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나루미 제도 위기
나루미 제도 분쟁의 일부

라이히토 해군 함정 이츠시호와 첨관 해군 순찰함 마이루카호의 충돌 모습
날짜2001년 4월 21일~4월 23일
장소나루미 제도 인근 해역
결과

미국의 중재로 인한 라이히토의 철수, 사실상 무승부이나 첨관 측이 피해가 조금 더 많음

  • 첨관-라이히토 관계 악화
  • 라이히토 군부 영향력 감소 겸 주요인사 군부재판에 회부됨
교전국
첨관 라이히토
지휘관
  • 사카키바라 케이이치
  • 에토 칸이치
  • 아사기리 레이지
  • 카미야마 유이치로
  • 군대
  • 첨관군
  • 첨관 해양경비대
  • 라이히토 인민군
  • 병력
    8, 100명 12, 000명
    피해 규모
    사망 32명
    부상 43명
    행방불명 3명
    사망 25명
    부상 38명

    2001년 나루미 제도 위기는 2001년 4월 21일부터 4월 23일까지 일어난 나루미 제도 분쟁의 일부이다.

    발단

    과거 일본은 라이히토 섬을 처음 발견하고 나루미 제도를 발견했다. 이에 일본은 나루미 제도를 라이히토의 부속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실 나루미 제도는 첨관에 더 가까웠다. 이후 첨관이 발견되었지만 나루미 제도는 여전히 라이히토의 영토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배하며 사정이 달라졌다. 과거부터 나루미 제도가 라이히토에 있단 것을 부당하게 여긴 첨관이 국제사회에 나루미 제도는 첨관 영토라는 것을 밝혀 나루미 제도는 첨관에 넘어갔고 그곳에 살던 라이히토 인들은 가까운 히노데노 섬이나 니지노 섬으로 대피하였지만 라이히토 인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1947년 미 대통령 트루먼의 "나루미 제도는 라이히토 영토 같다."라는 실언으로 인해 첨관과 라이히토 사이는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중 일본과의 회담 도중 총리대신 모리 요시로 나루미 제도는 원래 라이히토 영토 아니냐며 왜 첨관이 살고 있냐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자 군부는 이를 수긍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계획이었다. 일본은 라이히토와 첨관 사이를 이간질하여 라이히토를 대리로 나서게 해 나루미 제도를 빼았을 작정이었던 것. 한편 영향력이 막대해 정치에도 개입할 수 있었던 군부는 결국 독단적으로 병력 1, 2000명을 출동시키고 함정 23척을 출전시켜 나루미 제도 인근 해역으로 향하게 한다.

    전개

    2001년 4월 21일 오전 12시 25분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마이루카호의 정장 히야마 슈이치는 라이히토 깃발을 단 배들이 나루미 제도로 오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경보를 울려 해군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첨관군에 함대를 출전시킬 것을 요청하고 함대가 도착하자 인민군 함대에게 "이곳은 첨관 영해이니 당장 나가시오."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라이히토 인민군 함대는 이 메시지를 무시하고 밀어내기를 시도하는 첨관의 순찰함에 몸통박치기를 시전하여 구멍을 뚫어버린다. 첨관군은 결국 발포해 그 함정을 침몰시킨다. 이에 라이히토 인민군 함대 측에서도 응사를 시작해 순식간에 2척을 격침시킨다. 포격전이 장장 7시간이나 벌어지고 일단 인민군 함대가 퇴각하자 1차 방어는 첨관군의 승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2차로 22일에 27척이 출동해 다시 첨관 영해로 들어가자 첨관군은 다시 경보를 울리고 밀어내기를 하였으나 오히려 첨관군 선박 3척을 격침당해 포격전이 다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타카다 류지 소령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결국 분노한 오토다시 히케모토 대통령이 전면전으로 이지스함을 내보내자 전세가 순식간에 뒤바뀐다. 사카키바라 케이이치 국가인민보안본부장 역시 맞대응하여 이지스함과 호위함 3척을 내보내 막상막하의 전투가 벌어지고 결국 오후 4시경 두 함대가 본영으로 퇴각한다.

    이후 23일,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 이번에는 라이히토 함대가 밀어내기 없이 바로 포격을 날렸고 제3차 포격전이 발생하나 영국, 프랑스제 함포를 가져온 라이히토 인민군이 절대적 우세를 점하고 결국 첨관군이 퇴각하고 라이히토 인민군이 추격하던 도중 미국의 이지스함이 출격하여 라이히토 인민군 측에 포격하여 이 싸움을 말리며 전투가 종결된다.

    결말

    첨관은 이에 매우 분노하였고 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등이 만들어지는 등 큰 폭풍을 몰고 왔다. 한편 스기우라 마코토 국가주석은 왜 허락도 없이 군대를 출격시켰냐며 극대노하여 사카키바라 케이이치 국가인민보안본부장을 재떨이로 두들겨 팼고, 사카키바라 역시 빡쳐서 작전기획본부장을 조지고 구타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코토 주석은 이를 몰랐음을 실토하고 엄청난 배상금과 사과를 하며 끝났다. 이후 마코토 주석은 군부의 영향력을 줄이고 사카키바라를 포함한 전투의 주역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새 국가인민보안본부장을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