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국의 역사 元高史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원고국의 역사 전반을 다룬 문서이다.
선조시대
B.C.120000?~B.C.361
인류의 도래와 올데루인의 대이동
구석기 시대 칠서를 넘어 본격적으로 천호 대륙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인류는 빙하기의 영향으로 육지 상태였던 근천해를 가로질러 세화, 다이토와 등 현재는 섬나라인 지역뿐만 아니라 더 멀리 원고 지역까지 발을 들였다. 이들이 바로 현생 원고인의 조상중 하나인 선주인으로, 선주인은 훗날 이주한 올데루인과 피가 섞인 끝에 현재의 원고인으로 변화했다. 선주인들 중 일부는 해수면 상승 이전에 다이토와로 이주하여 동부 다이토와 민족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
선주인의 정착 이후 빙하기가 끝나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원고 반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원고 반도에서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보통 지각활동이 드문 중·동부에 대규모 군락이 형성되었다. 이시기의 유명한 화석·유적으로는 닌신사미인과 쿠루베마 유적이 있다.
선주인의 전성시대는 구석기 시대를 지난 신석기 시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청동기 시대 초반 남쪽의 랴오 고원에서 올데루인이 이주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올데루인은 랴오의 여러 민족끼리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와 북쪽의 원고 반도로 대이동을 거쳤으며, 그와 함께 당시 선주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체계적으로 발전한 농경문화와 선주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청동기 제련 기술이 함께 도입되었다. 그렇게 신문물을 가지고 들어온 올데루인과 선주인의 사회가 융합되면서 원고국의 사회는 커다란 변혁을 맞이했다. 현재 올데루인 혈통의 원고인이 전체 인구의 87%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주한 올데루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다.
구원고 연맹의 형성
청동기와 함께 랴오 고원에서 원고 반도로 이주한 올데루인은 선진 기술을 통해 원고인의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였으며, 반도의 중심 지역인 키비오시 지역에는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문화를 지닌 여러 부족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세력이 난립하며 혼란했던 시대를 끝낸 주역이 바로 페노만 일족이 다스리는 '태양 부족'으로, 그들은 현재 우리가 원고 신화라 부르는 태양 신앙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 및 회유하며 세력을 넓힌 끝에 결국 그들의 본거지인 현재의 세논루메 지역뿐만 아니라 키비오시 전체를 지배하는 구원고 연맹을 형성하고 연맹의 맹주로 군림하였다.
그렇게 형성된 구원고 연맹은 청동기 시대에서 벗어나 칠서와 다이토와로부터 여러 신진 문물을 도입하여 점점 철기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태양국 제 8대 왕인 의강왕의 치세에 구원고 연맹은 랴오족의 침입을 격퇴한 뒤 그들을 쫓아 끝내 항복시키고 옆나라 바이당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키비오시 지역이 워낙 넓고 각 연맹국들의 규모도 맹주인 태양국에 절대 꿇리지 않아 구원고 연맹은 연맹국들을 완전히 통합한 고대국가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또한 맹주인 태양국이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연맹국들이 이에 반감을 표하며 연맹의 결속력도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진국의 왕인 진성대수가 태양국을 공격하여 태양국 마지막 왕인 평문도민을 죽이고 페노만 일가를 몰살하며 구원고 연맹은 붕괴했다.
오조시대
B.C.361~A.D.189
연맹의 분열과 사제십칠후시대
현재의 울주 동남부에서 형성된 진국은 점차 성장하며 태양국에 버금가는 구원고 연맹 서부의 패자로 자리매김했고, 끝내 진성대수가 태양국을 멸하며 진은 원고 반도 서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태양국이라는 연맹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지방의 연맹국들이 독립하여 서로 전쟁을 치루고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에 남방 건조지대에서 랴오인들과 원고인들에 끼여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호시타인들도 세력을 갖춰 남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원고 반도의 대혼란기가 시작되고, 반도 중북부에 한정되었던 원고인들의 민족성이 반도 전체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연맹이 분열되면서 난립하던 170여개의 소국들은 점차 진국 등 주변의 영향력이 큰 국가들에게 흡수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중원을 진이 평정하고 주변에서도 남한이나 전제 등 괄목할 만한 규모를 지닌 국가들이 출몰하면서 중원의 패권에 대해 도전하는 십칠후와 중원을 지배하면서 십칠후를 막아내려는 사제의 대결구도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원고 반도의 패권을 두고 여러 나라들이 수백년간 맞붙으면서 원고 반도는 그야말로 살육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전락했고, 그러한 혼란을 어떻게 멈춰야 하느냐에 대한 사상은 훗날 제자백가를 거쳐 양치 사상으로 발전했다.
동오와 남명이 세문산을 기준으로 남부를 잠시 평정한 이후로는 십칠후 국가들 사이에서 통일을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지속되었으며, 끝내 백화를 멸한 휼평이 서남부를 통합하며 십칠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시기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원에 세워진 만목이 반도 동부 전체를 평정하고, 울주 서북부에서 구원고 연맹의 부활을 외치던 광량이 발흥하여 녹주와 명주를 정복하며 400여년 동안 지속되었던 사제십칠후시대는 끝이 났다.
천하삼분
사제십칠후시대 때 나타난 여러 군주들의 온갖 인간군상은 후대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국가 운영에 대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깨닫게 하는 교과서가 되어주었고, 그 깨달음은 곧 제자백가와 결합하여 양치 사상으로 발전했다. 사제처럼 100년간 국가를 보존하는 것도 힘겨워하다가 끝내 다른 왕조에 의해 멸망하지 않으려면 내부 민심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십칠후처럼 북부에서 도망쳐온 사제의 후계국들이나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남부에서 치고 올라온 이방인 등 외적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국제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군사 편제를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제 막 새 국가를 세워 천하를 삼분한 젊은 군주들은 알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재야에 묻혀있던 수많은 능력있는 사상가들이 등용되었고 뛰어난 정치가와 뛰어난 명장들이 대거 등장했다.
사제십칠후시대가 끝나고 삼국시대가 시작될 무렵 수백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인해 반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이는 기반을 잃은 지방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삼국에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앙 정치기구와 행정체계는 여러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렇듯 대대적 재정비 기간을 거치던 삼국은 아직 국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서로를 침공하지 않았고, 이 기류는 약 40년간 지속되어 구원고 연맹의 붕괴 이후 원고 반도는 오랜만에 달콤한 평화를 누렸다.
40년 후 삼국시대 후반, 만목은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 많은 인구, 그리고 사의비류로 대표되는 황제 주변의 훌륭한 재상들과 그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황제의 능력 덕분에 국력을 비교적 빠르게 회복했다. 반면 휼평은 랴오 고원을 통일한 토로체마인들에게 지속적인 침공을 받으면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고, 오진명을 이은 광량의 다음 황제 오진서중은 선대 황제가 쌓아올린 업적을 다 무너트리고 내놓는 정책마다 실패하며 국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긴 고종은 광량이 내부 사정으로 어지러울 때 잽싸게 녹주로 군대를 끌고 가 승리하였으며, 곧 오진서중의 항복을 받아내 광량을 멸망시켰다. 이후 토로체마인들과 동맹을 맺어 휼평을 공격하고, 휼평이 만목에게 항복한 후 동맹을 깨고 만목을 침공한 토로체마 군대마저 물리치는데 성공하면서 만목은 구원고 연맹의 멸망 이후 약 450년만에 원고 반도를 통일했다.
목연시대
A.D.189~A.D.1421
통일 만목
A.D.189~A.D.543(354년) 만목이 휼평을 흡수하고 토로체마족을 몰아내면서 수백년간 분열되었던 원고 반도는 다시 통합되었다. 이로 인해 그전까지 지역마다 달랐던 화폐, 단위, 문자, 제도 등이 모두 일체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통일 전까지 남남이었던 원고인들의 통일된 민족성과 문화도 생겨났다. 또한 원고 반도의 전통 신앙인 태양교를 국가적 종교인 양교로 개편하여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였고, 사제십칠후시대에 들어온 군현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전국을 24개 군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등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를 완성하였다. 한편 만목 초기 예종의 주도 하에 여러가지 사상이 섞여 있어 완벽하지 않았던 양치 사상이 획일화되고, 양치 사상에 양교를 융합시켜 정치와 종교를 일체화하고, 양치 사상의 법령인 율령이 정비되는 등 사제십칠후시대에 나타난 양치 사상이 본격적인 원고 철학의 기반으로 성장했다.
만목의 주요 집권층은 바로 산족으로, 이들은 사제십칠후시대 때 전란을 피해 주로 산간지대에서 생활하며 여러 독자적인 사상, 즉 제자백가를 발전시켜 나간 주역이었다. 이후 삼국시대 때 본격적으로 양치 이념이 중앙정치에 도입되며 산족 또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만목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고종이 자국뿐 아니라 휼평과 광양에서 활약했던 산족 또한 적극 등용하면서 산족의 몸집은 급격히 불어났다. 한편 산족 중 세력을 키워 가문 단위로 성장한 자들은 황족과의 결혼을 통해 외척이 되었고, 외척들은 권력 보호를 위해 골품제를 도입하여 세력이 약한 인물들의 정계 진출에 제약을 두었다. 결국 이는 추후 만목 지도부의 폐단이 쌓여 끝내 만목이 멸망하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구원고 연맹 시대에 바이당과 원고 반도에만 국한되었던 원고 중심의 중화사상은 그마저도 연맹이 분열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만목이 반도를 통일하고 주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원고인이 주도하는 동천호의 외교 체제가 다시금 형성되었다. 만목은 역사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바이당과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야만족 취급했던 랴오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하며 랴오 고원의 몇몇 부족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때로는 그들을 도와 적대적인 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정종의 치세부터 만목은 칠서와 다이토와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도입하며 율령을 재정비하고 서천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큰 발전을 이룩했는데, 이때 해로 무역뿐만 아니라 육로, 즉 실크로드 무역도 활발해지면서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던 바이당이 중요해졌고, 이것은 만목이 유독 바이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헌종의 치세 때 양치 사상이 여러 산족 관료들에 의해 체계화되고, 신문물이 적극 도입되면서 전성기의 기반이 다져졌다. 이후 헌종의 아들인 무종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주변국을 복속시키면서 만목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그 전성기는 태종 때 절정에 잘했다. 태종은 랴오의 왕과 만목의 공주를 결혼시켜 친선관계를 도모했고, 무종이 복속시킨 북바이당에 교지를 설치하여 효율적인 통치를 꾀했다. 또한 수도 및 주요 도시에 경원을 설치하여 경찰 업무와 소방 업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시기 만목의 문화 또한 신문물의 영향을 받아 금속공예가 발전하는 등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이미 태종의 선대 황제인 정종부터 시행된 골품제의 폐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자 관직 진출의 한계에 대한 4두품 귀족들의 반발은 곧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3두품 가문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지방 치안을 도맡으며 서서히 호족으로 성장했다. 결국 4두품 장수인 객진수문이 난을 일으켜 성공한 뒤 만목 마지막 황제인 애종에게 선양을 받는 식으로 만목을 멸망시키고 북진을 세웠으며, 그틈을 타 남부에서 할거하기 시작한 호족들을 남당이 통합하면서 만목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남북조시대
543~755(212년)
만목 멸망 ~ 남당 멸망
산북의 북진과 산남의 남당은 지지기반이 부족하여 정국이 불안정했고, 이로 인해 북진은 왕위다툼과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로 멸망하고 남당은 호족 통합 정책에 실패해 정권이 사실상 호족들에게 넘어가는 등 남북조시대 초반에는 혼란이 지속되었다. 그나마 산북은 효별개무의 난을 통해 북진을 멸하고 세워진 북제가 감부를 통해 신권을 보장하고 지방을 통제하는 등 성공적인 정책을 펼침으로써 혼란이 어느정도 수습되었으나, 산남은 정권을 잡은 호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함으로써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에 북제 내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 산남을 공격하자는 주장이었고, 이를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산북 정통론이 생겨났다.
북제 내에서 남당을 침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호족 집권층 대부분은 가까스로 통합되었으나, 일부는 산북 정통론을 인정하면서 이참에 산북과 평화통일을 도모하자는 주장을 내세웠고, 이들의 주장은 반대 세력에 의해 침략을 환대한다는 뜻의 환침론으로 불리었다. 환침론의 대척점에 선 호족의 주류여론인 항전론은 무력까지 행사하며 뜻을 굽히지 않던 일부 환침론 세력을 진압하고 개령산성을 짓는 등 북제의 침공에 대비했다. 이 과정에서 항전론의 대표주자인 사유혼이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한편 북제에선 태조 효별개무의 승하 이후 산남 침공에 대한 회의론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당시 급진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감부장 연무위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전쟁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북제군은 개령산성에서 남당의 포위전술에 대패하여 지금의 풍주 지역으로 잠시 후퇴하게 된다. 패배를 맛본 북제군의 총지휘관 이연국은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리라 판단했으며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연무위를 축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제의 수도 연산을 공격하게 된다. 이연국의 반란 소식을 들은 연무위는 옛 광양 지역으로 도망쳐 북송을 세웠고, 이연국은 수도에 남아있던 북제 2대 황제 효별상지에게 선양받아 북하를 세웠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유혼은 수많은 호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남당 목종에게 선양을 받고 남주를 세우게 된다.
남주 건국 ~ 북연의 통일
남주를 세운 고조 사유혼은 북제의 침입 격퇴와 남주 건국에 기여한 호족들의 공훈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이를 기반으로 호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며 권력을 남용하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만목 이후 몰락해있던 산족의 후손, 신산을 등용하게 되었다. 고조는 산족의 대표주자인 재상 가정부직의 도움으로 정훈 정책을 단행하여 불법적으로 공을 부풀린 호족들을 처벌하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는 농민들에게, 나머지 재산은 신산 세력을 비롯한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분배하였다. 이에 호족들은 크게 반발하여 반역을 꾀했으나, 고조는 원로 호족들에 의해 출세길이 막혔던 신흥 호족 세력(청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반역을 성공적으로 방지하고 반역을 꾀한 호족들을 엄벌하였다. 이러한 호족 견제 정책은 성공적이었고 정국은 안정을 찾았으나 고조 승하 이후에는 신산을 탐탁치 않아하던 말제 사유곽이 그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고조 대의 평화가 깨지고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살아남은 청사는 방탕한 말제 밑에서 온갖 부정을 일삼았으나, 이러한 남주 말기의 혼란은 결국 시무 출신 장수 유현공에 의해 끝을 맺게 된다.
시무는 남당 시기에 호족 세력 밑에서 호위를 담당하던 무사 계층으로, 남주의 호족 숙청 정책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우다가 말제 재위기에 부쩍 늘어난 북하의 공격을 막기 위해 중앙군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표적 인물 유헌공은 정변을 일으켜 남주를 멸하고 남위를 세웠으며, 군령제를 통해 시무들이 지방을 분할 통치하도록 하여 지방분권적인 군정국가를 만들었다. 군령제는 시무들의 높은 충성심을 바탕으로 3대 혜종까지 유지되었으나, 4대 의종 즉위 이후 외척 선진반무의 정변이 발생하자 그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한편 북하는 건국 이래로 끊임없이 북송 정벌을 단행하거나 남주의 영역인 풍주를 공격하는 등 활발한 군사적 활동을 이어갔고 마침내 5대 성종이 산북을 통일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신들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성종은 3보를 통해 국정을 장수들이 의논토록 하였고 북하는 전성기를 맞았으나 6대 원종 즉위 이후 3보를 중심으로 무신들의 부정이 시작되면서 농민들을 향한 수탈이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농은 무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권리를 보장받는 지정첩을 받아 위치를 유지했으며, 이들은 후일 북연 초기 집권층인 중인으로 성장하였다. 이 외에도 원로 무신들의 권력 독점에 반발한 신흥 무인 세력과 중인들과 연대하여 신분상승을 노리던 몰락 문신 등의 세력이 북하 말기에 성장하게 되었다.
여러 계층의 입지 상승의 중심에 있던 국신사는 신흥 무인 세력인 죽문신양과 몰락 문신인 정대석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사회적 동맹이었으며, 8대 민종은 국신사가 월등히 성장하여 북하 안보에 위협이 되자 그들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국신사는 북하의 군대를 압도할 세력을 갖췄고 결국 국신사가 황궁을 역으로 점령하고 민종에게 항복을 받음으로써 북하가 멸망하고 연나라가 세워졌다. 황제로 추대된 죽문신양은 마침 내전을 겪고 있던 남위를 침공하였으며, 그들이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원고반도는 212년만에 통일되었다.
북연의 재통일
A.D.755~A.D.1126(371년) 연 태조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며 벌어진 반도 남북의 정치적 차이로 인한 제약을 최대한 극복하기 위해 남북을 나누어 통치했고, 중앙집권적인 율령 정부(산북)와 구 북연 출신 시무들을 계도사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10계(산남&국경지대)가 설치되었다. 또한 2대 정종은 통일 문화 형성을 위해 연산에서 산구까지 이어지는 국도를 설치했고, 동시에 상업이 장려되며 남북간 문화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중인 세력이 상업을 장악하며 담합과 독과점 등 폐단이 쌓여갔고, 이에 3대 성종은 국상법을 제정하고 토수령을 시행해 중인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하는 등 중인을 상대로 강경책을 펼쳤으며, 군사적 기반이 없었던 중인은 큰 타격을 입고 빠르게 몰락해갔다.[1]
중인의 자본을 흡수하며 막대한 예산을 확보한 북연은 과학기술 발전과 법전 편찬, 성 축조 등에 투자하며 전성기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4대 문종조에는 과거제와 균전제, 그리고 정세법이 시행되고 관학이 설립되는 등 교육 및 관리 선발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자영농 또한 육성되었다. 이처럼 3-4대에 걸쳐 기반을 다진 북연은 6대 선종 때 전성기를 맞이한다. 선종은 중앙군을 보완한 청인군을 조직하여 북바이당을 복속하고 랴오 고원 북부의 경운국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는 등 대외적인 정복활동을 이어갔으며, 7대 태종은 파주를 복속하여 영토확장을 지속했다. 태종은 그 외에도 항구도시를 발전시키고 각 항구마다 조류지를 설치하여 만목 이래로 뜸해진 대외 교류를 재활성화시켰다. 만목 때는 천호 대륙에 한정되었던 해상 교류망은 이때 에우랍수스와 뉴니버스까지 확장되었으며, 이로 인해 북연은 원고사에서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제국이 되었다.
북연의 전성기 때에는 남북조시대 이후 색이 바랜 양치 사상을 복원하는 작업도 벌어졌다. 건성근을 시작으로 여러 학자들이 흩어진 과거의 양서들을 수집하면서 912년에는 당대까지의 양치 사상을 집대성한 《율론》이 집필되었고, 율론을 바탕으로 양치 사상은 당시 북연 정부의 법전 편찬 사업에 영향을 받아 법치주의와 결합되었으며, 곧 율학으로 발전했다. 행정적 면에서는, 만목 때부터 이어지던 24군을 폐지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13주를 처음 설치했다. 각 주는 여러개의 건리로 나뉘었으며 80건제 시행과 건령 반포를 통해 지방을 통제했다. 한편 국내 교류의 확대와 상업의 발전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공통된 서민문화가 발전하여, 전통극인 '하키라제마', 자유형식의 시인 '향시', 무술 경기인 '무살'이 유행하기도 했다.
11대 현종부터는 무신과 문신의 갈등으로 지배층 분열이 일어나면서 전성기가 끝을 맺게 되었다. 무신들이 10계의 계도사들과 결탁하여 10계를 대상으로 한 독자적인 지배력을 키우고 이를 기반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이에 문신들이 반발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2대 순종 때부터 '분교위정'과 '대식봉궁'등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심화되었고, 무신이 국방에 힘쓰지 않고 정치싸움에만 뛰어들며 국방력도 자연스레 약해졌다. 결국 타루카트의 침공으로 경운국이 독립하면서(광주 전투) 무신들의 입지가 좁아졌고, 문신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무신들을 집중공격, 마침내 '경인무화'로 수많은 무신들이 파직 및 좌천되었다. 이후 문신들은 우위를 굳히기 위해 다시 무화를 시도하였으나, 한번 데인 무신들이 연대하여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했고, 역으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변의 핵심 세력이었던 한경백서는 정변에 성공하여 16대 고종을 폐위하고 목종을 옹립하였으며, 대부분의 문신들이 숙청되었다. 그러나 이 뒤로도 무신들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이어지며 정국은 안정되기는 커녕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19대 도종 재위기 말기에는 마침내 거융석이 한경씨 정권을 무너트리고 무신정권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때마침 벌어진 샤우카이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수도인 연산까지 함락당하자 거융석은 도종을 버리고 외척인 개도성과 함께 둔평으로 도망쳐 남연을 세우게 된다.
샤우카이와 남연
A.D.1126~A.D.1421(295년) 둔평으로 도주한 거융석과 개도성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가까스로 샤우카이가 점령한 연산을 탈환하고 그들을 풍주 바깥까지 몰아냈으며, 황폐화된 연산 대신 둔평을 새 도읍으로 삼고 남연을 건국했다. 거융석은 개도성을 연 제 20대 황제인 영종으로 추대하고,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도로, 항구 등의 시설 복구, 상업 및 무역 재활성화를 통한 경제 회복, 농지 재개간, 군사력 확충 등의 정책을 시행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한편 이러한 개혁 과정에 영종이 활발히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황실 내 영종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졌고, 이는 무신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황가 세력의 도전에 대처해야 할 무신 정권은 거융석의 노환으로 인한 사망과 후계자 갈등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후 가까스로 거융석의 둘째 아들인 거준이 형제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는 이미 조정 인사의 대부분이 영종이 공격적으로 등용한 문신 세력에 의해 대체된 이후였다. 결국 거준은 이판사판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오랜기간 이어진 권력다툼 탓에 무신정권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고, 결국 영종이 간단하게 난을 제압하면서 목종대부터 시작된 무신 정권은 끝을 맺었다.
한편 원고 반도 남부를 차지한 샤우카이는 북연을 이은 동천호의 주인이 자기라고 주장하며 남연을 아류라고 비난했다. 또한 파주 등의 정복지를 통해 원고 반도의 문화를 샤우카이 황실 풍습으로 받아들이는 등 동천호의 새로운 지배자로서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시도도 있어왔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갈등과, 후계자 내분,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 등의 사회적 문제로 인해 샤우카이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해버리고 말았다.
무신정권의 붕괴로 인한 무신 세력의 추락과 샤우카이의 분열로 인한 외부 위협의 감소는 21대 헌종 대부터 남연이 본격적으로 문치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배경이 되었다. 헌종은 국립 인쇄소인 '경문원'을 설립하고, 국가적 시험인 '정시'를 시행하여 평민에게도 관직을 얻을 기회를 주었다. 남연 초기 이렇게 정시를 통해 유입된 관료들의 세력과 북연 시절부터 무신정권의 탄압을 피해 형태를 유지하던 기존 문신들의 세력이 융합되며 거대한 문치주의 정권이 탄생하였고, 이에 힘입어 남연의 학문, 예술, 과학기술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북연 시기부터 연구되던 율학은 기존의 양치 사상을 대체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어 남연의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끼쳤고, 기술의 발전으로 여러 발명품들이 만들어지면서 이를 보조할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샤우카이의 공격을 받지 않아 무역로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반도 중북부를 필두로 활동하던 상인들도 이를 뒷받침했고,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협동조합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랴오 고원의 유목제국들과의 접점이 적은 반도 북부에 한정되어있었다. 반도 남부는 랴오계 국가들과의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샤우카이의 멸망 이후에도 그 후계 국가들은 남연 국경을 지속적으로 침범했고, 몇몇 대규모 전투도 있어왔다. 이러한 랴오계 국가들과 남연의 갈등은 25대 신종 대에 랴오 고원이 오치케시 제국에 의해 통일되면서 더욱 본격화되었다. 오치케시의 초대 황제 킨타이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남연과의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하며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갔고, 심지어는 반도 중부인 풍주의 경계에 다다를 정도로 남연은 오치케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결국 풍주 경신부에서 경신맹약을 맺어 오치케시가 남연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남연이 지속적으로 오치케시에게 지역 특산품과 공예품 등을 하사하도록 하는[2] 굴욕을 겪게 된다.
문치주의를 택함으로써 나타난 군사력 약화와 이로 인한 외침의 증가에 남연 조정에는 장수 양성과 군사훈련의 질 개선을 통해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국강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국강론자들의 대표 중 하나인 허열은 남연 군대의 지휘관이 대부분 실전 경험이 적고 전술에 무지한 문관이라는 점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또한 직접 수십권의 병법서를 쓰고 황제의 허락을 받아 대규모 군수품 제작 시설인 '건무원'을 세우고 총괄 담당자로 활약하는 등 당시 남연의 군사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러나 당대에만 해도 이러한 개혁 시도는 많은 기성세대 문관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쉽게 성공하지 못했고, 26대 혜종의 즉위 시기에는 오치케시도 내부 문제로 멸망하고 이를 기회로 삼은 문관들이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군대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치케시의 멸망 이후 한동안은 원고 반도의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시간이 지나 내부에서 문제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문관을 견제할 국강론자들이 오치케시 멸망 이후 세력을 크게 잃으면서 대적할 세력이 없어진 문관들의 부정이 전개되었고, 신종 대부터 몸집을 키워온 상인 조합 중 하나인 '공'이 28대 의종 즉위 이후로는 정부의 여러 인사들과 결탁하여 그들에게 뒷돈을 대주고 상업 세계를 독점하다시피 해 국내 무역도 점점 곪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사태를 방지해야 할 의종과 그 다음 황제인 29대 세종은 하필 원고 반도 역사상 최악의 암군들 중 하나여서 국정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았고, 그렇게 남연은 매우 빠르게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세력이 바로 방계 왕족들 중 하나인 카디우 야카미아(개도강명)를 필두로 한 새로운 국강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신종 대의 제강론자들과 국가 전체를 강하게 한다 / 일단은 황실부터 바로잡는다 라는 목표의 차이로 구분되어 '제강론자'들로 일컬어졌으며, 공의 횡포에 불만을 품던 다른 상인·수공업자 조합, 그리고 정치의 뒷켠에서 손가락만 빨던 퇴역 장수들의 지원을 통해 날로 갈수록 세력이 강해졌다. 결국 빠르게 성장하던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문관들과 30대 황제 덕종은 그들을 난의 주동자들로 간주하고 진압하려 했으나, 덕종의 군대가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면에서 크게 밀려 결국 카디우 야카미아가 반란에 성공하여 민제로 즉위하게 된다. 민제는 즉위 이후 얼마 동안은 연나라의 국호를 계속 사용하였으나, 얼마 안가 국호를 원고국으로 고치고 새로운 국가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렇게 장장 700년을 존속한 연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근세
A.D.1421~A.D.1874(453년)
남연의 멸망, 그리고 테지니 시대
원고국을 건립한 민제는 즉위 직후 남연 관료체제의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다. 이는 단순한 보복을 넘어선 체제 전환의 시도였다. 중앙과 지방을 합쳐 약 5,000여 명의 관리들이 파직, 유배, 처형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변 공신들이 일부 요직을 꿰찼으나, 행정 공백으로 인한 국정 마비는 불가피했다.
민제의 통치 이념은 '농본억상'(農本抑商)에 기초했다. 그는 남연 후기의 사회적 병폐가 상업 중심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농업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꾀했다. 구체적으로는 사설 상업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관영 상인인 공관(公館)을 통해 모든 상거래를 통제했다. 대외 무역에도 강력한 규제를 가해 국내 항구의 4할을 폐쇄하고 외국 상인 입국 제한을 실시했으며, 이는 동천호 무역의 급격한 위축을 초래했다.
토지 정책에서는 대전제(貸田制)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몰수한 구 권신들의 토지를 국유화한 후, 농민들에게 임대료를 받고 경작권 및 수확물 소유권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임대료 책정으로 인해 일반 농민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과적으로 신흥 귀족층이 불법적 방법으로 토지를 독점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들은 다시 소작농을 고용했지만, 수확물의 대부분을 착취하는 등 농민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세제 개혁 역시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다. 국가 재정 확충을 명분으로 과세 대상이 대폭 확대되어, 농기구와 의류는 물론 일상용품에까지 세금이 부과되어 담장을 묶는 끈에도 세금이 매겨질 정도였다. '담장은 쌀가마니로 맨다'는 당대의 속담은 이러한 과중한 세부담을 풍자한 것이다.
이렇게 민제의 폭정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 터져나오던 상황에서 그는 측근이었던 치야도사 보사니오에 의해 암살당했다. 보사니오는 제강론자이자 남연 멸망의 공신으로, 초기에는 청인관 사수(淸仁官 司守)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던 중이었다. 그는 민제 생일 연회에서 사전에 배치한 심복들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으나,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발발했다. 결국 보사니오는 각 지방 세력의 독립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형식적 국가원수인 태수(太帥) 아래 실질적 지배자인 진사(盡士)들이 각 지역을 통치하는 테지니 체제가 확립되었다.
후임 태수 칸테모 오바야니는 진사 세력들 간의 내분을 끝내고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유력 진사 제미레순 고로사이를 공격했으나, 그는 거듭된 패배 끝에 전사했다. 한편, 고로사이의 난에서 선두 지휘를 맡으며 입지를 높인 제타시옥 이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레메다 야로보우를 태수로 옹립한 후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고로사이의 난 진압에 성공하고 반도 전역을 통일했으며, 레메다 야로보우의 양위에 힘입어 스스로 태수가 되었다. 마침내 그는 통일 제국의 기반을 다진 후 원고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선원고국 초기 전성기와 신원로파 정권
1453년 태조가 원고국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국호를 유지할지 아니면 새로 만들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옛 원고 연맹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태조는 중경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는데, 여기에는 남연의 기반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테지니 시대의 분열로 침체된 둔평에서 벗어나려는 목적과 교통의 요충지인 중경에 자리잡아 테지니 시대 이후 침체된 상업을 부흥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중경으로의 천도에서 알 수 있듯이 태조가 국체 재건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상업의 재부흥이었다. 이것의 예시로 들 수 있는 정책이 항구 증축과 공관 폐지, 국상서 설치이다. 이중에서 국상서는 관영 상인이던 공관을 대체하는 관영 상인조합으로, 상인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면서도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을 방지하는 효과를 보여 상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수도의 과밀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상서는 중경뿐만 아니라 반도 각지에 국상서 지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후일 원고국의 지방 성장에 큰 역할을 끼쳤다.
제도적 개혁도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먼저 테지니 시대의 분열로 인해 소유 관계가 난잡해지고 기록이 비어있는 부분이 많았던 기존의 토지대장을 대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토지의 면적, 소유자를 기준으로 등급을 나눠 조세를 단계별로 부과하였다. 또한 고로사이의 난을 진압한 공신들이 반란군의 영토를 점령하고 얻은 토지를 포함해 중경 외곽의 공유지를 공적의 등급에 따라 차등 분배하고, 이를 공신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조세를 추가적으로 부과하였다. 이렇게 공신들의 수조권을 인정하면서도, 그 세습으로 인해 찾아오는 폐단을 막기 위해 공정지의 세습은 원천 차단되었다. 이때 공신들이 부여받은 중경의 공유지가 우물 정(井)자대로 나뉘어져 공정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치제도적으로는 북연 초기에 율령체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3성 6부제를 크게 개편하여, 정책을 발의하던 중서성과 문하성이 업무 범위 문제로 인해 합쳐지고 그 권한이 대폭 축소된 추서성으로 변모하였고, 대신 승상 역할을 하던 재신이 상서성으로 넘어가고 황제-재신-상서성의 3중 체제가 완성되며 정책을 시행하는 상서성의 권한은 확대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감사를 담당하는 황제 직속 기관 오로게(憲監)가 설치되어 북연과는 또 다른 차별점을 보이기도 했다.
선원고국 후기 전성기와 신관파 정권
근대
A.D.1874~A.D.1945(72년)
원고제국의 수립
동천호 전쟁, 제국의 몰락
현대
A.D.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