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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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의 외부영토
프랑스령 베트남
Viêt Nam Français
Pháp Việt Nam
국기 국장
Liberté, Ordre Public
자유, 공공 질서
국가 Chant du départ
공민에게 고함
수도 사이공
최대 도시 하노이
인구 수 80,398,100명 (2020년)
면적 331,212㎢
인종 구성 베트남계 68.3%, 중국계 15.4%, 프랑스계 10.5%, 기타 5.8%
종교 구성 불교 69.3%, 기독교 2.1%, 기타 3.3%, 무종교 25.3%
국왕 뤼시앵
총독 무소속 조르주 불
총리 프랑스 공산당 응우옌떤쌍
GDP
(명목)
전체 $2,009,952,500,000 (세계 9위)
1인당 $25,000
화폐 베트남 프랑

개요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공식 명칭은 외부영토)이다. 프랑스령 알제리보다도 규모가 큰, 프랑스의 최대 규모 식민지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실상 독립 국가 취급을 받고 있다.

역사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국가중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기원전 207년 남월의 시대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전 111년부터는 한나라의 지배 시대를 거치면서 한구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605년경에는 다낭을 중심으로하던 참파 왕국이 중국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당나라 시대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사실상 중국의 문화권에 편입되게 된다. 그러다가 907년 5대 10국 시대에 들어 혼란에 빠진 중국의 상황을 틈타 쿡 트아주가 절도사를 자처하며 쿡씨 절도사 시대가 도래했다.

938년, 응오 왕조가 성립되었으며 응오 왕조는 96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베트남은 완전히 중국에서 독립하게 된다. 968년 대월국이 세워져 1802년까지 존속하였다.

1802년 응우옌 왕조가 세워지며 베트남 최후의 통일 왕조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이때 프랑스 제국의 식민 지배 야욕이 드러나며 베트남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미 루이 16세 시대때부터 베트남에 관심을 보이던게 프랑스였다. 1800년대 초반에는 제1차 대유럽 전쟁으로 인해 정신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응우옌 왕조도 나름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817년 대유럽전쟁에서 승리한 보나파르트 황가에 의해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제국과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5개월간의 짧은 전쟁 끝에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제국의 제후국으로 편입되는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 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나마 1848년까지는 명목상이라도 제후국 대우를 받았지만 1848년 프랑스 노동자 대투쟁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국의 정치가 혼란해져, 응우옌 왕조가 이 틈을 타 독립을 시도한 것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발각되었다. 결국 1850년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본국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응우옌 왕조 일원들은 청나라로 망명했다. 이후로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분이 되어 1923년까지 프랑스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1900년대 초반, 응우옌 왕조를 지지하던 시민들이 하노이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베트남 시민들은 물론, 프랑스의 몇몇 좌파 지식인들까지 베트남의 독립을 주장하자 1923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각각 프랑스령 라오스, 프랑스령 캄푸치아, 프랑스령 베트남으로 분리시키고, 이중 가장 큰 베트남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후 이 자치권은 1960년대 이후 모든 프랑스 식민지에 적용되었다.

당시 베트남의 자치권은 어디까지나 본토 파견 의원 10명을 선출하고 식민지 자치 의회를 선출하는데에 그쳤지만, 프랑스 공산당의 베트남 지부 정당인 베트남 공산당의 투쟁 운동을 통해 1930년대 중반경에는 옵저버 의원인 파견 의원이 아닌, 표결권이 있는 의원 20명을 선출하는 것으로 자치권이 확대되었고 자치 의회의 권한 역시 대폭 확대되게 된다.

그러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베트남인들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을 치뤘고 자연스레 베트남 내부에서 독립 열기게 타올랐다. 1950년대 초반, 일부 과격 분자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프랑스에 반대하는 독립 무장혁명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의 독립 열기는 사그라들었지만 이 영향으로 1968년 응우옌신꿍프랑스 공산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해 비(非) 프랑스 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부총리직에 오르며 베트남인들에 대한 권리가 훨씬 더 많이 신장되었다.

1968년 68혁명과 더불어 응우옌신꿍 부총리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령 베트남은 자체적으로 식민지 총리를 선출하게 되어 사실상 독립국 또는 프랑스와 국가연합에 가까운 형태로 많은 권한을 누리게 된다. 1980년대부터는 프랑스 본토와 선거법이 달라져 프랑스령 알제리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들이 파견 의원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입법부에 의원을 선출하지 않는 대신, 자치 의회가 사실상 독립국 의회나 다름 없는 권한을 갖게 되어 베트남 역시 사실상의 독립국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까지는 빈부격차가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1974년 쥘 르브룅 총리의 "베트남 5개년 경제 정책"을 통해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베트남에 대한 아낌 없는 투자가 활발해져 현재는 명목 GDP로만 세계 9위의 경제 규모를 갖게 되는 등, 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 다음가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정치

정부 체제

명목상의 국가 원수는 프랑스 황제인 뤼시앵이지만 실질적인 행정 수반은 총독과 자치 총리이다. 총독은 프랑스 본국에서 임명하며 자치 총리는 시민들이 선출한 자치 의회의 다수당에서 배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이원집정부제나 다름이 없이 운영되고 있지만, 최근들어 총독이 비민주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총독의 권한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총독은 명목상으로는 황제가 임명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총리가 임명한다. 총리는 총독 후보자 3명을 뽑아서 의회에 추천하며, 의회는 하원에서의 투표를 통해 이중 한명을 결정한다. 이 과정을 거쳤다면 총리는 황제에게 총독 인준안을 제출하여 결재를 받고, 총독이 임명되게 된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에 속하므로, 베트남 총독은 일반적으로 은퇴하기 직전의 4선 이상 다선 하원 의원이나, 레지옹 주지사 등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중진 정치인들이 많이 역임한다. 하지만 반대로 50대 중후반에 베트남 총독이 되어 행정 능력을 보여준 다음 총리권에 도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실제로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한 아르투아르 렌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베트남 총독직을 역임한 바 있다.

총독은 1980년대 이후 점점 비대해진 자치 총리의 권한 때문에 점차 권한을 잃고 있다. 하지만 총독은 총리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도 사용되는데 총독은 자치 총리 대신 군사 통솔권을 가지며 전시 통제권 역시 가지고 있다. 또한 총리가 사임하였을때 총리 대리직을 맡으며 총리의 법안 거부권을 시정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자치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는 총독만큼이나 많은 권한을 가지며, 특히 최근에는 자치 정부 총리가 총독보다도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되는 추세다. 총독은 중앙 정부의 입법부에서 선출되는 직인데, 정작 베트남에서는 프랑스 입법부 의원에 대한 선출 권한이 없기 때문에 1970년대 개헌 이후 자치 총리를 뽑아 사실상의 이원집정부제처럼 운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총독은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되는데반해 자치 총리는로는 민의에 따른 자치 의회 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정당의 당수가 주로 선출되게 되므로,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은 총독보다 자치 총리를 더욱 신뢰한다.

자치 총리는 독자적으로 예산을 배정하고 식민지 자치 정부의 내각을 구성하며 때로는 중앙정부에서 통과시킨 법률의 한시적 거부권을 발동하거나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는 대통령제와 같은 권한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베트남 자치 총리는 레지옹 주지사는 물론이고 세네갈이나 누벨칼레도니와 같은 다른 식민지의 자치 총리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는데, 거의 대부분의 법안은 물론이고 프랑스 본토의 법률까지 거부할 수 있는 것은 베트남 자치 총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베트남 자치 총리는 내각제에서의 총리보다는 간선 대통령과도 비슷하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제왕적 권리들은 대부분이 1987년 개헌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1987년 이전의 체제를 내각제로, 1987년 이후의 체제를 대통령제로 보는 정치학자들도 적지 않다.

총독, 총리 직선제 요구

자치 총리의 권한이 내각제 국가가 아니라 대통령제 국가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지라, 몇몇 시민 운동가들은 이럴바에는 그냥 총리 직선제를 실시하거나 아니면 제왕적 권한을 가지는 자치 총리의 권한을 줄이라고 요구한다. 또한 일부 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총독 직선제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총독 직선제와 총리 직선제의 실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총독의 경우에는 어차피 군대 통솔권 빼면 그다지 권한도 없는데 굳이 돈 들여서 직선제를 해야하냐는 여론이 거세기 때문이다. 또한, 총리 직선제 역시 내각제를 선호하는 국민들이 많기 때문에 총리의 권한을 일부 부처나 입법부로 넘겨야된다는 여론이 더 많지 진지하게 총리 직선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를 반영하듯 총독 직선제의 지지율은 6.4%, 총리 직선제의 지지율은 17.3%에 불과한 반면 반대 여론은 각각 60.1%, 46.3%에 달해 직선제는 수용되기 어려운 것임을 보여줬다.

주제와는 상관 없는 얘기긴 하지만, 오히려 베트남 내에서는 총리 및 총독의 연봉을 깎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직선제를 주장하는 사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총리 직선제 관련 조사에서도 차라리 총리 연봉을 깎자는 의견이 많은데 실제로 베트남 자치 총리는 연간 3,000만 베트남 프랑의 연봉을 받는다. 이는 한화로 거의 5억원에 가까운 돈이며 프랑스 총리[1]는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 대통령보다도 연봉이 높다. 총독은 이보다 적지만 그럼에도 연간 2,500만 베트남 프랑의 돈을 챙겨서, 이 둘의 연봉에다가 추가로 지출되는 경호 및 의전 비용 등을 합치면 연간 10억원이 넘는 돈이 이 두명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도하게 혈세를 뿌리고 있다는 지적이 베트남 시민들 사이에서 많이 나온다.

의회와 정당 구도


프랑스령 베트남 자치 의회의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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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프랑스 공산당
173석
신임과 보완
베트남 민족당
18석
야당
공민단결당
150석
베트남 급진당
13석
생태민주당
8석
무소속 5석
재적 367석

한편 총리를 선출하는 자치 의회는 367명으로 구성된다. 300석은 지역구 의원으로, 67명은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정원 300석이었으나 이후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 점차 의회 내에서 비례대표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비례대표제의 도입과 상관 없이,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진보, 민족주의 성향의 프랑스 공산당과 보수, 친프랑스 성향의 공민단결당의 양당제가 지속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베트남 급진당이 중도진보 스텐스로 공민단결당과 양강 구도를 이뤘으나 1978년 전투기 개발 비리 사건이 터진 이후 몰락하여 현재는 간간히 공민단결당의 연립 여당으로만 참가하는 군소정당이 되었다.

애초에 베트남 정치 구도는 민족주의 진영 vs 친프랑스 진영인지라 정치 성향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민주사회주의, 유럽 공산주의 성향의 프랑스 공산당과 유교 보수주의 성향인 베트남 민족당의 공통점은 민족주의 단 하나밖에 없는데도 자주 연정한다. 베트남 단결당이나 공민단결당 등은 프랑스와의 연대를 조금 더 강조하는지라 몇년 주기로 공민단결당과 프랑스 공산당 사이 정권 교체가 이뤄질때마다 프랑스에 대한 정책도 전부 엎어진다. 물론 베트남 국민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응우옌신꿍이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의 후신[2]프랑스 공산당공민단결당보다 더 많이 정권을 잡았다.

아무래도 유교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아시아 국가이다보니 사회주의 vs 자유주의의 구도인 프랑스 본토보다는 정치 지형이 조금 더 보수적이다. 프랑스 공산당 베트남 지부당도 마르크스주의에는 회의적인 당원이 많고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을 많이 추구한다. 심지어 2000년대에는 기업 감세를 통한 적극적인 해외 자본 유치를 시도해서 정작 프랑스 본토의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이게 우파지 뭔 공산주의야?" 하는 반응까지 얻었다. 공민단결당 역시 제휴 관계에 있는 갈리아 민족당보다는 보수적이라서 자유보수주의,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등의 정책 등을 추구한다.

또한, 여느 동아시아 국가답게 보수가 민족주의 성향, 진보가 세계주의적 성향이 있는 유럽과는 달리 진보가 보수보다 더욱 민족주의적인 색체를 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당 모두가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띄긴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베트남 민족주의 성향이고 공민단결당은 프랑스 민족주의 성향이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중앙당이나 베트남 지부당이나 다를 것 없이 국제주의를 표방하기도 하고, 프랑스 내에서의 베트남인들의 인권 보장 정도를 주요 아젠다로 삼는지라 베트남 민족당과 같은 강성 베트남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분리 독립 요구

일부 베트남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현재까지 프랑스 제국으로부터의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정당을 창당한적도 있고 현재까지 꾸준히 선거에 참가해 2~3%정도의 득표를 받는다. 남부 지역에서는 15% 이상을 받는 선거구도 많으며 의회 진출 경험도 많은 제도권 정당이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 공산당과 공민단결당 양당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야당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신세다.

더군다나 프랑스 문화와 베트남 문화가 뭉쳐지면서 베트남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전하기도 했고 특히나 프랑스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은 프랑스와의 관계 단절을 꺼려한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베트남 독립 진영에서도 독립하더라도 프랑스와는 동맹국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정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편, 베트남 민족당이나 프랑스 공산당 등은 적극적인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으나, 베트남의 자치권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타협형 독립 운동가들은 이런 정당에서 많이 활동하기도 한다. 베트남 민족당은 1972년부터 매년 베트남 고유의 문화를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고, 베트남어나 베트남 전통 음악, 음식 등 프랑스 문화와는 별개인 베트남 민족 문화를 베트남 국민들에게 소개하는 캠페인도 진행한다. 그래서 정당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정부에게서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한 공로로 상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일부 과격 분자들은 ETA나 IRA 등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관공서 테러를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무장 투쟁은 잘 없는 편이다. 이는 현재까지 준 내전 상태로 과격 독립 무장단체와 프랑스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라오스의 몇몇 지방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1980~90년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베트남에서나 프랑스 본토에서나 군인과 경찰이 많이 파견된 덕분에 프랑스령 베트남은 일본, 싱가포르, 한국 못지 않은 동아시아 최고의 치안 안전 국가가 되기도 하였다.

경제

각주

  1. 프랑스 총리의 연봉은 18만 유로로 한화 2억 4~5천만원 정도다.
  2. 1974년 브뤼셀 공산당 대회에서 결정된 국제사회주의적 강령에 따라 대부분의 식민지 지부 공산당을 프랑스 중앙의 공산당으로 합당시켰다. 다만 조직 자체는 통합되지 않아서 사실상 간판만 바꾼거지 다른 정당이나 다름이 없어, 다시 식민지 지역 공산당을 분리시키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또한 세네갈 공산당은 당원의 56%가 합당을 반대해 현재까지 프랑스 공산당과는 별개인 자매 정당으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