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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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공화국
1841년 2월 18일 ~
국기 국장
이름
공식 명칭 스페인어. República de El Salvador
영어. Republic of El Salvador
중국어. 萨尔瓦多共和国(Sà'ěrwǎduō Gònghéguó)
한국어. 엘살바도르 공화국
하느님, 단결, 자유
(스페인어: Dios, Unión, Libertad)
역사
성립일 1841년 2월 18일
해체일
전신 정체성상 전신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
후신
주목할 만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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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XXXX년 X월 X일
인문 환경
수도 산살바도르
국교 로마 가톨릭 1841년 2월 18일 ~ 1880년
국교 없음 1880년 ~
공용어 스페인어
데모님 엘살바도르인
총인구 약 1,760,000명 1940년 집계
경제
화폐 엘살바도르 페소 1841년 2월 18일 ~ 1892년
엘살바도르 콜론 1892년 ~
경제권
정치
독립성 주권국
지도자 국가 수반 제40대 - 호세 마리아 레무스 대통령 1956년 9월 14일 ~ 1960년 10월 26일
제41대 - 세사르 야네스 우리아스 과도위원장 1960년 10월 26일 ~ 1962년 7월 1일
제42대 - 루벤 알론소 로살레스 대통령 1962년 7월 1일 ~ 1968년 1월 25일[1]
제43대 -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대통령 1968년 2월 12일 ~ 1972년 1월 11일
제44대 - 살바도르 카예타노 카르피오 대통령 1972년 1월 11일 ~
정부 수반 제40대 - 호세 마리아 레무스 대통령 1956년 9월 14일 ~ 1960년 10월 26일
제41대 - 세사르 야네스 우리아스 과도위원장 1960년 10월 26일 ~ 1962년 7월 1일
제42대 - 루벤 알론소 로살레스 대통령 1962년 7월 1일 ~ 1968년 1월 25일[2]
제43대 -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대통령 1968년 2월 12일 ~ 1972년 1월 11일
제44대 - 살바도르 카예타노 카르피오 대통령 1972년 1월 11일 ~
지도부 입법부 입법의회 ~ 1960년 10월 26일
시민군 총사령부 1960년 10월 26일 ~ 1962년 7월 1일
입법의회 1962년 7월 1일 ~ 1972년 1월 11일
연합혁명정부 1972년 1월 11일 ~
행정부 집행권 ~ 1960년 10월 26일
시민군 총사령부 1960년 10월 26일 ~ 1962년 7월 1일
집행권 1962년 7월 1일 ~ 1972년 1월 11일
연합혁명정부 1972년 1월 11일 ~
여당 PRUD 1956년 9월 14일 ~ 1960년 10월 26일 | 1962년 7월 1일 ~ 1968년 1월 25일
UNO 1968년 2월 12일 ~ 1972년 1월 11일
FPL 1972년 1월 11일 ~
군대 엘살바도르군 ~ 1972년 1월 11일
파라분도 마르띠 인민해방군 1972년 1월 11일 ~

개요

호세 마리아 레무스 1956년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미국의 패전으로 인해 경제 교역로가 봉쇄된 엘살바도르에 그는 산업 인프라에 대한 투자와 농업 개혁을 통해 국내 경제 활성화를 시도했고, 농업 보조금과 대규모 농업 프로젝트를 통해 비수도권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으나, 내부적인 자원 부족과 한계로 인해 그의 경제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시화와 관련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개혁 또한 더욱 많은 빈민의 양성과 폭증하는 실업률도 오히려 부작용만 터져나왔고,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다. 레무스 정권은 그럼에도 군대와 경찰력을 이용한 정치적 반대 세력 탄압에는 강경했는데, 그의 이러한 통제도 그의 정책적 실책과 연계되어 점점 시민의 반발만 더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1960년 10월 26일, 엘살바도르 쿠데타

외부와의 단절과 사회적 양극화에 사회는 큰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장교 3명과 시민 정치인 3명으로 구성된 시민군 총사령부로 불리는 좌익 조직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레무스는 축출되어 코스타리카로 망명했다.

루벤 알론소 로살레스

1960년 10월 26일 ~ 1962년 7월 1일까지 이어져온 시민군 총사령부의 군사 정권은 모두가 로살레스를 차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로 합심하면서 민간 정부로 이양되었다.

로살레스는 개발독재의 형태로 멕시코와 긴밀히 협조하는 동시에 추축국을 자극하지 않기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베리아 연방과 손을 잡아, 남아메라카의 경제 원조를 노렸다. 레무스 정권에서 자원 부족으로 이뤄지지 못한 농업 계혁을 그는 외부 자본의 지원을 업고 대차게 말아먹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군부 내에서도 반발이 일었고, 과하게 빛까지 져가며 속행하려던 인프라 사업은 그의 뒷배인 엘리트 계층과 군부가 횡령으로 취소되자 대규모 시위와 파업도 잦아졌다. 그는 사회 자치조직과 협력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으나 그 마저도 흐지부지되며 결국 군사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여 민중의 저항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6년에 벌어진 전국적인 파업과 난동 사태, 그리고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과격한 폭력 사건에 1968년에 긴급 선거를 개시하며 자진 사퇴한다.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1968년 긴급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레무스에 이은 로살레스의 대실패에 엘살바도르의 마지막 희망으로 당선된 전직 산살바도르 시장 출신인 두아르테는 군부의 관제를 받는 전국 야당연합에 소속되어 집권했다. 기득권 정치에 비판적이었으며, 엘리트 계층과 군부에 의해 지배되던 정치 체제에 도전하고자 했던 그는 비밀 없는 정치라는 이름으로 정부 내에서 이뤄지는 크고 작은 결정을 대중에 공개하며 군부와 엘리트 계층을 위협했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두아르테의 이러한 행보에도 군부는 로살레스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유사한 일들이 일어날까봐 그에게 역으로 위협을 가할수는 없었다. 부패 척결, 사회적 평등, 교육 기회 제공을 3대 주요 정책으로 삼아 정치적 구조 또한 바꾸려는 그는 작은 것들을 하나 씩 바꿔나가며 또한 민주주의 제도 강화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며 정치적 탄압을 줄이려 했는데, 이러한 행보는 그를 대중 사이에서 인기 높은 지도자로 만들었으나, 기득권과 심한 마찰을 빚으며, 외교적으로도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1969년 7월 14일 ~ 7월 18일, 온두라스와의 축구전쟁이라는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며 엘살바도르는 경제 자원을 심하게 낭비했고, 이를 두아르테 정권 약화의 기회로 여긴 군부는 일부러 사상자의 수를 부풀리거나, 비효율적인 전투를 이어가며 두아르테 정권의 여론은 악화되었고, 결국 엘살바도르가 패전하게 되며 비무장지대 형성, 배상금에 교전으로 인한 국내 인프라의 파괴에 대한 복구 작업도 요구되는 상황에서 기득권과의 협력에 실패하게 되면서 그는 정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시 군부가 실세 노릇하는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1970년 11월 석유 파동

1970년 11월, 중동 각지에서 내전과 군사 충돌이 발생하며 전 세계 석유 공급에 차질이 일어났고, 엘살바도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모든 부분, 분야에서 이때까지 쌓여온 문제들이 대폭발하고 사회가 붕괴되면서 파라분도 마르띠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있던 살바도르 카예타노 카르피오가 사회 각지의 노동자와 중산/저소득 층의 지지를 받으며 수도를 장악하고 약해질때로 약해진 군부를 축출하며 연합혁명정부를 구성한다.

역사

설명
출처

정치

참고

비고(Obsidian)

외부 문서

  1. 사퇴
  2.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