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仁宗 · 인종

仁宗 · 인종
1459년(문종 9), 광종과 정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광종과 마찬가지로 장남으로서 원손에 올라 왕위계승자로 낙점되었고 6살이 되던 해에 바로 왕세손으로 책봉되어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광종은 선대 왕과 같이 세자 교육을 확충하고자 하여 즉시 시강원을 확대하도록 하였다. 당대 왕이었던 문종이 아픈 와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강원의 인원을 선별하고 인종과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특히, 시중을 시켜 한성을 돌아다니며 궁 밖의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었고, 나아가 전국의 기술자들을 선별하여 인종에게 여러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을 종용하였다. 당시에는 상왕이었던 문종이 광종의 허락없이 세자에게 잡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사대부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은 일이었고, 비유교적인 일이라 생각하여 광종에게 거의 매일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광종은 늙은 상왕의 뜻을 이해하고
「 원손의 견물을 넓히고자하는 일인데 어찌 그것이 틀렸다 할 수 있고, 과거 세종께서도 대호군과 뜻을 같이하여 학물을 닦았는데, 그런 공덕을 쌓고자하면 어찌 잡학이라고 관심을 두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저들 잡공의 도움없이 어떻게 무기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고 공구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잠을 청하고 배를 만들어 조세를 나를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나라를 총괄하는 왕이 그 원리를 모르고 업신여겨서 어찌 나라를 잘 다스린다 말하겠는가. 이 일은 과인의 식견이 아직 짧아 돌보지 못한 것을 상왕께서 도와준 것이니 오히려 은혜로운 것이다.」
하여 상소를 올린 자들을 꾸짖었다.
인종은 어릴적부터 호기심이 많아 문종이 여러 잡학을 소개해주면 관심있게 지켜보았고, 자그마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보며 기존의 유교중심적인 세계관에서 자유로운 성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종을 존경하여 시강원의 학업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책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유명했다. 문종과 광종도 세종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고 어떠한 업적을 이루고 이루기 위해 어떻게 정치하였는지 늘 이야기해주었다. 광종은 인종이 6살이 된 해부터 주변 관리에게 인종이 선왕과 같은 성군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하고 다녔다 전해진다.
인종이 왕세손이 된 지 얼마되지 못하여 문종의 병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인종은 학문도 등한시 하고 문종의 처소에 가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그러한 인종의 태도에 문종은 처음으로 인종에게 화를 내며, '이것은 너의 일이 아니다. 너의 일이 무엇인지 진정모르더냐. 하물며 후대 나라를 이끌 장부가 이리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되겠느냐.'라며 꾸짖었다. 인종은 그 날부터 문종이 훙서한 그 날까지 상왕의 침전에 출입이 금해졌다. 인종은 처음에 문종의 분노에 충격을 받아 이틀간 학업과 식사도 하지않고 침전에서 울기만 하였는데, 셋째 날부터는 시강원 관리는 물론이고, 잡공들을 피해다녔다. 이런 일들이 7일을 넘자 어머니인 정순왕후는 인종을 설득하여 침전에서 홀로 서적을 읽거나 잡물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인종은 시강하지 않았고, 잡공과도 대면하고자 하지 않았다.
인종이 문종을 보지 못한지 2주하고 며칠이 지나 문종은 결국 훙서하였고, 이에 인종은 마음의 병을 얻어 고열에 시달리고 앓아 눕게 되었다. 이에 아버지인 광종도 심히 걱정하여 소빈 임씨에게 부탁하여 늘 곁에서 지켜주라고 당부하였다. 2주 동안 인종은 미음만 먹을 정도로 몸이 악화되어 있었는데, 그 동안 문종을 심히 찾으며 이따금 문종과 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 번은 정순왕후가 찾아왔을 때, 세종이 승하하였을 때, 문종께서 어찌 하셨는지 물어보고는 눈물을 심히 흘렸다. 이에 의관들이 추스려 잠을 겨우 청하게 하였다.
인종은 겨울이 다 되어서야 병세가 치료되어 활기를 찾았다. 인종은 병세가 약화된 가을부터 광종에게 자신도 3년 상에 동참하고자 청하였는데, 광종은 인종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겨울이 끝나 봄이 된 이후에 인종이 함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인종은 3년 상을 함께 지내며 학업도 놓은 상태였는데, 틈틈이 비밀리에 서적을 반입한 기록이 있어 학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또, 대상이 지나면서 광종은 인종이 학업에 복귀하도록 하였는데, 공식상 광종 3년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종의 상이 끝나자 인종은 강박적으로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설에 의하면 궁내 생각시인 평산 신씨를 연모하여 좋은 모습을 보이고자 하였다한다. 이 시기에 잡공들도 다시 궁에 들여 공예품을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한 편으로는 인종이 아픈 동안, 문종의 환영이 나타나 인종을 감회시켰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인종은 본래부터 머리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세종이나 문종과 같이 어린 나이부터 학문적인 영감을 발현하였다. 또한, 어릴 적 문종을 병으로 잃고 본인도 심히 아픈 시절을 보냈기에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어릴적 잡공과 어울리며 산학, 공학에도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종은 강박적으로 유학에 전념하면서도 꾸준히 잡학 서적을 반입하여 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광종 5년이 되어 인종은 공조좌랑 진연과 도공 신첨과 돈독한 사이로 지냈는데, 신첨은 인종이 왕세자가 되고 얼마 안되어 잡공으로 궁에 이따금 들어와 인종과 시간을 같이 보내었고, 진연은 어릴적 문종의 명으로 도공들을 출입시켰던 진승제의 장남으로 인연이 깊었다. 이들은 궁내에서는 주류와 두루 어울리지 못하였는데, 이들이 유교가 아니라 잡학에 더 관심을 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진연은 번번이 정랑이 되지 못하였다. 신첨은 그 재주가 뛰어나 대호군 장영실의 기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잡공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와 같은 잡다한 지식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인종도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여 장성하면 그를 대호군과 같이 벼슬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광종 7년이 되어 신첨은 두창에 걸려 홀로 죽어갔는데, 진연은 이를 알고도 정순왕후의 청으로 인종에게 알리지 않았고 신첨이 죽은지 보름이 되어서야 알고 슬픔에 잠겼다. 이에 왕세자빈 유씨가 곁에서 달래주었으나 보름간 내외하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을 접어두고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 이내 사서오경을 쉬이 암독하시고 명나라에서 넘어온 각종 서적을 반입하여 보기를 반복하여 그 학문의 명성이 높아 광종과도 즐겨 토론하며, 시강원에서도 관리들을 상대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등 선대와 같이 총명함이 돋보여 그 위세가 높았다. 다수의 시강원 학자들도 이를 기특히 여겨 인종에게 예의와 존경을 보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제학 이효명은 인종을 시기하여 사이가 좋지 아니하였으니 광종에 의해 이내 유배를 가게되었다.
1976년, 광종 10년부터 광종이 등창을 앓게 되어 겨울이 되자 그 증세가 심히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광종 11년에는 인종의 명석함을 믿고 대리청정을 수행토록 하였다. 광종의 대리청정 공표에 형식적으로 온 신하들이 회유하였으나, 네 번째 공표에서 겨우 인종이 대리청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은 대리청정이 시작되자 마자 전 부제학 이효명을 불러들여 집현원 행직전에 임명하니 관리들이 반대하였으나 끝내 그리 하도록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