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제국 (패배자는 아니리)

오스트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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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Kaisertum Österreich
국기 국장
성립 이전
해체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1804 ~ 1917
상징
국가 Gott erhalte den Kaiser
(하느님 황제를 지켜주소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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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빈 체제의 붕괴
1917년 생제르맹 조약

지리
수도
빈 (Wien)
최대 도시
빈 (Wien)
위치
중부·동부 유럽
구성국
헝가리 왕국 등 18개의 제후국으로 구성
인문환경
민족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체코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
공용어
독일어 사실상
지역어
체코어, 헝가리어 등
군대
오스트리아군
연호
서력 기원
정치
황제
(국가 원수)
프란츠 1세 → 페르디난트 1세 → 프란츠 요제프 1세 → 카를 1세
경제
통화
오스트리아 굴덴 → 오스트리아 크로네
위치

개요

180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등을 모아 건국한 제국이다.

워낙 다양한 민족과 국가로 구성되어 내부 정세가 불안정했고, 이에 따라 다양한 분할안이 제시되었음에도 100년 간 유지되었으나, 제 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로 맺어진 조약인 생제르맹 조약에 의해 해체되었다.

상징

국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기

횡이색기로,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장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장

역사

초기

빈 체제의 성립과 붕괴

나폴레옹의 물결이 유럽을 휩쓴 후, 1815년 제국의 수도 빈에서 각국은 회의를 열어 혁명 이전의 질서로 유럽을 되돌리는 것에 합의하여 빈 체제를 결성하였다.

복고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 체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1848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방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이는 빈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충분했으며, 오스트리아 황제는 퇴위되었고, 헝가리는 독립을 선포했다.

가까스로 제국의 해체를 막기 위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혁명을 진압했으나, 제국의 위기는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제국 분할안의 논의와 무산

다양한 왕국과 민족들로 구성된 제국은 빈 체제의 붕괴 이후로 독일(프로이센)과 이탈리아(샤르데냐)와의 전쟁에도 패하며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제국 내 외부에서 다양한 분할안이 제시되었다.

특히 팔라츠키와 마이어의 분할안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폴란드인, 남슬라브인, 독일-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등의 소수민족들이 제국을 이탈하기 전에 지역에 따라 분할하여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문제점을 품고 있었고, 의회에서 대부분 무효화되었다.

결국 제국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 최선의 수단으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타협'(Ausgleich)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방안대로라면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이중제국을 형성할 것이었다. 즉, 헝가리의 왕국과 의회는 독립하되, 왕위 자체는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차지하는 방식으로 동군연합을 결성할 예정이었다. 또한, 논의할 사안에 대해서도 별도의 내각을 꾸리고, 각료를 두는 등 헝가리의 자치를 크게 허용할 예정이었다.

제국 내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헝가리와의 이중제국 형성은 헝가리의 독립 여론을 잠재우고, 제국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체결 찬반 여론이 크게 갈렸다. 당시 빈 체제가 붕괴되고 독립 여론이 절정에 달했던 때라, 급진파들은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대타협 체결에 크게 협력하던 정치가 페렌츠 디아크가 급진파들에 의해 암살되면서 대타협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준자치지역을 설치하고,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에 자치를 우선 부여하는 것으로 선회하게 된다.

러시아와의 충돌

이렇게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타 열강들과도 번번이 충돌했다. 해군이 약해 아프리카로의 확장이 쉽지 않았던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를 우선 확보하는 동진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번번히 러시아와 충돌을 빚었다. 이러한 러시아와의 빈번한 충돌은 후에 삼제 동맹이 깨지고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으로 양국이 갈라지게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90년대부터는 소수민족 증가를 우려하는 대신 무모한 영토 확장을 펼쳤다. 오스만 제국이 소유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병합한 사건은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공분을 샀다.

부다페스트 도시철도 테러 사건

제국 외부와 같이 제국 내부도 잠잠한 것은 아니었으니, 1893년 헝가리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유럽 대륙 최초의[1] 도시철도를 목표로 2년 째 공사 중이던 부다페스트 도시철도 공사 현장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당시 카이저는 이에 분노하여 테러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처형하고, 부다페스트 도시철도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2]
이렇게 유럽 최초의 도시철도 타이틀은 대신 파리가 가져가게 되었다.

후에 스페인령 사하라 매입 건에 대해서도 충돌하는 등 제국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1차 세계 대전

그러던 1914년,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는 제국의 해체에 도화선을 붙인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분노하여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고, 이에 번번히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와 충돌하던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총동원령을 선포하였으며, 독일은 이를 이유로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초기에 독일은 슐리펜 작전 아래 프랑스와의 서부전선과 러시아와의 동부전선 일부에서 꽤나 선전했고, 오스트리아군도 이를 도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으나, 슐리펜 작전이 실패하면서 독일은 양면전선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로 오스트리아와 동맹국, 세르비아와 협상국 간의 치열한 싸움이 발칸에서 지속된다.

1915년 4월엔 오스트리아 제국을 목표로 한 이탈리아 왕국이 삼국 동맹에서 이탈하여 협상국에 참전하였으나, 알프스 전선에서 막히고 말았고,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까지 동맹국에 참전하며 발칸에서 동맹국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6년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대대적인 브루실로프 공세와 세르비아의 항전으로 인해 발칸에선 다시 협상국이 우세하게 된다. 이렇게 제국은 무리한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1916년 헝가리 혁명

1916년 8월 25일, 참전은 하였지만 줄곧 전쟁에 부정적이었던 헝가리의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루마니아가 협상국에 참전하기 2일 전의 일로, 남부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북부에서는 왕당파와 공화파들이 부다페스트부터 트란실바니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남부와 북부는 임시로 합작을 맺어 협상국에 참전하였다.

이 대가로 헝가리 임시정부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북부 지방을 러시아에게, 남부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에 넘기게 되었다. 그 중 북부 지방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독일에 넘어갔다가, 독일의 패배로 다시 헝가리에게 반환되었다.

제국의 해체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


오스트리아 공화국[3]


헝가리 인민 공화국[4]


보헤미아-모라바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폴란드 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사진은 전쟁 전과 후의 세계 영토 변화.

헝가리 혁명과 동맹국의 연이은 패배로 인해 동맹국은 결국 항복하였고, 생제르맹 조약이 체결되며 제국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때 드넓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가 헝가리 인민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보헤미아-모라바 공화국 등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헝가리인들과 기타 소수민족들의 줄기찬 독립 요구에도 100년 간 유지되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결국 해체되었다.

해외 영토 및 식민지


사진은 오스트리아가 보유했던 해외 영토를 함께 표시한 지도이다.

오스트리아령 톈진


사진의 붉은 부분이 오스트리아가 소유한 부분이다.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 참여한 대가로 얻게 된 조계로, 20년도 가지 못하고 14년 만에 조계를 생제르맹 조약으로 잃게 된다.

오스트리아령 사하라

기존까지는 다른 열강들과 달리 별 다른 해외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나,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으로부터 스페인령 사하라를 매입하며 첫 식민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매입 과정에서 헝가리인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인들을 무시하고 매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는 후에 헝가리 독립 요구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영토

개편 전

개편 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 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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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헤미아 왕국 2. 부코비나 공국 3. 케른텐 공국 4. 카르니올라 공국
5. 달마티아 왕국 6.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6-1. 크라쿠프 대공국 7.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7-1.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 7-2 고리치아-그라디스카 제후백국 7-3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8.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9. 모라비아 변경백국 10. 잘츠부르크 공국 11.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12.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13. 티롤 제후백국 14. 상오스트리아 대공국 15. 포어아를베르크 제후백국 16. 헝가리 왕국
17.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18.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왕국

번호 순대로 1번부터 15번, 18번까지는 오스트리아의 영토, 16번과 17번은 헝가리 자치지역의 영토이다.

정치

국가원수


오스트리아 제국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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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각주

  1.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지하철을 최초로 보는 경우도 있음
  2. 대신 프라하 도시철도가 1912년 개통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첫 도시철도로 남게 된다.
  3. (독일계 공화국 · 제1공화국 · 연방국)
  4. (前 임시 정부 · 평의회 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