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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성 ===
=== 형성 ===
그러나 라이히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14세기 가고시마에서 살던 어부 가족이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여 이 섬에 도달하여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놀란 어부는 다이묘를 찾아가 거대한 섬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에 다이묘 역시 놀라 쇼군에게 이를 보고하고, 그리하여 쇼군의 명을 받은 17명의 개척단이 어부를 앞세워 섬을 찾아간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섬은 크지 않았고, 어쨌든 섬을 발견한 개척단들은 일출 때 이섬을 발견했다고 하여 큰 섬은 히노데노라는 이름을 붙이고, 중간 크기의 섬은 늦게 발견하여 아침 때 발견했다 하여 아사노 섬이라고 명명하고, 작은 섬은 무지개가 뜰 때 발견했다 하여 니지노 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후 쇼군은 개척단의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여기에 70명 정도의 인구와 다이묘를 파견하여 라이히토가 형성되고,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17세기에 정씨 왕조에서 12명 정도의 피난민들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도주하여 어쩌다가 이곳으로 도착하여 대만인들도 살게 되었다.
그러나 1850년대 이곳에서 다이묘가 너무 심하게 핍박하자, 결국 첨관의 소식을 들어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참다못해 맨주먹으로 맞서고 희생들을 치룬 끝에 다이묘를 쳐죽이고 히노덴 왕국을 선포한다. 그렇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 질질 끌다가 국가로 인정을 했지만, 곧이어 병력을 상륙시켜 헌병들이 많은 민간일들을 학살하고 결국 첨관처럼 일제 강점기가 되버린다.
=== 라이히토의 일제 강점기 ===
물론 말이 나빠서 일제 강점기지. 원래는 일본의 자치령 수준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인 카토 이치로를 불러와 총독 자리에 앉힌다. 이치로는 라이히토에 파견된 일본군 중위 출신의 엘리트로, 청일전쟁 당시 해전에서 매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치로는 곧바로 헌병들을 파견해 포로가 된 과거 히노덴 왕국군들을 모아 동료들을 쳐죽이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렇게 죽은 포로들의 머리를 따고 몸통은 개복한 뒤 머리는 효수하고, 몸통은 장기를 뺀 뒤 나무에 걸어놓는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해 히노덴 왕국 국민이었던 이들에게서 원성이 높았다.
[[파일:일본군의 시위 진압.jpg|280px|섬네일|일본군의 시위 진압]]
이러한 이치로의 만행들에 분노한 국민들은 독립을 인정하라는 시위를 벌였으나,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총소리 뿐이었다. 발포를 지시한 이치로의 부관 시노다 조장은 시위대를 즉결 처분하고 고유 문자를 탄압, 세뇌교육 등 전형적인 일본군의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집을 박차고 나온 젊은이들은 진작에 나온 중년들을 찾아가 해방군을 결성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파일:라이히토 해방군.jpg|280px|섬네일|해방군의 모습.]]
한편 해방군을 결성한 자들은 국내에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이와쿠 후마와 스기우라 이츠시라는 젊은이들이 1931년 장제스에게서 군자금을 받아와 질이 상승한다. 이에 해방군은 본격적으로 아사노 섬으로 진공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전원 수복은 실패했지만 40% 수복을 성공시키며 유종의 미는 거두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군에게 화력전과 게릴라전을 교묘히 섞어가며 싸우던 해방군은 수복할 지역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하...였지만 희생이 만만치 않아 소비에트 민정청 전까지 전원 수복하기에는 실패한다.
[[파일:225B9F395908916C06.jpg|280px|섬네일|히노데노 섬에서 싸우던 중 일본군의 지뢰가 폭발한 모습]]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사실상 온 주민들이 해방군에 가까웠는데, 오죽하면 한 부락이 해방군 기지가 되어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전선에 직접 참전하여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 매우 맹렬히 싸워 한 미군은 이렇게 술회했다.
{{인용문|마치 여러 마리의 맹수들을 보는 듯 하였다. 내가 지금 바다에 있는지 밀림에 있는지 구별이 안 되었다.}}
전쟁 종결 이후, 카이로 회담에 따라 일본 제국에게서 독립한 라이히토는 미국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소련이 점령하여 이는 라이히토가 친러 국가<ref>물론 미국과 안 친한 건 아니다. 자세한 건 후술.</ref>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으며,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영향을 미친다.
=== 독립 ===
[[파일:Images.jpg|280px|섬네일|1대 인민회의에서 헌법을 정하는 모습.]]
독립은 1954년으로 헌법을 정하고 11월 24일에 독립했다.
=== 각주===

2021년 7월 23일 (금) 21:00 판

라이히토 인민공화국
萊仁人民共和國
국기 국장
위대한 지배자의 라이히토
偉大な支配者のライヒト
상징
국가 빛이 나는 사람들
국조
솔개
국화
풍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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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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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

  • 소비에트 민정청 1944년 4월 2일
  • 제헌절 1954년 8월 12일
  • 독립 1954년 11월 24일
  • 내전 1972년 3월 17일
  • 내전 종결 1983년 1월 8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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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하츠미 도
최대 도시
류케이치 도
면적
162. 226km²
내수면 비율
3%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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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2,103, 310명
밀도
116명/km2
인종
라이히토인 42%, 첨관인 35%, 일본인 15%, 한국인 5%, 기타 3%
출산율
0. 87명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일본 벤(사투리)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영어
종교
국교
국교 없음(국가 무신론)
분포
무종교 67%, 불교 21%, 토착 신앙 10%, 기타 2%
군대
라이히토 인민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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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
2부
6시
12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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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공산주의, 다당제, 단원제
민주주의 지수
5.42점(혼합적 체제)
국가 원수 (국가인민주석
당 위원장)
스기우라 뱌쿠야
정부
요인
당 총비서
미야마 코우지
라이히토 인민회의 의장
타야마 노부아키
내각 총리
야마오카 마사루
국가인민보안본부장
쿠제 류노스케
국가외무성장 겸 총서기
히로세 타츠야
여당
라이히토 인민당
원내 야당
행복인민당, 라이히토 사회민주당, 내부위원회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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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 체제
GDP
(PPP)
전체 GDP
$2조 891억
1인당 GDP
$65, 074
GDP
(명목)
전체 GDP
$1조 9480억
1인당 GDP
$59, 893
무역
수입
$1천 463억
수출
$2천 5230억
외환 보유고
$6천 104억
신용 등급
무디스 B+
S&P B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라이히토 엔 (RE¥)
ISO 4217
RE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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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 +7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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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63년
북한: 1954년
UN 가입
1957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조로1가길 빌딩 7층
ccTLD
.re
국가 코드
391, RE, REC
전화 코드
+37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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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전 지역[1]



라이히토 인민공화국(일본어: 萊仁人民 共和國 라이히토 진민쿄오와코쿠[*], 영어: People's Republic of Reichto 피펄즈 리퍼블릭 오브 라익토우[*])은 동중국해 해상에 위치한 도서국가이다. 지구상에 얼마 없는 공산주의 국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주석의 임기는 죽기 전까지이다. 수도는 하츠미 도이고 최대도시는 류케이치 도, 영토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의 라이히토는 일본 패망 직후 소련이 발빠르게 점령하여 군정을 세워 통치했다가 1944년에 독립했다. 첨관과는 달리 정세를 따라 일본계임을 자부하고 있지만 영토분쟁도 있는 편이다. 대만과 매우 친하여 대만과 일본, 러시아의 경제 지원으로 선진국이며, 경제 성장이 더뎠지만 시장 경제를 빠르게 도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몰락의 위기를 벗어났다. 군사력도 강력하며 대기업들보다는 중소기업 위주로 경제가 돌아가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통화는 라이히토 엔으로 한화 약 2500원이며, 3달러의 가치를 지녔다.

타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국민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며 선거는 치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주석들이 딱히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아니라서 혼합형 체제라는 점수를 가졌다. 현 국가주석은 명군이라 불리는 스기우라 마코토의 3째 아들인 스기우라 뱌쿠야다.

국호

나라 이름의 경위가 조금 웃긴데, 원래 이 나라 이름을 지을 때 스기우라 이츠시는 빛나는 나라라는 뜻을 짓기 위해 국명을 빛, 즉 라이트(Right)로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츠시의 집안이 미국에서 살았다곤 하였지만 가난하여 학교도 중졸이였다. 물론 중졸이어도 라이트 정도는 쓸 줄 알겠지만, 이츠시는 독립운동 탓에 그 단어를 까먹어 결국 어감대로 작성, 그리하여 라이트(Right)가 아닌 라이히토(Reichto)로 작성하였다는 어이없는 이야기... 참고로 영어로는 라익토우, 한자로는 라이렌련이라고 발음한다.

역사

선사 시대

기원은 오키나와와 타이완 섬에서 건너온 인구로 추측되며, 부족국가를 이뤄 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는 등 상당한 문화를 자랑했으며 특유의 문화로는 가축을 신처럼 모시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 이유를 추측하자면 본인들 태어나기도 전에 생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또한 뼈조각을 모아놓고 괴상한 물품을 만들었는데, 용도는 제사용 제단이거나, 그냥 악취미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이후 문화가 발달하자 전쟁이 일어나 결국 자멸했다.

형성

그러나 라이히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14세기 가고시마에서 살던 어부 가족이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여 이 섬에 도달하여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놀란 어부는 다이묘를 찾아가 거대한 섬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에 다이묘 역시 놀라 쇼군에게 이를 보고하고, 그리하여 쇼군의 명을 받은 17명의 개척단이 어부를 앞세워 섬을 찾아간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섬은 크지 않았고, 어쨌든 섬을 발견한 개척단들은 일출 때 이섬을 발견했다고 하여 큰 섬은 히노데노라는 이름을 붙이고, 중간 크기의 섬은 늦게 발견하여 아침 때 발견했다 하여 아사노 섬이라고 명명하고, 작은 섬은 무지개가 뜰 때 발견했다 하여 니지노 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후 쇼군은 개척단의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여기에 70명 정도의 인구와 다이묘를 파견하여 라이히토가 형성되고,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17세기에 정씨 왕조에서 12명 정도의 피난민들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도주하여 어쩌다가 이곳으로 도착하여 대만인들도 살게 되었다.

그러나 1850년대 이곳에서 다이묘가 너무 심하게 핍박하자, 결국 첨관의 소식을 들어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참다못해 맨주먹으로 맞서고 희생들을 치룬 끝에 다이묘를 쳐죽이고 히노덴 왕국을 선포한다. 그렇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 질질 끌다가 국가로 인정을 했지만, 곧이어 병력을 상륙시켜 헌병들이 많은 민간일들을 학살하고 결국 첨관처럼 일제 강점기가 되버린다.

라이히토의 일제 강점기

물론 말이 나빠서 일제 강점기지. 원래는 일본의 자치령 수준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인 카토 이치로를 불러와 총독 자리에 앉힌다. 이치로는 라이히토에 파견된 일본군 중위 출신의 엘리트로, 청일전쟁 당시 해전에서 매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치로는 곧바로 헌병들을 파견해 포로가 된 과거 히노덴 왕국군들을 모아 동료들을 쳐죽이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렇게 죽은 포로들의 머리를 따고 몸통은 개복한 뒤 머리는 효수하고, 몸통은 장기를 뺀 뒤 나무에 걸어놓는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해 히노덴 왕국 국민이었던 이들에게서 원성이 높았다.

일본군의 시위 진압

이러한 이치로의 만행들에 분노한 국민들은 독립을 인정하라는 시위를 벌였으나,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총소리 뿐이었다. 발포를 지시한 이치로의 부관 시노다 조장은 시위대를 즉결 처분하고 고유 문자를 탄압, 세뇌교육 등 전형적인 일본군의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집을 박차고 나온 젊은이들은 진작에 나온 중년들을 찾아가 해방군을 결성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해방군의 모습.

한편 해방군을 결성한 자들은 국내에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이와쿠 후마와 스기우라 이츠시라는 젊은이들이 1931년 장제스에게서 군자금을 받아와 질이 상승한다. 이에 해방군은 본격적으로 아사노 섬으로 진공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전원 수복은 실패했지만 40% 수복을 성공시키며 유종의 미는 거두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군에게 화력전과 게릴라전을 교묘히 섞어가며 싸우던 해방군은 수복할 지역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하...였지만 희생이 만만치 않아 소비에트 민정청 전까지 전원 수복하기에는 실패한다.

히노데노 섬에서 싸우던 중 일본군의 지뢰가 폭발한 모습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사실상 온 주민들이 해방군에 가까웠는데, 오죽하면 한 부락이 해방군 기지가 되어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전선에 직접 참전하여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 매우 맹렬히 싸워 한 미군은 이렇게 술회했다.

마치 여러 마리의 맹수들을 보는 듯 하였다. 내가 지금 바다에 있는지 밀림에 있는지 구별이 안 되었다.

전쟁 종결 이후, 카이로 회담에 따라 일본 제국에게서 독립한 라이히토는 미국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소련이 점령하여 이는 라이히토가 친러 국가[2]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으며,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영향을 미친다.

독립

1대 인민회의에서 헌법을 정하는 모습.

독립은 1954년으로 헌법을 정하고 11월 24일에 독립했다.

각주

  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경보
  2. 물론 미국과 안 친한 건 아니다. 자세한 건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