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200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2008 Republic of Korea presidential election

이명박 30,661,075표 (64.6%)
(33.6%) 15,967,320표 정동영
2004년 11월 2일
2004년 선거
2008년 11월 4일
2008년 선거
2012년 11월 6일
2012년 선거
투표율 66.95%
투표자 수 47,458,944표
선거 일시 2008년 11월 4일 6시 ~ 18시
선거 결과
정당 및 지도부 민주당
대통령 정동영
부통령 노웅래
공화당
대통령 이명박
부통령 김황식
득표수
33.64%
15,967,320표
64.61%
30,661,075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공화당
이명박 김황식

개요

대한민국의 12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8년 11월 4일에 실시 되었고, 2000년대에 치뤄진 마지막 대선이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득표율 30.97%p, 득표차는 14,693,755표로 양당체제 출범 이후 현재까지 최다 득표차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네 번째 정권 교체를 이루게 되었다. 득표수와 득표율 차이 모두 2008년 대통령 선거가 최고치이다. 투표율은 67%로 평균 수준을 기록했다.

노무현 정부 후반에서 말기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와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 그리고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대침체로 인해 여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공화당에서는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임기 7년 차에는 대통령 지지율이 10%대까지 하락하기도 했었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다 여권에 대한 실망감까지 더해져 민주당2006년 중간선거를 포함한 모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과반 의석이 붕괴되었다. 대선 참패를 느낀 민주당 의원들은 개혁파인 임종인, 천정배 의원을 시작으로 조기 경선 실시를 주장했다. 당시 민주당 내 보수파의 영수 격 인물이었던 김한길과 그를 따르는 초재선 의원들을 주축으로 중도개혁통합모임, 중도통합모임 등을 따로 당내에 차려 당의 권력 집중을 방해하며 민주당 내부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두 차례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정동영 전 장관과 하원의장을 지낸 문희상, 김근태 의원도 새로운 모임에 가담함으로서 기존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계파 대통합을 주장하며 하나로 합쳐진 모임은 민주당의 한자리수 지지율로 응대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는 차별적이고 안정적인 행보로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여권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현직 부통령인 고건마저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여권에서는 박근혜, 이명박 대세론을 뒤집을만한 여력을 가진 뚜렷한 유력 대권주자 없이 정동영(전 주택도시개발부장관), 손학규(전 경기부지사), 이해찬(전 부통령), 유시민(전 보건사회복지부장관) 등이 최종경선에 참여했고 지지율과 조직력 측면에서 앞서있던 정동영이 승리함에 따라 여권의 대권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야당인 공화당이명박박근혜의 치열한 경선 끝에 이명박이 승리를 거머쥐어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경선과정

공화당

공화당은 박근혜 전국위원회 의장 취임 이후 2004년 총선[1]에서 217석의 기적을 이룬 후 2005년 재보궐선거를 시작으로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2006년 중간선거는 그 화룡점점으로 이를 시작으로 민주당은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공화당은 계파와 관계 없이 박근혜 의장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명박은 8년의 서울특별시장 임기 동안 청계천 복원과 시내버스 체계 전면 개편 등 굵직한 사업을 성공시켜 대권후보로 거론되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 내 경쟁을 치열했다. 초반에는 박근혜 피습 사건 와중에도 충청은요? 한 마디로 2006년 중간선거에서 충청권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끈 박근혜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시 공화당에 있어 박근혜는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고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였기 때문.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공화당이 부진한 성적을 내면서 박근혜는 또 한번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박근혜는 당헌당규상 전국위원회 의장과 하원의장직을 겸할 수 없는 조항에 따라 2006년 12월 전국위원회 의장직을 사퇴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은 친박으로 분류되던 강재섭이었고, 박근혜가 전면에 나선 선거였기에 그 책임론까지 덤터기 써버린 것.

아울러 공화당 내부에서도 전략적으로 수도권 후보론, 경제 후보론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우선 수도권 후보론은 표가 많은 수도권을 정치적 근거지로 하는 인물을 내보내 수도권의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동남권은 여론조사 상으로 몰표가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경상 기반의 박근혜보단, 역시 경상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상원의원을 한데다가 서울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명박을 내보내는 것이 총 득표에 유리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동남권이야 어차피 누가 되더라도 받는 표가 거진 동일할 테니, 경제 후보론은 당시 노무현 정부의 경제 실정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출발해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거쳐 서울시장으로서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이명박이 본선에 더 유리하다는 논리였다. 때문에 이명박은 747 공약[2]을 내걸어 경제 공약을 강조했고, 이를 의식한 듯 줄푸세[3] 공약을 내걸며 맞섰다.

당시 상황은 당내 지지도는 박근혜가 앞섰고, 이명박은 서울시장 시절의 성공적인 시정 덕분에 여론조사 지지율이 앞선 상태였다. 둘의 우세한 분야가 다르고 정도도 비등해서 경선 룰에 따라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이 때문에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가 엄청났는데, 이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둘의 비리는 이때 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란 약점은 모조리 들춰내어 공격하였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발언들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명박이 50.4%를 얻어 49.6%의 박근혜를 0.8%p 차이로 따돌리며 접전 끝 승리를 거뒀다.

결과

공화당 2008년 대통령 후보 경선 결과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명박(李明博) 2,759,159 1위
공화당 50.4% 당선
2 원희룡(元喜龍) 6,316 3위
공화당 0.0% 낙선
3 박근혜(朴槿惠) 2,720,261 2위
공화당 49.6% 낙선
4 홍준표(洪準杓) 387 4위
공화당 0.0% 낙선
세부 결과
공화당 2008년 대통령 후보자 경선 세부 결과
투표일 지역 당원 수 투표율 이명박 원희룡 박근혜 홍준표 합계
8월 2일 전라 293,927 79.3% 120,141 (51.6%) 1,111 (0.5%) 111,581 (47.9%) 139 (0.0%) 232,972
8월 3일 충청 310,954 82.6% 102,271 (39.8%) 1,026 (0.4%) 153,179 (59.7%) 248 (0.0%) 256,724
1주차 누계 604,881 81.0% 222,412 (45.4%) 2,137 (0.4%) 264,760 (54.1%) 387 (0.0%) 489,696
8월 9일 경상 502,762 93.4% 162,305 (34.6%) 2,019 (0.4%) 305,072 (65.0%) 사퇴 469,396
8월 10일 동래 644,333 81.2% 255,273 (48.8%) 2,160 (0.4%) 265,789 (50.8%) 523,222
2주차 누계 1,751,976 84.6% 639,990 (43.2%) 6,316 (0.4%) 835,621 (56.4%) 1,482,314
8월 17일 의주 224,415 91.4% 101,338 (49.4%) 사퇴 103,853 (50.6%) 205,191
함경 353,536 81.2% 143,089 (49.8%) 144,135 (50.2%) 287,224
8월 18일 평안 372,434 84.2% 151,272 (48.2%) 162,404 (51.8%) 313,676
황해 354,047 71.5% 121,517 (48.0%) 131,637 (52.0%) 253,154
3주차 누계 3,056,408 83.2% 1,157,206 (45.8%) 1,377,650 (54.2%) 2,541,559
8월 24일 서울 904,386 91.5% 466,190 (56.4%) 361,113 (43.6%) 827,303
8월 25일 경기 971,493 83.9% 412,779 (50.6%) 402,543 (49.4%) 815,322
강원 250,866 81.4% 101,866 (49.9%) 102,436 (50.1%) 204,302
4주차 누계 5,183,153 84.5% 2,138,041 (48.8%) 2,243,742 (51.2%) 4,381,783
8월 26 ~ 28일 여론조사 득표환산 - 621,118 (56.5%) 476,519 (43.5%) 1,097,637
최종 결과 2,759,159 (50.4%) 6,316 (0.0%) 2,720,261 (49.6%) 387 (0.0%) 5,479,420

민주당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은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으며, 정권교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유행어로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가 있다. 게다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2006년 중간선거의 참패로 인해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는 중에도 여권에서도 유력후보는 존재했으니, 그는 바로 고건 부통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 쳤을 때, 대외에 노무현 대통령 대신 참석하면서도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넓은 계층에게 인정받으며 초창기 모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직설적인 화법의 소유자도 아닌지라 논란이 될 발언을 한 적도 없었다. 정치인이 아닌 전형적인 관료형 인물이었기 때문에 보수, 진보 양쪽에서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성과가 신통치 않았는지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런 배경은 훗날 정계에서 은퇴한 뒤 밝혔는데, 야당에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민심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호남 출신임과 동시에 노무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과 집권여당의 낮은 지지율로 국민적인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고 다고 판단하여, 대선 도전은 포기했다고 밝혔다. 이로서 여당의 대권후보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만다.

그나마 유력 후보라 할 만한 사람은 정동영과 김근태 정도인데 이 두 사람은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인데다 두 후보 모두 여러 선거에서의 참패 책임이 있었다. 그나마 김근태는 전국위원회 의장을 맡지는 않았지만 특히 정동영의 경우 2006년 중간선거 당시 하원 의장으로서 대참패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유력 후보군들로는 이해찬 전 부통령, 한명숙 전 내무부 장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있었다. 셋 다 내각 출신인데, 유력 대권주자가 없자 대통령과 경무대가 당 내 중진 및 신임하는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시켜 무게감을 더해주려는 배려였다.

당 상황이 개판이 되고 당 내 후보군이 다 상처투성이인 상황에서 김한길계는 범여권 재편을 목적으로 당시 민주당 내의 주류였던 연합 코커스 탈퇴를 결행, 중도개혁통합모임을 창설했고, 이를 신호탄으로 대선후보군을 포함한 현역 의원 상당수의 연쇄 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도개혁통합모임측과 손학규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 탈당파가 민주당에 입당하며 여기에 합류하였으며 결국 연합 코커스의 인사들 대부분이 여기에 가입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당내 지지기반은 완전히 사라졌다.

중도개혁통합모임은 당시 전국위원회 의장이던 정세균 의원에게 빠른 경선을 요구했고, 정세균 의장이 이른 경선을 승인하면서 바로 대선후보 경선에 착수했다. 이게 2007년 7월의 일로, 대선을 무려 1년 4개월이나 앞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후보들 상태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엄청난 수의 후보가 쏟아져나와 컷오프를 해야 했다. 중도개혁통합모임의 지지를 받은 정동영, 공화당 탈당파로서 인지도나 긍정적 측면에서 우월했던 손학규, 구 연합 코커스와 친노계의 집중 지원을 받은 이해찬이 범여권 Big3으로 불렸으며, 친노계에선 추가로 한명숙 전 내무부 장관과 유시민 전 보건사회복지부장관, 김두관 전 국토안보부 장관이, dj계 국민의 코커스에선 추미애 전 의원이, 그리고 전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이었던 신기남 의원과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까지 9명이 출마했다. 다른 유력 후보들이였던 김근태와 정세균 의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8월 27일 컷오프에서 추미애, 천정배, 신기남, 김두관 4인이 탈락한다. 이후 시작된 본선 경선에서는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차례대로 후보직을 사퇴하며 같은 친노계인 이해찬을 지지했다. 결국 남은 빅3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니고 있던 정동영이 후보로 선출된다. 손학규는 공화당 탈당파라서 당 내 조직력이 너무 미약했고 애시당초 탈당을 함께 한 동반자들도 거의 없었으며, 이해찬은 유시민, 한명숙의 지원을 받았지만, 친노계 후보였기에 배척받았다.

심지어 대선을 16개월 앞둔 경선을 흥행시키겠다고 당원투표와 여론조사를 5대5로 반영하는 경선룰이 당시 당권을 잡고있던 중도개혁통합모임에서 날치기 되자, 친노계의 강한 반발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흥행하지 못했다.

결과

민주당 2008년 대통령 후보 경선 결과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유시민(柳時敏) 403,180 4위
민주당 무효 사퇴
2 손학규(孫鶴圭) 2,106,072 2위
민주당 37.4% 낙선
3 정동영(鄭東泳) 2,235,350 1위
민주당 39.7% 당선
4 이해찬(李海瓚) 1,292,128 3위
민주당 22.9% 낙선
세부 결과
민주당 2008년 대통령 후보자 경선 세부 결과
투표일 지역 당원 투표자 (투표율) 유시민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9월 1일 동래 817,811 487,541 (59.6%) 111,958 (23.0%) 134,508 (27.6%) 124,461 (25.5%) 116,614 (23.9%)
전라 833,001 523,766 (62.9%) 60,162 (11.5%) 111,335 (21.3%) 242,262 (46.3%) 110,007 (21.0%)
9월 2일 충청 612,014 306,380 (50.1%) 39,920 (13.0%) 60,334 (19.7%) 145,841 (47.6%) 60,285 (19.7%)
경상 244,315 93,343 (38.2%) 10,528 (11.3%) 55,030 (59.0%) 11,008 (11.8%) 16,777 (17.9%)
9월 3 ~ 5일 1차 여론조사 득표환산 1,411,030 180,612 (12.8%) 515,026 (36.5%) 472,695 (33.5%) 242,697 (17.2%)
1주차 누계 2,507,141 1,411,030 (56.3%)
(합산 2,822,060)
403,180 (14.3%) 876,233 (31.0%) 996,267 (35.3%) 546,380 (19.4%)
9월 8일 경기 1,032,379 430,379 (41.7%) 사퇴 183,587 (42.6%) 170,025 (39.5%) 76,767 (17.9%)
강원 287,421 107,422 (37.4%) 32,359 (30.1%) 32,311 (30.1%) 42,752 (39.8%)
9월 9일 황해 455,204 173,001 (38.0%) 61,958 (35.8%) 75,224 (43.5%) 35,819 (20.7%)
9월 10 ~ 12일 2차 여론조사 득표환산 710,802 296,404 (41.7%) 267,972 (37.7%) 146,426 (20.6%)
2주차 누계 4,282,145 2,121,832 (49.6%)
(합산 4,243,664)
403,180 (9.5%) 1,450,541 (34.2%) 1,541,799 (36.3%) 848,144 (20.0%)
9월 15일 평안 887,608 489,591 (55.2%) 사퇴 187,525 (38.3%) 201,850 (41.2%) 100,216 (20.5%)
의주 294,683 82,308 (27.9%) 35,160 (42.7%) 34,117 (41.4%) 13,031 (15.9%)
함경 244,789 82,204 (33.6%) 20,464 (24.9%) 31,766 (38.6%) 29,974 (36.5%)
9월 16일 서울 1,142,430 242,430 (21.2%) 63,631 (26.2%) 120,997 (49.9%) 57,802 (23.9%)
9월 17 ~ 19일 3차 여론조사 득표환산 896,533 348,751 (38.9%) 304,821 (34.0%) 242,961 (27.0%)
3주차 누계 6,851,655 3,018,365 (44.1%)
(합산 6,036,730)
403,180 (6.8%) 2,106,072 (34.8%) 2,235,350 (37.0%) 1,292,128 (21.4%)
최종 결과 5,633,550 사퇴 2,106,072 (37.4%) 2,235,350 (39.7%) 1,292,128 (22.9%)

본선

야권도 여권도 치열한 경선과정을 거치며 힘겹게 후보를 선출했지만, 노무현 정부 말기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에 힘입어 정권교체는 기정사실화 되어갔고 노무현 정부의 국정실패와 민주당내 빈약한 인재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결과 정권교체의 주인공은 이명박이었다. 당시 화두였던 경제회복을 전면에 내세우며 승세를 이어갔다. 반면 민주당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지지율을 보이며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오히려 출마도 하지 않았던 이회창 전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밀리면서 안습한 구도만 계속 이어졌다.[4]

본선에서도 어김없이 이명박의 BBK의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이명박은 경제를 강조하는 마이페이스 노선을 걸어갔고 지지율 순위가 뒤집어지는 일은 없이 결국 아래의 개표 결과까지 이어지게 된다.

극단적인 선거운동의 차이

워낙 당 및 후보 지지율이 낮게 나와서 그런지 몰라도 민주당과 정동영 후보측은 안 그래도 불리한 선거를 더 불리하게 만드는 무조건적인 네거티브 전략으로 나섰다. 물론 선거운동이 이상적으로 무조건 포지티브하게 갈 수 만은 없고 어느 정도 네거티브가 필요하긴, 하지만 정동영 캠프의 문제는 아예 포지티브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동영 캠프의 대선 CF는 정동영이 어떤 사람이고 뭘 하겠다가 아니라, 이명박은 이러이러해서 안 되는 나쁜 사람이니 지지율 2위인 정동영을 찍어달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심지어 TV로 나가는 지지자 찬조연설도 공화당계 인사인 이장춘을 영입하여 이명박이 나에게 BBK 명함을 직접 줬다며 BBK 공격으로만 활용하여 국민들에게 어필을 했지만 지지율은 요지부동이었다.

반대로 이명박과 공화당 캠프는 아주 정석대로 포지티브하게 선거전략을 짰다. 이명박의 대선 홍보 영상은 시장 국밥집에서 이명박이 국밥을 먹으며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과 함께 일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듣는 영상이었다. 이는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서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광고였다. TV 방송된 지지자 찬조연설은 부산의 20대 대졸 취준생가는 데마다 원서써도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취업할 길이 없다며 경제를 살려 나같은 사람들 취직 좀 잘 되게 해달라 애원하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런 걸 제치더라도 정동영의 TV광고는 주로 본인의 과거사를 통해 감성을 전달하는데 그쳤을 뿐, 비전이나 공약을 전혀 전달하지 못했기에 광고 대결은 이명박의 압승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광고와 더불어 대선 운동의 모범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상 네거티브의 전략은 '이명박 vs 안티 이명박'의 구도로 굳혀졌는데, 어찌되었든 주인공은 이명박이라 관심은 이명박에게 쏠리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덕분에 안티 하나라도 더 만드려다 중도층의 표는 이명박에게 기울어져 결과적으론 민주당의 자멸로 끝나버린 전략이 되고 말았다.

출구조사

집단
투표자 대비 비중
공화당 민주당
권역별
북부
33%
62% 36%
중부
34%
65% 32%
남서부
15%
61% 37%
남동부
18%
70% 29%
거주지역
도시
46%
60% 37%
근교
33%
61% 33%
시골
21%
78% 20%
성별
남성
51%
65% 32%
여성
49%
62% 35%
연령
18 - 24
10%
68% 26%
25 - 29
10%
64% 29%
30 - 39
21%
54% 41%
40 - 49
21%
59% 37%
50 - 64
20%
67% 30%
65 -
18%
68% 27%
교육
고졸 이하
23%
78% 18%
대학 재학&휴학&중퇴
21%
54% 42%
준학사 학위
9%
68% 28%
학사 학위
36%
64% 32%
석, 박사 및 전문학위
11%
52% 46%
연 소득
~ 2,000만 원
43%
71% 24%
2,000 ~ 3,999만 원
30%
62% 34%
4,000 ~ 5,999만 원
15%
57% 41%
6,000 ~ 7,999만 원
7%
52% 44%
8,000 ~ 10,000만 원
3%
48% 49%
10,000만 원 ~
2%
45% 52%
결혼 여부
기혼
65%
68% 28%
미혼
35%
55% 42%
이념
자유주의
14%
10% 86%
중도주의
47%
57% 38%
보수주의
39%
91% 7%
소속 정당
공화당
20%
98% 1%
민주당
32%
27% 68%
무당파
48%
72% 25%
2004 대선 당시
노무현에 투표
41%
24% 70%
이회창에 투표
40%
97% 1%
다른 후보에 투표
1%
68% 23%
투표 안했음
18%
72% 24%
노무현 대통령 지지도
지지한다
16%
8% 89%
지지하지 않는다
79%
78% 20%
다음 세대 한국인의 삶은
더 좋아질 것이다
38%
67% 30%
더 나빠질 것이다
41%
65% 32%
비슷할 것이다
21%
55% 42%
주택소유자별
무주택
49%
47% 50%
1주택
39%
79% 17%
다주택
12%
84% 14%
투표시 제일 중요한 사안
경제
72%
72% 25%
치안
6%
64% 32%
복지
22%
34% 62%
국가 경제 상황
좋다
24%
24% 70%
나쁘다
76%
76% 22%

개표 과정

결과

투표 결과
후보자 정동영 이명박
전국 득표수 15,967,320표 30,661,075표
전국 득표율 33.64% 64.61%
당선인
이명박

선거 결과 요약

세부 결과

부별 선거 결과
민주당 공화당 비고
서울특별시
(중부)
정동영
2,200,231표
32.71%
이명박
4,347,088표
64.63%
공화당 획득
경기부
(중부)
정동영
2,402,886표
32.87%
이명박
4,704,754표
64.36%
공화당 획득
황해부
(북서부)
정동영
1,462,032표
35.15%
이명박
2,604,750표
62.63%
공화당 획득
평안부
(북서부)
정동영
2,064,710표
38.71%
이명박
3,249,032표
60.91%
공화당 획득
의주부
(북서부)
정동영
970,884표
35.62%
이명박
1,723,447표
63.23%
공화당 획득
함경부
(북동부)
정동영
1,203,471표
35.00%
이명박
2,194,700표
63.82%
공화당 획득
강원부
(북동부)
정동영
499,506표
26.14%
이명박
1,362,311표
71.29%
공화당 획득
전라부
(남서부)
정동영
1,723,690표
43.38%
이명박
2,206,422표
55.52%
공화당 획득
충청부
(남서부)
정동영
978,331표
30.16%
이명박
2,204,735표
67.97%
공화당 수성
경상부
(남동부)
정동영
909,500표
26.04%
이명박
2,522,981표
72.22%
공화당 수성
동래부
(남동부)
정동영
1,552,079표
30.18%
이명박
3,540,855표
68.84%
공화당 획득
중부 정동영
4,603,117표
32.80%
이명박
9,051,842표
64.49%
공화당 획득
북서부 정동영
4,497,626표
36.81%
이명박
7,577,229표
62.01%
공화당 획득
북동부 정동영
1,702,977표
31.83%
이명박
3,557,011표
66.49%
공화당 획득
남서부 정동영
2,702,021표
37.44%
이명박
4,411,157표
61.12%
공화당 획득
남동부 정동영
2,461,579표
28.50%
이명박
6,063,836표
70.21%
공화당 수성

선거 통계

각주

  1. 2004년 당시 박근혜 대표는 하원의원이자 전국위원회 의장이었다.
  2. 7% 경제성장률,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강국
  3. 세금을 이고, 규제를 고, 법질서를 우자
  4. 이게 심각한 이유는 이회창 전 대통령은 IMF를 불러온 무능의 대통령으로 낙인 찍힌 상황이었던데다 2000년, 2004년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