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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 청한 의 초대 국왕
| | 청한의 초대 국왕 |
| ==초기 생애== | | ==초기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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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은 달구벌 (훗날 대구광역시)출신이었으며 당시 초기 기록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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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3차 대야성 전투에 젊은 나이에 참가하였으니 패배 하고 견휜군에게 쫒겨 강원도 동계까지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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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4년 발해로 들어가 부장이 되었으며 발해 말대 국왕 대인선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에 소규모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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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5년 발해가 멸망하자 1만명의 유민을 이끌고 요동 남쪽에 있는 청한도로 이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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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하 하면서 요동 남쪽 부분에 서장자 인혜공에게 군대를 주고 잠시 요동 이남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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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4년후에 거란이 남하하면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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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기간=== |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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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한도에 도착한지 3개월만에 대장군 송벽,승상 홍의벽,발해의 여러 귀족들이 왕으로 추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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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청한도의 본래 왕조의 청한 왕실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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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35년 동안 당시 능동적인 외교로 후진과 책봉관계를 수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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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진이 멸망하고 후한,후주 뒤를 이은 북송과도 계속 조공을 바쳐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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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국과 외교관계를 현실적인 이유로 시행하고 요나라로 칭제한 후에는 조공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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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후발해,정안국등 수많은 지원요청이 있었으나 그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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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발해와의 연관을 끊을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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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국호 발해를 하지 않고 청해로 한 이유가 거란국과의 외교분쟁을 일으키지 않을려고 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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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치에서는 청한도 원주민과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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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청한도 원주민을 야인으로 부르며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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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민들의 침략에 수도가 3번이나 함락당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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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태조 말년에는 유화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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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발해유민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며 외부는 여러 제국들의 조공국으로 내부는 발해의 후신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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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30년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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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말년에는 후계문제로 어지러웠으니 서장자를 세자로 봉하고 대리청정을 시키며 확실히 후계문제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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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국를 30년 넘게 안정시켰으며 내정은 조금 아쉬웠지만 외치는 휼룡하게 이끄며 태조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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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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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계문제=== | | ===후계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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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말년 왕의 외척 호씨 가문과 왕의 서장자,서차자 등으로 이루어진 종친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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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각한 갈등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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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첫 호씨 왕후와 첫 결혼이었지만 결혼하기 전에 2명의 서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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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2명의 서자들이 명종,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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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공이 너무 높고 그리고 호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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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자 안호공이 나이가 20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장자 인혜공에게 보위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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