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속으로
위치
파란 점선 지역

Malsupra Areo / The Bottom Area

개요

우리는 모두 하부지대를 갈망했다. 우리 모두 빛나고 완벽한 새 인생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보이드 너머 미지의 개척지들은 손에 닿지 않는 금은보화처럼 우리에게 다가왔고 힘겹고 머나먼 길을 떠날 수 있는 강력한 추력을 제공해주었다.
토머스 셰인 (2507~2550), 셰인 계 최초의 정착촌 지도자

밀키웨이은하(우리 은하)의 지역중 하나. 태양계 좌표를 기준으로 보이드(희박지대) 하부에 위치해있어서 ‘하부지대‘라고 부른다.

행성계가 없거나 희박해 워프 거점을 만들기가 몹시 힘든 보이드 하부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1회당 워프 항속거리가 100광년조차 넘지 못했던 27세기 이전에는 관측만 가능한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으나 상당한 수의 개척민들이 희생을 치르고 2530년대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역사

하부지대에 대한 관측은 이미 20세기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1세기 중반 암흑시대로 접어들고 우주 진출에 대한 기술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하였으나 보이드와 하부지대는 지속적으로 관측, 기록되었다.

하부지대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한 것은 처음 관측되고 6세기가 가까이 지난 2530년대로 카타드 가문이 장악하고 있던 하부지대 인근 행성계들의 가난한 주민들이 월경금지령을 어기고 보이드를 건너려는 ‘엑소더스’가 그 시작이었다. 이들 유랑민은 커다란 자본과 우주선을 지닌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계획하여 이주를 결정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엑소더스는 커다란 희생을 가져왔다. 초기 이들의 방식은 일단 특정 지점으로 워프한 뒤 에너지로 쓸만한 물질을 찾는 매우 위험한 도박수였다. 하지만 상당히 강압적인 편이었던 카타드 가문 아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유랑민들은 이런 무모한 방식조차 시도했으며 수십만명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이런 유랑민에 의한 초기 개척 시대를 얼어붙은 길(Frostsa Vojo)이라고 한다. 그러나 2540년대에 들어서며 유랑민들도 점차 서로 연대해나가며 유랑민집단의 크기가 커졌고 우주 개척의 ‘극지법’ 시대가 열렸다. 우선 자원을 가장 많이 실을 수 있는 우주선을 특정 지점에 워프시킨 뒤 거점으로 삼아 소형 우주선들이 임의의 지점을 왕복해 자원이 있는 곳을 찾아내어 거점을 옮기면서 조금씩 전진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무의미한 희생자를 획기적으로 줄였을 뿐더러 프로젝트가 제대로 시작된지 수개월 만인 2542년 보이드 내에서 떠돌이 행성인 아벤투로(Aventuro)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아벤투로는 유랑민들에 의해 조금씩 개발되며 ‘해방의 정거장(Stacio de Libereco)’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2610년 카타드 연방이 이곳을 점령할때까지 하부지대로 떠나는 유랑민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수행했다. 아벤투로는 한 유랑민 시인에게서 ‘얼어붙었지만 따뜻한 별’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2542년부터 2618년까지 76년간 총 9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벤투로를 통해 하부지대로 진출했고 여러 행성계에 정착했다.

하부지대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곳은 알파-1으로 하부지대에 가장 가까운 카타드 연받 소속 행성계인 뮬러본에서 약 167광년 떨어져있었으며 2536년 최초의 거주민이 생겨났다. 이후 개척민들에 의해 워프스테이션이 건조되었고 보다 손쉽게 하부지대를 개척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뒤이어 2537년, 38년에 아인롱, 셰인이 발견되어 정착촌이 만들어졌다. 다만 초기에 발견된 성계중 셰인의 환경이 가장 좋았기에 많은 개척민은 셰인 행을 택했다. 알파-1은 테라포밍이 힘들 정도로 척박한 행성들 뿐이었고 아인롱은 대기환경은 적합했으나 표면에 물이 없고 극소량의 지하수를 힘겹게 퍼내야 하는 사막행성이었다. 따라서 셰인 개척를 기준으로 삼아 카타드의 진입이 시작되는 2618년까지를 ‘무주시대(無主時代, Senposedanta Epoko)’라고 부른다. 이 시기 셰인 계의 정착민들은 토머스 셰인의 지도에 따라, 아인롱에서는 국지적으로 소규모 정착촌을 형성하였으며 대단히 아나키즘적인 사회를 구축해 나갔다. 27세기 전반기 내내 이런 사회에 대한 연구는 카타드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으나 뮬러본 정부 청사 폭파 사건 이후 일파만파 퍼져나가 카타드 연방에 혁명의 씨앗을 심었으며 훗날 세르바온 자치령의 혁명가인 마르틴 피르카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주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카타드 연방이 하부지대로 진출하자 원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당시 하부지대의 주민들은 모두 합쳐 12억명 가량이었으나 연방은 수천만명의 이주민과 군대를 이끌고 진출하였다. 원주민은 연방에 저항하였으나 조직적인 움직임이 적었던 탓에 대규모 소요사태는 2621년 전후로 잦아들었다.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저항파 원주민은 알파-1, 아인롱등 척박한 곳으로 이주하거나 무력투쟁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훗날 평화운동 결성에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