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Küstesrand
Unabhängiger Staat Neuguinea
쿠스테스란트
뉴기니 독립국

19181920
국기 국장
연합국의 보호령 및 미승인국
표어 Führen heißt Dienen
이끌어 준다는 의미는 봉사함을 말한다.

초록색뉴기니 독립국의 세력권
수도 하이덴베르트슈타인
Hardenbertstein
정치
공용어 독일어
정부 형태 연방제, 미승인국, 공화제
총독
Prokonsul, Königerat[1]
루트비히 폰 하이덴베르크
Ludwig Hardenberg 1918-1918
역사
 • 헤르베르트쇠헤 봉기 1918년 4월 29일
 • 뉴기니 선언 1920년 1월 9일
지리
1900년 어림 면적 247,281㎢
기타
통화 금 마르크 (Goldmark)
  1. 현지 독일 정착민들과 본토민들이 뉴기니 독립국의 국가수반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단어

쿠스테스란트(독일어: Küstesrand) 혹은 뉴기니 독립국(독일어: Unabhängiger Staat Neuguinea)은 1884년부터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존속했던 식민지인 독일령 뉴기니에서 독립한 미승인국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호주군이 카이저-빌헬름슬란트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비타 피카 전투(Gefecht bei Bita Paka)로 인해 현지민들과 독일계 정착민들이 학살이 자행되자 지금의 헤르베르트쇠헤(Herbertshöhe)에서 독일령 뉴기니의 식민지 사령관, 루트비히 폰 하이덴베르크(Ludwig Von Hardenberg)를 주축으로 하여 헤르베르트쇠헤 봉기(1917-1918)를 통해 호주군을 몰아내려고 했던 한편, 독일제국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추구하는 국가 건설을 기치로 하여 '뉴기니 독립국'(Unabhängiger Staat Neuguinea)의 건국을 선포하게 된다.

독일령 뉴기니의 몰락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에 속한 호주의 군대가 동년 8월에 독일령 뉴기니를 공격하여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행하던 심슨하픈(Simpsonhafen)[1]과 최대 도시였던 헤르베르트쇠헤을 함락시켰고 카이저빌헬름스란트, 비스마르크 제도 점령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한스 뷰셰르트(Hans Wuchert) 중위는 휘하의 독일 식민지 방위대와 경찰 병력들을 이끌고 심슨하픈에서 농성전을 벌였으나, 61명의 독일군과 200여 명에 이르는 현지민 경찰들의 사살되는 끝에 9월 11일, 항복하였다.(제1차 비타 파카 전투)

이후에 호주군은 카이저빌헬름스란트를 차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독일제국의 태평양 함대를 이끌던 막시밀리안 폰 스페(Maximilian Johannes Maria Hubert Reichsgraf von Spee) 제독은 캐롤라인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하면서 저항을 시도하였으며, 혼 곶(Kaap Hoorn)을 지나 대서양을 건너 독일로 귀항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독일령 사모아가 뉴질랜드군의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함대를 이끌고 사모아에 정박하여 있는 연합국의 함선들을 요격할 요량이었으나, 이미 이들이 떠남에 따라 사실상의 탈환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던 사모아를 뒤로한 채 연합국이 이미 태평양 내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인식한 슈페 제독은 타히티에서 프랑스 선박을 포격한 뒤, 곧장 전대를 모아 캐롤라인 제도로 회항을 택하면서 사실상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이후에는 크리스토퍼 크래독(Sir Christopher Cradock)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남대서양을 건너 남태평양으로 진입하려 하는 과정에서 독일 태평앙 함대와 만남으로 인한 파페이터 해전으로 상당량의 물자를 손실한 독일 전대는 결국 1915년의 연합국과의 협상 끝에 캐롤라인 제도에 대한 독일 태평양함대에 주둔권을 인정하는 대신, 일체히 군사적 도발을 금하는 내용의 조약을, 일개 함장[2]에 의한 독단적 판단에 의해 체결하게 된다.(Treaty of Ponape, 포나페 조약)

이후 캐롤라인 제도로 호주군과 영국군의 주둔이 감행되면서 독일 제국의 태평양함대는 사실상 볼모가 되었으며, 독일령 뉴기니는 사실상 소멸된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후에도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가 있었으나, 이들 연합국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패배만 거듭하면서 소모전을 벌였다.

헤르베르트쇠헤 봉기

1918년부터 뉴기니 내 주둔 식민지 독일군은 연합국에 통제를 받으며 본국으로, 혹은 연합국으로 인도될 준비에 나서기 시작했고, 본토인 독일제국은 사실상의 패망 위기에 접하게 되었다. 상당수의 식민지 독일군들은 독일제국의 몰락에 분노와 좌절을 맛보았고,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면서 연합국의 통제에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마침내 당시 주둔 식민지 독일군 사령관이었던 루트비히 폰 하이덴베르크를 중심으로 헤르베르트쇠헤 내에 위치한 임시 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를 선언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특히나 이들의 봉기 과정에서 호주군의 오인 사살로 상당수의 현지민들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식민지 내 연합국에 대한 민심은 급격히 싸늘해졌다.

루트비히 폰 하이덴베르크가 이끌던 봉기 병력은 일제히 임시 수용소의 창고를 털어 무장을 시도했으며 연합군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호주군도 반격을 시도했으나, 조직화된 봉기 병력의 매서운 저항과 함께 현지민들의 봉기 합세로 위기를 느꼈고, 봉기 병력은 격렬한 저항 끝에 뉴브리튼섬의 주요 거점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차 비타 파카 전투) 이후 봉기 병력들은 독일제국연합국에 통제에 벗어난 독립 국가를 설립하기를 희망하면서 '뉴기니 독립국'(Unabhängiger Staat Neuguinea)의 건국을 선포했으며, 봉기를 이끌던 루트비히 폰 하이덴베르크를 '통치자'(Königerat)로 추대하였다. 한편으로 이들은 캐롤라인 제도의 슈페 제독과 연결을 시도하여 태평양 함대를 운용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재반격에 나선 연합국의 뉴브리튼섬 침공으로 루트비히 폰 하이덴베르크가 전사하고 상당수의 봉기 지도자들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봉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연합국들이 독일령 뉴기니에서 벌어지는 산발적 독립 운동에 대한 논의를 언급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종전과 뉴기니 선언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빌리 휴즈(Billy Hughes)는 독일제국에 패망 이후 뉴기니에 대한 처리를 두고 '전략적인 요새'로서의 역할로서 뉴기니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획득하기를 희망했으나, 현지에서의 반발과 이전에 헤르베르트쇠헤 봉기로 인한 갈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나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독일계 정착민과 현지민들을 중심으로 한 뉴기니 향토방위군(Neuguinea Landeswehr)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한편으로 호주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연방군으로 참전하여 1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했으며, 종전 이후의 총 6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손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사실상 이들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던 것은 호주와 뉴질랜드라는 나라의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킨 것이 전부였다.

이에 호주는 이러한 '피해국과 승전국'에 대한 보상을 얻기 위해 영국에 대해 군사권과 외무권을 포함하여 더 많은 권리를 요구했고, (이것은 실제로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실현된다.) 독일의 남태평양 식민지에 대한 식민지 권한을 계승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존 모내쉬(John Monash)[3]를 비롯한 호주의 지식인 계층은 오히려 남서태평양 제도에 대해 연합국에 제한적 통제를 받는 독립국으로서 유지하는 것이 더 옳다고 판단했다. 당시 호주의 경제력이나 상황으로서 남태평양 제도에 위치한 독일계 정착민과 현지민들을 통제하는데에 상당한 국력 소모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1920년, 베르사유 조약이 공포되면서 독일제국이 식민지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함에 따라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독일령 사모아, 중국의 조차지 만등이 타국으로 넘어가던 와중에 독일령 뉴기니는 "영국과 호주 정부에 통제를 받는 자치령"으로서 쿠스테스란트 자치령(Dominion of Neuguinea, 쿠스테스란트 제1공화국)의 설립을 통한 간접 통치로 그 식민책을 전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각주

  1. 수도 역할을 맡게 된 것은 1910년 이후로, 그 이전은 최대 도시였던 헤르베르트쇠헤가 수도 역할을 했다.
  2. 일개 함장이라고 언급했지만, 사실 슈페 제독은 명문 귀족 가문의 출신이면서도 해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칭다오에 위치한 독일의 동양 함대에 대한 지휘권을 일제히 위임받았을 만큼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3. 호주군단의 초대 군단장이자 하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로서 당시 총리인 빌리 휴즈의 신뢰를 받았고 영웅으로서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00$ 화폐의 그의 모습이 기려지는 영광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