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한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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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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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10월 11일 | |||||||||||||||||||||
신라국 달구벌 | |||||||||||||||||||||
975년 6월 7일(향년 74세) | |||||||||||||||||||||
청한 청호부 청운궁 | |||||||||||||||||||||
청한 초대 국왕 | |||||||||||||||||||||
939년 8월 4일 ~ 975년 6월 7일(35년 10개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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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청한의 초대 국왕
초기 생애
재위기간
후계문제
태조 대왕 총서
태조 조곤(太祖 趙坤)은 청한의 시조로, 혼란의 말기에 일어나 백성을 보전하고 나라를 세운 시조이다.
휘는 곤(坤)이요, 달구벌에서 출생하였으며, 그 가계는 신라 말기의 무반 출신으로, 가문은 비록 미천하였으나 기질은 고매하였고 의기는 호방하였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히고 군사에 재능을 보여, 신라 말기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장군으로 임명되어 대야성 방면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정명 6년(920), 후백제 견훤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었고, 조곤은 패잔병과 함께 동쪽 강원도로 피신한 뒤, 국경을 넘어 발해로 망명하였다.
후발해에서 그는 무관으로 등용되어, 요동 전투에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큰 공을 세우며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발해는 쇠약하여 거란의 침입에 국력을 다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태조는 발해의 유민과 귀족을 규합하여, 연해주 남단의 청산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토착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태조는 점진적으로 영토를 장악하고, 정착 기반을 닦았다.
원주민과의 갈등은 장기전으로 이어졌으며, 수도가 세 차례나 함락되는 등 고난이 많았으나, 10년 후 흥성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청산도 전역을 평정하였다.
그는 즉위하여 국호를 청한(靑漢)이라 정하고,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에게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유민과 토민을 포섭하여 하나의 민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태조 35년(975), 병환으로 대남궁에서 붕어하니, 시호를 광덕대왕이라 하였다. 재위 35년,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세운 위업은 청한 400년 역사에 뿌리가 되었다.
청한사
○ 900년(신라 효공왕 4년) 겨울, 태조 조곤이 신라 경상도 달구벌(현 대구)에서 빈농 가문에서 태어나다. 부친은 영조 재헌대왕, 모친은 이월왕후이다. 어릴 적부터 문무를 겸비하였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 914년, 조곤이 향리 무예대회에서 활약하여 지역 호족들의 주목을 받다. 그의 무예는 뛰어났으며 검술과 창술 모두에 능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장군의 재목"이라 불렀다.
○ 920년(신라 효공왕 4년), 조곤이 20세의 나이로 하슬라주 도독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병사들을 통솔하고 전략에 밝았으며,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 922년, 북방에서 말갈족의 소규모 침입이 있었고, 조곤은 이들을 소수 병력으로 격퇴하여 국경의 안정을 이끌다.
○ 923년, 조곤이 낙동강 이남 방어를 맡다. 병기고를 정비하고, 유민을 수용하며 농업 복구에 나서자, 현지 백성들이 그를 따르다.
○ 924년, 신라 조정이 강주 지방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곤을 강주 방어 총책임자로 삼다.
○ 927년, 후백제 견훤이 서라벌을 포위하자, 조곤이 신라군 주력부대를 이끌고 출전하다. 수일 간의 공방 끝에 후백제군이 성벽을 돌파하여 신라군이 패배하고, 조곤은 아들과 충성스런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퇴각하다. 이때 조곤은 "나라의 흥망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릇된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말하고 강원도 방면으로 탈출을 시작하다.
○ 928년 봄, 조곤이 설한풍을 뚫고 태백산을 넘어 강원도 북부를 지나 발해 변경에 도착하다. 후발해왕은 사절을 보내 조곤을 맞이하고, 그를 상장군으로 봉하며 국방을 맡기다.
○ 930년, 조곤은 발해 북부 국경에서 거란군과의 여러 차례 소규모 충돌에서 모두 승리하다. 특히 함풍진 전투에서는 기습 작전으로 3천 거란 병력을 무찌르다.
○ 931년, 부여성 전투가 벌어지자 조곤이 발해군 선봉을 맡아 전진하고, 화살에 어깨를 맞으면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다. 결국 거란 본진을 무너뜨리고, 태평왕이 궁중 연회에서 조곤을 "동방의 호랑이"라 부르며 표창하다.
○ 938년,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발해를 침공하고, 후발해 경성이 함락되자 조곤이 귀족들과 병력을 모아 연해주 방면으로 퇴각하다. 그는 전란 중에도 어린 백성과 부녀자들을 이끌며 "피난도 전쟁의 일환"이라 외쳤다.
○ 939년 봄, 연해주 남부 청산도에 이르러 군영을 설치하고, 방벽과 관문을 세우며 방어체계를 갖추다. 그러나 원주민 부족들이 기습을 감행하니, 조곤은 일부 지역을 내주고 후퇴하여 재정비하다.
○ 939년 여름, 조곤이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략적 후퇴와 매복을 반복하며 지구전으로 전환하다. 수도 대청이 세 차례 함락되었고, 이 중 2차 함락 때는 매화왕후가 포위 속에서 탈출한 일이 있었다.
○ 939년 여름, 흥성 전장에서 조곤이 1만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원주민 본진을 포위하고, 직접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적장의 목을 베다. 청산도 전역이 청한군의 손에 들어오고, 원주민 지도자들이 항복을 맹세하다.
○ 939년 여름, 조곤이 장로들과 군신의 추대를 받아 청한을 건국하고 태조에 오르다. 국호는 청산의 푸름을 따서 "청한"이라 정하고, 수도는 대청성으로 삼다.
○ 940년, 태조가 관제 개편을 실시하고 육부제·12도제를 시행하다. 발해식 문물과 제도를 일부 계승하였고, 과거제를 준비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하다. 한성 국학이 설립되어 지방 자제들이 입학하니 학문이 번창하다.
○ 941년, 진에게 사신을 보내 왕의 등극을 알리다
○ 945년,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귀족 소유 농지의 일부를 환수하고, 국가 직영전으로 전환하다. 이에 귀족의 반발이 있었으나, 태조는 법을 들어 이를 억누르고,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완화하다.
○ 955년, 인호공은 문무를 익히며 궁중 예법에 능하였으나, 행정 감각은 부족하였다. 반면 의혜공은 지방 순행 시 민정을 챙기고, 국경 방어에도 직접 나서며 장군들의 신망을 얻게 되다.
○ 960년, 의혜공이 북부 방면 산족 반란을 평정하며 큰 공을 세우고, 병사들에게 신망을 얻다. 인호공 측근들은 이를 경계하여 음모를 꾸미나 실패하다.
○ 960년 왕이 의혜공을 보내 송에게 조공을 바쳤다
○ 965년, 태조가 인호공에게 수도 내무를 맡겼으나 부패가 심화되고, 민심이 떠나기 시작하다. 이에 태조는 의혜공에게 북방 방어권과 지방 통치권을 넘겨 실권이 점차 의혜공에게로 쏠리다.
○ 966년 송에게 조공을 바쳤다
○ 970년, 의혜공을 세자로 책봉하다
○ 970년, 태조가 병환으로 눕자 대리청정을 선포하고, 의혜공에게 정사를 일임하다. 인호공은 불복하여 반발하나 조정 신료 다수가 의혜공을 지지하니 정국은 안정을 되찾다.
○ 975년 5월, 태조가 청한 별궁 대남궁에서 붕어하다. 향년 75세. 유언으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라고 당부하다. 태조는 신위가 모셔지고, 시호는 "태조 광덕대왕(太祖光悳大王)"으로 추서되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고, 대청산릉에 안장되다.
○ 다음날, 세자가 즉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