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갈리아 공화국
Frangalia Republic
République
국기
(세계력 804년 ~ 현재)
국장
Our free république (우리의 자유로운 공화국)

세계력 904년 경 프랑갈리아 공화국 판도
수도 파리아스
정치
공용어 프랑갈리아어
대통령 필립 조제프 노르망
공화국 대장군 블롱델 앙프아르
역사
독립국가  
 • 프랑갈리아 제국 성립 세계력 804년
 • 도이체스-프랑갈리아 전쟁 세계력 870년
 • 프랑갈리아 혁명 - 공화국 성립 세계력 871년
인구
세계력 900년 조사 약 5,400만명
경제
통화 공화국 프랑

개요

프랑갈리아 공화국 (프랑갈리아어: Frangalia Republic) 또는 프랑갈리아 (프랑갈리아어: Frangalia), 혹은 약칭 공화국 (프랑갈리아어: République)은 유로파스 대륙 동부에 위치한 공화정 국가이다.

본래 유로파스 대륙을 호령하던 프랑갈리아 제국(Frangalia Empire)으로써 튜토니아 왕국과 이베리논 왕국 등 주변국가들을 지배하는 강대국이었으나, 세계력 864년 튜토니아 왕국의 장군 비스마르크 폰 게르마니아(Bismarck Von Germania)가 이끄는 도이체스 연합군이 프랑갈리아 제국군이 격파되자 그 반동으로 제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공화국의 국명 프랑갈리아(Frangalia)는 과거 왕국과 제국 시절 때부터 사용했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공화정 수립 이후에는 대체로 약칭 공화국(République)으로 호칭되고 있다.

도이체스-프랑갈리아 전쟁에서의 패배로 프랑갈리아 제국은 굴육적인 패배 협정을 맺었으며[1], 이에 그동안 낡은 제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대다수의 프랑갈리아 국민들(일부 진보파 귀족, 군인, 자본가, 평민 등)이 혁명을 일으켜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결국 제정이 붕괴되고 신체제가 수립되었지만 정치적 불안은 계속되었고, 도이체스 제국과의 영토 분쟁으로 벌어진 2차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해 결국 민족 성지인 알자니아(Allzania)까지 양도하게 되었다. 결국 수도 파리아스에서 공화정에 반대하는 자치 운동이 일어나 파리아스 공동체(Farias Commune)라는 자치 국가가 수립되나 이는 공화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공화국 수뇌부는 무너진 경제와 군사력을 살리기 위해 대륙 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으며, 제정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을 대거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세계력 887년 식민지 중 하나인 누벨 프랑갈리아(Nouvelle Frangalia)에서 마법술 자원 중 하나인 콜 원유(Col oil)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마법술 향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정치

본래 전제군주정 군가였으나, 혁명 이후 공화정을 채택하였다. 공화정 설립 초기에는 중간계급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도이체스 제국과의 2차 전쟁에서 공화국이 또다시 패전하자 공포 정치를 이끌던 수뇌부가 실각하고 대통령제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10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그러나 공화정이 안정화된 이후에도 주변국들과의 잦은 분쟁으로 인해 군부의 입김이 점점 세지고 있어 정치적 불안은 여전하다.

문화

프랑갈리아는 옛부터 문화의 나라로 알려졌다. 프랑갈리아 왕국과 제국 초창기 때 왕실 주도의 문예 부흥 정책으로 프랑갈리아에는 수준높은 미술, 건축물이 많다. 또한 국민들의 기본적인 문화 활동 수준이 높아 주변국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프랑갈리아 출신 철학자이자 시인인 엔테(Ente)의 서적은 도이체스 제국과 루스라니아 연합에서 폭 넓게 읽히고 있으며, 프랑갈리아 형식(프랑갈리아어: Frangalia Style)이라는 하나의 미술 형식마저 존재한다.

군사력

제국이 수립된 초창기에는 황제의 군국주의 정책으로 상당한 군사력을 자랑하였다. 제국은 알자니아, 바실(Basil), 루도뉴(Rudoneu) 등 마법술에 필요한 자원들이 매장된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황제와 군 수뇌부의 마법군 통솔력은 당대 유로파스 대륙에서 따라올 국가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직이 세습되면서 초대 황제와 달리 이후 황제들은 국정에 관심이 없었으며, 황제에게 아첨하는 탐관오리들이 득세하고 그로 인해 실력있는 장군들이 실각되면서 제국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제국의 속국이었던 튜토니아 왕국이 주변 동족 국가들을 통합하여 연합군을 결성, 제국 수뇌부는 이에 놀라 바로 대응하지만 전쟁은 결국 제국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프랑갈리아에 혁명이 일어나고 공화정이 수립되나 내전이 벌어지는 등 사태가 심각하였다.

세계력 885년 공화국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대통령 필리프 조제프 노르망(Philip Joseph Normand)은 마법군과 마법군 병기 발전을 국가의 사명으로 내세웠으며, 전국에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수립하고 마법술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대륙 외 식민지를 확대하는 등 강한 국방 정책을 펼치고 있다.

외교 관계

  • 도이체스 제국 - 제국 성립부터 적대했던 앙숙으로,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전쟁을 치른 바 있다. 공화국은 제국의 군사력과 그로 인한 팽창 정책을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있으며, 제국 역시 자국을 적대하는 공화국을 억제하고자 한다.
  • 브레곤 연방 - 과거 100년 동안 전쟁을 치뤘을 정도로 앙숙인 관계였지만, 도이체스 제국이 성립된 최근에 와서는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 외교적으로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
  • 카카니움 동맹 - 과거 프랑갈리아 제국 성립 초창기에는 카카니움과의 전쟁을 벌여 패퇴시키고 프랑갈리아가 카카니움령 동부 해안을 자국 영토화 하는 등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카카니움이 전열을 가다듬고 재전쟁을 벌여 결국 영토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도이체스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외교적으로 별 마찰없는 관계이다.
  • 루스라니아 연합 - 마찬가지로 프랑갈리아 제국 시절 전쟁을 하여 루스라니아 동부 지역이 프랑갈리아에게 유린당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와는 별개로 프랑갈리아 공화국의 문화나 시민 정신(특히 프랑갈리아 혁명이나 파리아스 공동체 사건)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1. 프랑갈리아의 수도 파리아스에서 맺은 협정이기에 '파리아스 협정'이라고 불린다. 파리아스 협정에 의해 프랑갈리아는 도이체스 연합군의 통일 국가 수립 용인, 프랑갈리아의 일부 마법술 자원 및 기술 제공 등 막대한 손해를 치뤄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