 이들은 일본 전국에 있던 존왕양이지사들의 산실이 된다.

사쿠라다문 사건 이후 막부의 중심에 있던 로주(老中) 안도 노부마사쿠제 히로치카와 함께 지나친 강경책이 피를 불렀다고 보고 조정과의 화해를 도모한다. 반 막부세력의 정신적지주인 조정과 정권을 나눠 함께 정치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 시도를 공무합체운동(公武合體運動)이라고 한다. 이것을 위해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를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정략결혼을 추진하지만 존왕양이파의 큰 비난을 받고 안도 노부마사는 에도성 밖에서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책임론을 제기받아 몰락하게 된다. 막부의 권위가 연일 실추되는 시점에서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1862년 4월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과격한 존왕파들의 준동을 막고 양자를 중재하고자 나선다. 이 과정에서 교토 데라다야(寺田屋)에 머물던 과격파 지사를 참살하는 데라다야 사건을 일으키고 칙사를 대동, 막부에 압력을 가한다. 이에 막부도 사쓰마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후견에 임명하고 교토 수호직을 신절하여 아이즈 번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조슈 번은 사쓰마의 정국 주도에 반발, 조정 측 인사들을 움직여 1862년 10월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양이를 명하는 칙허를 막부에 전하고, 막부는 각 번에 양이령을 내린다. 조슈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쓰마 번아이즈 번은 연합하여 1863년 8월 18일 쿠데타를 결행, 조정 내 양이파 쿠게 7명과 조슈 세력을 모조리 추방하고[5], 1864년 이케다야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던 조슈 유신지사들을 신센구미를 동원하여 참살, 마침내 이케다야 사건으로 자극받은 조슈 번은 군대를 이끌고 상경, 전쟁을 벌이나 사쓰마-아이즈 연합군에 의해 단 하루 만에 참패한다. 이것이 금문의 변이다. 결국 책임을 지고 조슈 번 가로 스후 마사노스케가 할복했으나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다시 구니시 시나노 등 3명의 가로가 추가로 할복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해낸다.

사쓰마와 막부군은 조슈로 진격, 마침 조슈의 양이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에 설치된 조슈 번의 해안포대들을 공격, 완파하고 지상군까지 상륙시키는 완승을 거두어 조슈 번은 보수파가 집권하게 되고 유신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나 타카스기 신사쿠 이하 유신지사들이 기병대(奇兵隊)[6]를 동원하여 내전을 거쳐 다시 조슈 번의 정권을 잡았고, 막부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쓰마는 조슈에 군사적/금전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7]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 1월 21일 삿쵸 동맹이 이루어진 후 막부는 제2차 조슈정벌을 통해 강경파가 다시 득세한 조슈 번을 재정벌하려고 하였느나 사쓰마는 참전을 거부, 진격한 막부군은 근대화한 조슈 번에 의해 참패를 거듭하고, 내적으로는 쌀값상승에 의한 잇키 등의 악재가 겹쳤다. 도쿠가와 이에모치마저 병으로 사망하여 막부군은 실패하고 퇴각, 이로써 막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후견인에서 장군으로 즉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 점을 노려 프랑스군에서 고문단을 초빙하여 프랑스식으로 근대화를 개시하고, 전근대적인 행정체제를 개편하여 육군/해군/외교/회계/국무로 나누어 근대적인 중앙집권형 시스템을 도입했다. 더불어 1867년 마침내 사쓰마와 조슈가 무력으로 막부를 쓰러트릴 것을 결의하자, 정권을 덴노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을 실시, [8] 명분을 주지 않음과 동시에 현실행정에 경력이 전무한 조정 측이 견디지 못하고 막부 측에 행정대행을 맡기게 되고, 공무합체하에서 각 번들이 참여하는 의회의 수장 격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막부는 멸망했을지언정 400만석이 넘는 대다이묘인 도쿠가와의 세력은 온전했다.

그러나 사쓰마는 게이오 3년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신정부 수립일에 무력으로 쿠데타를 결행, 교토 황궁을 점거하고 왕정복고를 관철한다. 신정부는 당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내대신 직위와 영지의 반납을 결의했다.

근대

보신 전쟁

1867년,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리자 이에 불만을 품은 도쿠가와 막부 내 군인들이 일으킨 일종의 반란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시즈오카로 낙향하는 것을 지켜본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구 막부의 신하들을 보호하고 북방을 방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1868년 8월 9일, 해군 기함 카이요마루를 비롯한 8척의 배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했다.

도중에 아이즈 전쟁에서 패한 전습대를 비롯 신선조와 창의대의 잔존세력들이 에노모토에게로 합류했고 이를 바탕으로 에노모토는 에조국 마츠마에 번을 침공한다. 당시 마츠마에 번주였던 마츠마에 노리히로가 급사[9]하면서 그대로 마츠마에 번 전체를 정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하코다테에 정청을 두게 된다.

1868년 11월 4일, 에노모토가 하코다테를 점령한 뒤에 영국과 프랑스의 공사를 태운 군함들이 하코다테를 방문했다. 이들은 에노모토와 회견을 가진 뒤,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적은 각서를 보내왔다. "일본 국내 문제에 우리는 중립을 지킨다, 교전 단체로서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의 정권(Authorities De Facto)'으로는 인정한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의 정권'이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기실 에노모토를 만나고 호감을 가진 영국과 프랑스 군함의 함장들이 본국의 훈령도 무시하고[10] 멋대로 쓴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상의 정권이란 영국이 신정부만을 유일한 정권으로 인정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러나 에노모토는 이 '사실상의 정권'이라는 말에서 국제법의 헛점을 찾아내고, 이를 이용하여 하코다테 정권을 교전단체로 인정하게 만든다.

이후 12월 5일, 일본 최초의 선거(입찰)을 통한 정부 조직 구성이 이뤄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투표권은 에노모토를 따라온 군인들에게만 있었고 현지 주민들에겐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상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856명이 투표하여 156표를 받은 에노모토가 총재로 임명되었고 120표를 받은 마츠다이라 타로가 부총재가, 116표로 아깝게 3등을 한 나가이 나오유키[11]가 하코다테 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득표순대로 주요 각료들을 선임했다.

이런 가운데 1868년 12월 28일, 사실상 이들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군함 카이요마루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고 일본 해군이 퇴각을 하자 프랑스는 그동안 판매를 유보하고 있던 최신예 군함들을 하코다테 정청 측에 팔았고, 1869년 5월 17일, 제3국들의 중재로 휴전을 하게 된다.

건국

1970년 3월 9일 입법부인 진민회(進民會) 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6월 23일에 제헌 헌법이 완성되었으며 7월 13일, 진민회에서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1위로 당선되며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대통령으로 한 제1공화국이 탄생하였다.[12]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은 1875년에 일본과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 국경을 변경·확정하기 위해서 체결된 조약이었다. 에조 공화국에서는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樺太・千島交換条約,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조약)이라고 부른다.

에조 공화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1855년의 러하 화친 조약에 의해 쿠릴 열도의 이투루프 섬과 우루프 섬의 사이로 정해졌지만, 에조 공화국 정부는 영토를 더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계속 교섭했다.

구로다 기요타카 등은 가라후토(사할린)보다 에조가시마 개척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조 공화국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조 공화국은 사할린 섬 전체를 러시아령으로 인정함.러시아는 우루프 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 북쪽의 18개 섬을 일본에 넘겨줌.러시아는 사할린 섬에 있던 에조인의 재산을 배상하고 에조 공화국의 어업권을 승인함.

이후 러일 전쟁에서 에조 공화국을 점령한 일본은 사할린 섬의 남부(북위 50도선 이남)을 할양받아 이 지역을 "남 가라후토"로 통치하였으며, 러시아 내전 중에는 북부까지 점령(1918년~1925년)하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5년 8월에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전역을 점령하였고, 쿠릴 열도 남부 4개섬은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탄생한 에조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점령기

현대

각주

  1. 정확히는 칙허를 받으려 했으나 덴노 쪽에서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무시하고 강행했다.
  2.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덴노를 수호하며 외적을 배척해야 한다는 경향을 가진 학문.
  3. 다만 막부는 쇼인을 그와 친분있던 양이지사 우메다 운빈의 발언을 모으기 위해 체포했는데, 쇼인이 갑자기 막부 고위 간부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누설해서 처형당했다.
  4. 사쓰마 번 소속 무사 1명이 가담했다.
  5. 사실 8월 18일의 정변을 일으킨 진짜 흑막은 당시 덴노인 고메이 덴노였다. 양이론자였지만 덴노 자신은 좌막론자. 애당초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다. 하지만 쿠게들은 자신들과 같은 양이론자라는 것만 보고 좌막론자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덴노가 직접 영국, 미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반발한 덴노는 같은 좌막론자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을 시켜 8월 18일 정변을 일으킨 것
  6. 말타는 기(騎)병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정서를 혁파하고 농민들까지 입대를 가능케 한 혁신적인 군대였다.
  7. 대정봉환 문서에서 써 있듯이 처음에는 공무합체를 지지하며 막부를 지원했으나 에도막부 중심 공무합체파의 탄압을 받고 조슈가 무너지면 막부의 다음 타겟이 본인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라이벌인 조슈를 지원했다.
  8. 이와 동시에 막부는 자동적으로 소멸. 이후 막부 측을 호칭할 때에는 구 막부라고 부르게 된다
  9. 자살했다는 말도 있다.
  10. 영국의 주일 전권공사였던 파크스는 용어 사용에 신중할 것을 미리 당부했지만 서기관 애덤스가 실수를 저질렀다
  11. 이 인물이 언급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의 직계 고손자가 미시마 유키오 이기 때문이다
  12. 구 막부제를 기반으로 하였는지 부통령을 선출하지 않고 대통령이 총리대신을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