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과 사망) |
(→말년과 사망) |
||
152번째 줄: | 152번째 줄: | ||
=== 조용한 혁명 === | === 조용한 혁명 === | ||
=== 말년과 사망 === | === 말년과 사망 === | ||
{{대영제국 연호|1976}}년 생전 퇴위를 발표하였다. 이는 대영제국 황제중 최초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사례이다. | {{대영제국 연호|1976}}년 생전 퇴위를 발표하였다. 이는 대영제국 황제중 최초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사례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인기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이고 민간에서조차 반대 여론이 매우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의 건강은 이 시점에서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뜻을 굽혀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얼마 안있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한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대영제국 연호|1977}}년 퇴위하였고, 그의 장남 [[프레더릭 5세]]가 황위를 이었다. | ||
이후 4년간은 인도와 중국을 오가면서 요양 생활을 했고 대부분의 생활은 전통적으로 대영제국 황제들과 청나라 황제들의 요양지였던 [[원명원]]에서 하였다. {{대영제국 연호|1981}}년 3월, 간암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 고향에서 죽고 싶다며 대영제국 본토로 귀국하였으며, 2개월 후인 {{대영제국 연호|1981}}년 5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 이후 4년간은 인도와 중국을 오가면서 요양 생활을 했고 대부분의 생활은 전통적으로 대영제국 황제들과 청나라 황제들의 요양지였던 [[원명원]]에서 하였다. {{대영제국 연호|1981}}년 3월, 간암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 고향에서 죽고 싶다며 대영제국 본토로 귀국하였으며, 2개월 후인 {{대영제국 연호|1981}}년 5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
2021년 12월 2일 (목) 00:35 판
![]()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 |
---|---|
[ 펼치기 · 접기 ] |
에드워드 7세 관련 둘러보기 틀 | ||||||||||||||||||||||||||||||||||||||||||||||||||||||||||||||||||||||||||||||||||||||||||||||||||||||||||||
---|---|---|---|---|---|---|---|---|---|---|---|---|---|---|---|---|---|---|---|---|---|---|---|---|---|---|---|---|---|---|---|---|---|---|---|---|---|---|---|---|---|---|---|---|---|---|---|---|---|---|---|---|---|---|---|---|---|---|---|---|---|---|---|---|---|---|---|---|---|---|---|---|---|---|---|---|---|---|---|---|---|---|---|---|---|---|---|---|---|---|---|---|---|---|---|---|---|---|---|---|---|---|---|---|---|---|---|---|
[ 펼치기 · 접기 ]
|
인도제국 제5대 황제 | |||||||||||||||||||||||||||||
---|---|---|---|---|---|---|---|---|---|---|---|---|---|---|---|---|---|---|---|---|---|---|---|---|---|---|---|---|---|
대영제국 제3대 황제 에드워드 7세 | Edward VII | |||||||||||||||||||||||||||||
중화제국 제3대 황제 순종 명황제 | 順宗 明皇帝 | |||||||||||||||||||||||||||||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 信毅睿聖大孝至誠明皇帝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 인신의예성대효지성명황제 | |||||||||||||||||||||||||||||
이름 | 에드워드 앨버트 패트릭 화이트로이드 Edward Albert Patrick Whitelloyd | ||||||||||||||||||||||||||||
출생 | B.B. 21년 5월 5일 | ||||||||||||||||||||||||||||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화이트로이드궁 | |||||||||||||||||||||||||||||
대관식 | 16년 12월 5일 | ||||||||||||||||||||||||||||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아일스버리궁 | |||||||||||||||||||||||||||||
사망 | 60년 5월 17일 (향년 81세) | ||||||||||||||||||||||||||||
대영제국 캐나다 토론토 브로미치궁 | |||||||||||||||||||||||||||||
능묘 | 헌릉(獻陵) | ||||||||||||||||||||||||||||
국적 | ![]() | ||||||||||||||||||||||||||||
재위 | 연합왕국 국왕 | ||||||||||||||||||||||||||||
8년 9월 11일 - 24년 12월 31일 | |||||||||||||||||||||||||||||
대영제국 황제 | |||||||||||||||||||||||||||||
16년 10월 18일 - 56년 10월 17일 | |||||||||||||||||||||||||||||
중화제국 황제 | |||||||||||||||||||||||||||||
16년 10월 18일 - 60년 5월 17일 | |||||||||||||||||||||||||||||
인도제국 황제 | |||||||||||||||||||||||||||||
16년 10월 18일 - 60년 5월 17일 | |||||||||||||||||||||||||||||
대영제국 태상황 | |||||||||||||||||||||||||||||
56년 10월 17일 - 60년 5월 17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대영제국과 중화제국의 제3대 황제이자, 인도 제국의 제5대 황제이다.
상세
선황의 시대에 터진 경제 대공황을 수습하여 경제적 번영의 기초를 다졌으며, 재위 초에 대영제국-일본 전쟁이 일어났을때 대영제국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말년인 50년대에는 조용한 혁명으로 불리는 사회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전제군주적인 권한을 일정부분 감소시키고, 평민들의 권한을 확대하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창업군주인 프레더릭 3세와 더불어 대영제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로 꼽힌다. 대영제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것이 프레더릭 3세였다면, 에드워드 7세의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초강대국으로서의 대영제국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총 40년간 재위하여[1] 대영제국의 황제중 가장 오랜기간 재위하였으며,[2] 동시에 81세까지 장수하였기에 역대 대영제국의 황제중 가장 장수하기도 하였다.
생애
어린 시절
프레더릭 4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황제 섭정
대공황 수습
대영제국-일본 전쟁
전후 대영제국의 영향력 확장
조용한 혁명
말년과 사망
55년 생전 퇴위를 발표하였다. 이는 대영제국 황제중 최초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사례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인기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이고 민간에서조차 반대 여론이 매우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의 건강은 이 시점에서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뜻을 굽혀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얼마 안있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한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56년 퇴위하였고, 그의 장남 프레더릭 5세가 황위를 이었다.
이후 4년간은 인도와 중국을 오가면서 요양 생활을 했고 대부분의 생활은 전통적으로 대영제국 황제들과 청나라 황제들의 요양지였던 원명원에서 하였다. 60년 3월, 간암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 고향에서 죽고 싶다며 대영제국 본토로 귀국하였으며, 2개월 후인 60년 5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성향
평가
역대 대영제국 황제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지 5세도 진보적이긴 하지만 사회 문제부터 경제, 외교 문제까지 에드워드 7세만큼의 진보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평이다.
동성애 합법화, 낙태 합법화, 인종차별법 폐지 등이 그의 치세동안 이뤄졌으며 그중 일부는 황제의 주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일설에 따르면 동성혼 합법화도 주장하였으나 성공회 및 정치권의 극심한 반대로 인하여 뜻을 접었다고도 한다. 동성혼 합법화는 조지 4세 치세인 86년에야 이뤄졌으니, 거의 40년을 앞선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성공회교도가 아니라 무신론자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생전의 기록을 보면 성공회 교도이었음은 거의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