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일보 선정 30대 구주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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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의 일간지인 태정일보가 2014년 "구주 최고의 음악가"의 순위를 정한 리스트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운전산 권동욱 전문국 파고다 신경희
6위 7위 8위 9위 10위
금익현 현진 밴드 온 더 런 백현희 내림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구주 대중음악 4대 원로
권동욱 신경희 전문국 현진
전문국
全紋菊 | Cheon Mun-kook
출생 1949년 6월 15일 (71세)
구주 천초도 함연군 대청리
국적 구주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수훈 문화대훈장 (1995년)
문화공로상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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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전수창 송경숙
학력 정조중학교 (졸업 / 26회)
함연공립고등학교 (중퇴)
신체 179cm, 63kg, AB형
종교 무종교 (무신론)
장르 , 블루스, 하드 록, 헤비 메탈, 글램 메탈
사용 악기 보컬, 기타
소속 밴드 첨탑 (1968 ~ 1975)
활동 기간 1966년 – 현재
레이블 워너브라더스

개요

구주의 음악가이다.

상세

권동욱이 "구주의 밥 딜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면, 전문국은 구주의 오지 오스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구주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1]이며, 구주 헤비메탈 음악의 아버지격 되는 인물이다.

또한 마약, 성추문 등으로 얼룩진 사생활 때문에 구주 내에서는 "난봉꾼 연예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2018년 버닝썬 게이트 당시 승리 등 대한민국의 여러 연예인들이 파문을 겪자, 구주의 언론인들은 이를 "제2의 전문국 사태"라고 칭하기도 했다.

2010년, 음악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인 황실의 문화공로상을 수훈받았다.

생애

유년기

가난한 농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2살때 집을 나가 행방불명 되는 바람에 외부모 가정에서 자라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어릴때 소아마비 장애를 앓아서 다리가 불편했던 것 때문에 학교를 다닐때 급우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학교 2학년 시절, 우연히 TV에서 본 비틀즈의 공연 영상에 매료되었고, 비틀즈 같은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음악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당연히 집안이 가난했고 전문국 역시 학교가 끝나면 어머니의 일을 도와야하는 입장이라 동료 학생들은 물론, 가족들에게서도 비웃음을 샀지만, 점차 진지하게 음악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자 그와 함께하는 친구들도 몇몇 생겨났다. 17살때 신문 배달을 하며 모은 돈으로 80환짜리 일렉트릭 기타를 손에 넣었고 그 곡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학교 선생이 음악을 못하게하려고 막자, 결국 전문국은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에 두고 학교를 중퇴하였다.

초창기

초창기에는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흥겨운 팝, 로큰롤 음악을 하였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 영국의 록 음악이 구주에도 유입되기 시작하자, 그는 조금 더 거친 기타 사운드에 빠져 구주 내에서는 거의 최초로 헤비 메탈을 시도했다. 특히 1969년 그가 동료 음악인의 소개로 들은 레드 제플린의 2집 앨범이 방향 전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레드 제플린은 물론 블루스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이 노래를 들은 이후 정말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헤비 메탈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968년, 그는 고등학교 시절 몇 안되게 그와 어울렸던 친구들과 함께 첨탑이라는 록밴드를 결성했다. 리드 기타와 보컬에 전문국이, 리듬 기타에 금창준이, 베이스에 김명선이, 드럼에 이영종이 재직했다. 그러나 밴드가 일부 라이브 클럽에서 연주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돈을 벌 수단이 없어지자, 전문국을 제외한 멤버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밴드를 그만뒀다. 전문국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천초도 내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을 모아 밴드 멤버로 고용하였고, 라이브 연주 밴드를 구하는 곳에는 닥치는대로 라이브 연주를 하여 지역 내에서 인기를 쌓았다.

첫번째 전성기

첨탑의 라이브 연주를 본 한 중소 음반사 관계자가 첨탑에게 정규 1집을 내는게 어떠냐고 제의하였다. 전문국은 작곡에는 자신이 없었기에 잠깐 꺼렸지만, 그 관계자가 끊임없이 설득하자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1973년 첨탑 1집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구주 음반 차트에서 184위에 오르며 신인 밴드의 음반 치고는 꽤 괜찮은 성적을 냈다.

전문국과 첨탑의 인기를 드높인 것은 이듬해 발표한 곡인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레드 제플린의 1971년 곡을 커버한 곡인데, 당시에는 구주 내에서 블루스나 헤비 메탈, 하드 록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블루스, 메탈 성향이 강한 로큰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특히나 전문국의 전매특허인 고음과 엄청난 속도의 기타 속주가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차트 7위까지 오르며 전문국 최초의 히트 작이 된다.

그러나 이 시기 전문국의 상습적 마약 중독 문제가 시작되었고, 밴드 멤버들도 수시로 갈려나가면서 전문국은 점차 나 편한대로 음악을 하면 안되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문국은 1975년, 첨탑이 막 인기를 가지기 시작할즈음에 첨탑은 끝났다면서 일방적으로 밴드 해체를 선언했다.

두번째 전성기


상업적, 평론적 성공은 첨탑 재직기보다는 두번째 전성기인 1980년대에 더 많이 이룬 편이다. 1980년대, 총 3장의 차트 1위 앨범과, 25곡의 차트 1위 곡을 찍어내 구주의 1980년대를 상징하는 스타로 올라섰다.

마약 중독에 쩔어 지내던 시절에는 방황도 많이 했고 잠깐 침체기를 겪었다. 1978년에는 마약 투약 혐의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사고, 1년의 징역형을 받는 등의 흑역사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1980년대 마약 사용량을 차차 줄여나가고 다른 음악가들의 음반도 많이 들으며 음악적 소양도 키운 결과, 1980년대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78년 발매한 1집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1981년 발매한 전문국 2집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1980년대는 미국을 중심으로 헤비 메탈이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구주만큼은 컨트리, 팝 장르의 유행으로 인해 메탈 부분이 블루 오션이었다. 전문국은 이 점을 파고 들어 블루스, 하드 록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헤비 메탈을 선보였고, 이 음반은 전문국의 바람대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총 18주간 차트에서 1위를 하고, 약 150만장이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뒀다.

전문국 3집은 팝적인 멜로디를 헤비 메탈에 결합한 것으로 헤비 메탈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기성세대에게까지 인기를 얻으면서 상업적으로 더욱 성공하였다. 현재까지 전문국 3집은 총 500만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되며, 이는 단일 음반으로서는 구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이다.

현재

1992년, 헤비 메탈이 몰락한 이후에도 전문국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비록 1980년대만큼의 인기는 아니지만 청년층은 물론 중장년에게도 인기를 구가하며 현재까지도 그 팬층을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추잡했던 사생활을 반성하는 의미로, 마약 금지 캠페인에 참여하고, 음악으로 얻은 수익을 마약 및 알코올 중독자 재활을 위해 기부하는 등 선행을 선보여, 당초의 난봉꾼 이미지를 많이 희석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한국의 신해철, 김태원 등의 뮤지션과도 교류하고, 2013년에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앨범에서 깜짝 등장해 기타 솔로를 연주하는 등 해외 뮤지션과도 적극적인 콜라보 행보를 보이면서 해외에서의 인기도 높아진 편이다.

음악적 스타일과 평가

대표곡


구주 대중음악사 500대 명곡

395위
2012년

  • 시작 (1976)


  • 발걸음 (1983)


구주 대중음악사 500대 명곡

2012년 74위
2021년 105위

  • 화산 (1984)


  • 고속도로 (1984)


구주 대중음악사 500대 명곡

2012년 5위
2021년 7위

  • 심장박동소리 (1985)

논란 및 사건사고

그야말로 엄청난 음악적 실력과는 별개로, 사생활이 난장판인 뮤지션의 아이콘이라고 불릴정도로 논란과 사건사고가 많은 편이다. 이로 인해 법적으로 처벌도 많이 받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현재는 마약, 술, 담배 등 안좋은 것을 다 끊고 방송에 출연해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공익 광고를 찍을 정도로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마약 투약 파문

추잡한 성생활

타 장르 비하 발언

느닷없이 트위터에 "힙합은 갱스터 정신밖에 없으므로 없어져야할 쓰레기"라는 망언을 올렸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구주와 한국, 일본 등지에서는 전형적인 락찔이의 발언으로 조롱당하는 중. 전문국은 이에 대해 정신적으로 심란한 일이 있었는데 시끄럽게 힙합을 틀어대는 이웃집 주민 때문에 화가나서 우발적으로 이 글을 올렸다고 해명하였지만,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여담

  • 이미지가 뭔가 많이 차이나지만, 권동욱과는 20대 때부터 서로 교류하고 지낸 절친한 사이이다. 전문국과는 달리 권동욱은 깨끗한 사생활로 유명한 연예인이다.
  • 야구는 자주 보지 않지만 응원하는 팀은 마루에이 돌핀스라고 한다. 천초도가 소림도와 맞닿아있고 천초도 사람들도 대부분 마루에이 돌핀스를 응원하므로 천초도 토박이인 그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굉장한 부자가 된 지금도 고향인 천초도에서 거주중이다. 천초도의 공식 홍보 영상에도 등장할정도로 애향심이 투철하다.
  •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릴 시절 때문에 먹방을 정말 먹스럽게한다. 또한 저소득층을 위한 기부를 활발히하고 있으며,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를 주장하는 정당인 구주민정당의 광적인 지지자인것으로도 알려져있다.
  •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아버지는 그가 2살때 집을 나가 안돌아왔는데 전문국은 아버지가 그대로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문국이 1970년대 뮤지션으로 유명해지자,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다. 전문국은 그동안 죽은줄로만 안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이내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이제 돈 좀 만지려고 하니까 다시 찾아오는 행태에 크게 분노해, 아버지와 만나주지도 않고 영원히 화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 이와는 반대로, 그의 어머니는 전문국을 어릴때 뒷바라지해주고 학교에서 괴롭히는 나쁜 학생들로부터 전문국을 감싸준 과거가 있으며, 전문국이 20세때 막 전문 뮤지션으로 거듭나려할때 죽었기 때문에, 전문국은 아직까지도 어머니에 대해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SNS를 시작한 이후로는 매일 어머니의 기일인 3월 5일마다 존 레논의 곡인 "Mother"를 공유하고 있다. 이 노래는 존 레논이 어린 시절 교통 사고로 사망한 어머니와 어릴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쓴 노래로, 전문국의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 난잡한 남/여성 관계와 별개로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주의자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과 사랑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막장스러운 사연이 존재한다.
  •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은 비틀즈, 그 다음은 레드 제플린,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

각주

  1. 논란이 있긴 하나 실물 판매량에서는 전문국이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