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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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위대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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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대영제국의 황립 공영 방송인 BBC가 대영제국 신민 800만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의 명단을 공개한 순위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프레더릭 3세 아이작 뉴턴 빅터 피어슨 엘리자베스 1세 커트 코베인
6위 7위 8위 9위 10위
토머스 모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드레이퍼슨 에드워드 7세 리처드 해밀턴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중화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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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태조 선황제 명종 강황제 순종 명황제
제4대 제5대 제6대
정종 순황제 열종 문황제 태륭제
추존
고조 태황제 · 신조 장황제 · 경조 민황제 · 조조 중황제 · 의조 성황제 · 효조 현황제 · 숙조 정황제 · 연조 희황제 · 문조 선황제 · 상조 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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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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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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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제11대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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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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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 · 송 · 서하 · 요 · 금 · 원 · 명 · 청 · 대영

연합왕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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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제국 제3대 황제
브리타니아 제국 초대 황제
프레더릭 3세 | Frederick III
중화제국 초대 황제
태조 선황제 | 太祖 宣皇帝
청나라 제13대 황제
현문제 | 賢文帝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宣皇帝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선황제
본명 프레더릭 조지 필립 아서 색스코버그 고타
Frederick George Philip Arthur Saxe-Coburg Gotha
이름 프레더릭 조지 필립 아서 화이트로이드
Frederick George Philip Arthur Whitelloyd
출생 B.B. 72년 6월 23일
브리타니아 제국 아메리카 리치몬드 화이트로이드궁
대관식 B.B. 54년 4월 12일
브리타니아 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아일스버리궁
사망 8년 9월 10일 (향년 80세)
브리타니아 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헌팅던궁
능묘 태건릉(太建陵)
국적 브리타니아 제국
재위 연합왕국 국왕
B.B. 54년 3월 3일 - B.B. 1년 12월 31일
(53년 9월 4주, 19,661일)
대청국 황제
B.B. 4년 9월 13일 - B.B. 1년 12월 31일
(3년 3월 2주 4일, 1,205일)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0년 1월 1일 - 8년 9월 10일
(8년 8월 1주 2일, 3,17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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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化)
적헌(積獻)
연호 현문(賢文)
존호 상현(常賢)
시호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
경성신중화공덕대성선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
敬誠信中和功德大成宣皇帝)
칸호 엥케 아무굴랑(ᠡᠩᠬᠡ ᠠᠮᠤᠭᠤᠯᠠᠩ)
묘호 태조(太祖)
아호 장정(張政)
부모 부군 윌리엄 4세 (B.B. 99 - B.B. 54)
엘리자베스 킹혼 (B.B. 97 - B.B. 21)
형제 윌리엄 조지 화이트로이드 (B.B. 76 - B.B. 64)
자녀 프레더릭 리처드 길리엄 화이트로이드 (B.B. 51 - 17)
길버트 프레더릭 화이트로이드 (B.B. 46 - 19)
윌리엄 덩컨 존스 화이트로이드 (B.B. 45 - 47)
신장 176cm
학력 세인트 조지 군사학교 (졸업)
종교 영국 성공회황제교 공식
유교 (성리학) 추정

개요

Etiam si pereo imperium aeternum manebit
나는 죽지만,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

프레더릭 3세

브리타니아 제국중화제국의 초대 황제, 그리고 인도제국의 제3대 황제.

상세

브리타니아 제국 최대의 성군이다.[1] 영국사를 통틀어 성군이 많지만, 그중 대중적인 인기로든간에 실제 업적으로든간에 가장 앞서는 사람은 단연 프레더릭 3세이다. 단순히 영국사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도 가장 뛰어난 군주로 꼽힌다.

브리타니아 제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62년간 제국을 통치하였고, 그중 브리타니아 제국을 통치한 기간은 8년이다. 즉위 당시에는 18세의 어린 아이였고 승하 당시에는 80세였다. 흔히 "황제"로 알려져있지만 그가 실제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건 8년정도이고 나머지 기간은 청나라나 인도제국의 황제로 재위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동안 영국이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통해, 청나라를 포함한 수많은 나라들을 식민지화하고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황제로 자주 불리는 것이다. 실제로 브리타니아인들은 프레더릭 3세를 일컬어 프레더릭 대제(Frederick the Great)이라고 부르며 중국인들은 현문대제(賢文大帝)라고 한다. 얼마나 브리타니아 내에서 존경을 받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엄청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강행한 것에서 보이듯이 브리타니아 제국의 군사력을 단련하는데 힘썼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유교 성리학적인 요소를 브리타니아 제국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황위를 재편하였으며, 말년에는 불교, 도교, 유교의 특성을 합친 신흥 종교인 황제교를 직접 만들어 브리타니아의 국교로 삼음으로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제국 팽창 정책에 따라 중국, 인도,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화하였고, 파운드화 우위 속에서 브리타니아 제국의 압도적 경제 우위 체제를 성립하였다.

즉,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브리타니아 제국은 프레더릭 3세의 치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애

유년기

연합왕국 국왕으로의 즉위

영토 확장

산업화와 국가의 혼란 속에서

세계전쟁

B.B. 6년 브리타니아 제국의 상선이 의문의 침몰을 당한 이후, 내각은 이를 무조건적으로 독일의 책임으로 몰아가며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프레더릭 3세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전쟁을 반대하였지만 전쟁이 개시된 이후에는 전시 내각을 조각하도록 명령하고 자신도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브리튼 섬 고토를 되찾자는 연설을 하며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전시 내각의 전쟁 수행에 참여하면서 전략을 제시하였고, 이는 영국의 전투 승리에 상당부분 기여하였다. 단순한 정치 장교가 아닌,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B.B. 4년 영국군이 청나라에 상륙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황제 선통제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레더릭 3세는 직접 청나라에 방문하여 선통제로부터 청나라의 옥새를 건내받고, 청나라의 영국 복속을 선포하였다.

한편 영국군은 북아프리카 전역을 평정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남부까지 점령하면서 선전하였지만 B.B. 2년 알프스 산맥 전선에서 독일이 투하한 독가스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까지 후퇴해야했다. 이로 인해 영국군 내 사망자가 속출하자, 독일과 프랑스에 대항하던 러시아와 영국에서 반전 시위가 빗발쳤다. 러시아에서는 아예 황정이 폐지되기까지 하였다. 내각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주장하였으나 프레더릭 3세는 민의를 헤아려 전쟁을 일시적으로라도 멈춰야한다고 했다. 내각에서 이를 받아들여 B.B. 1년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프레더릭 3세는 휴전 협정을 앞 두고, "조금만 더 분발했다면 브리튼 섬의 고토를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여 안타깝다. 하지만 고토를 찾는 것보다는 내 백성 한명을 더 살리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전쟁에서 분발하지 못한 것의 이유는 오직 짐이 부족하기 때문일 뿐이다"라고 평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B.B. 4년 9월 12일, 프레더릭 3세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현종 선통제로부터 청나라의 옥새를 건네받고, 공식적으로 청나라 황제직을 양위받았으므로 다음날부터 대청국의 제13대 황제로서 재위했다. 청나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백인 천자였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백인 출신 황제가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연호는 현문(賢文).

처음에는 만주족도 아닌 완전 다른 민족인 영국인이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는 중국 국민당군을 비롯한 여러 한족 반란군의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프레더릭 3세는 청나라 치하에서의 비합리적인 세금을 크게 감면하고, 세금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우선적으로 빈민들을 구제하는데 애쓰면서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당시 중국인들로부터 막대한 지지를 받던 민족적 지도자인 쑨원과 직접 협상해, 그를 청나라의 제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고, 쑨원은 세계 전쟁에서 유럽 전선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중국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프레더릭 3세를 대신해 사실상 청나라의 개혁을 총 진두지휘하였다. 이런 과정 끝에 대다수의 한족 신민들은 영국의 청나라 식민지화를 별 반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중국에 한정된 것이긴 하였으나 식민지 주민을 영국 본토 주민과 동등하게 대우해주어야한다고 한 최초의 인물중 하나였다. 평소 중국 문화를 숭상하였던 그답게, 중국의 문화는 곧 위대한 중국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고, 중국이 결국 영국에게 멸망한 것은 찰나의 실수로 인한것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영국인들이 중국의 문화를 곧 영국의 문화와 같이 여기고, 중국인들을 자신들과 같이 여겨야한다고 발언하였다. 이로 인하여 프레더릭 3세의 치세동안 중국인들은 다른 식민지 주민들과 달리 몇몇의 인종차별의 피해는 있을지언정 제도상으로 인한 불이익 또는 수탈을 당하지 않았다.

칭제건원과 말년

세계 전쟁의 휴전 이후, 프레더릭 3세는 더욱 높아진 영국의 위상에 걸맞는 국가를 원했고, 이에 따라 칭제건원을 결정하였다. 0년 1월 1일을 기해 영국은 브리타니아 제국으로, 청나라는 중화제국으로 승격되었으며, 동시에 서력 1921년을 원년으로하는 브리타니아 제국 황력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황제국으로서의 정통성을 위하여 제3의 로마를 자칭한것도 이때의 일이다.

칭제건원과 동시에 황제교의 브리타니아 제국 국교 공인과, 전제군주제 황권의 성립 등도 발표되었으며, 이러한 조치들을 몇몇 계층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계급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칭제를 통해 브리타니아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이후로는 세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데 힘썼으며, 동시에 자신의 사상, 종교적 근원지인 중국에 거처하며 중국 복구에 힘썼다. 당시 인도제국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들은 수탈을 면치 못하였으나 중국만큼은 "중국을 사랑했던 황제"라는 별명이 있는 프레더릭 3세답게, 그의 특별 배려를 통해 오히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크게 발전되었다. 세계 전쟁 도중 파괴된 베이징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시들에 서양식 건물들이 올라섰고, 중화 신민들의 삶도 크게 나아졌다. 혹자는 이를 "진정한 의미로 백인들이 자신들의 짐을 짊어진 최초의 사례"라고 하기도 한다.

그는 세계전쟁 도중 영국군의 폭격으로 1/3이 파괴된 자금성과, 제2차 아편 전쟁 도중 전소된 원명원의 복구를 명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전후 작업이 먼저였던 관계로 차일피일 연기되다가 결국 원명원과 자금성의 완전 복구가 안된 상태로 프레더릭 3세가 붕어하였다. 이후 원명원과 자금성은 프레더릭 4세의 치세때 완전히 복구되어, 에드워드 7세의 치세때부터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의 처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말년에는 중국의 역사를 정리학 책인 "중화 황제국 흥망사"를 20권 분량으로 저술하여, 자신의 중국식 이름인 화헌(化獻)의 명의로 발간했다. 이 책은 프레더릭 3세가 23세부터 56년간 저술한 책인데, 중간 중간에 고전 문헌을 참조하여 내용을 추가하거나 빼고, 보완하는 식으로 써서 대단히 정확도가 높다.

업적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 체제를 도입하였으며, 동시에 의원내각제의 체제를 유지하여 관료 엘리트 독재정의 체제를 마련했다. 브리타니아 제국의 체제가 귀족 중심으로 짜여진 것 역시 프레더릭 3세 치세의 일이다. 그러면서도 제1계급과 황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부가 집중되지 않도록 성리학적인 요소들을 브리타니아 제국의 통치 체제에 상당수 반영하였다. 기존 서양 제국에는 없었던 자기 성찰과 반성, 겸손함 등의 기치를 황제와 귀족들이 본받도록하여 동서양의 전제군주 정치 체제를 적절히 배합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외적으로는 세계 전쟁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패전 직전까지 몰아넣고, 청나라를 굴복시켜 중국을 식민지화하는 등 브리타니아 제국의 영토 팽창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에도 영향을 주어, 비록 중국 식민지에 한정된 일이긴 하였으나 식민지의 주민 역시 브리타니아 제국의 평등한 신민이라는 가치 하에서 본토 주민과의 차별 요소를 거의 없애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확장되었기에 브리타니아 제국은 40년대의 식민지 반란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식민지 주민들의 민심을 얻어 기존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외에 프레더릭 3세는 색스코버그고타 왕조의 분가인 화이트로이드 황조의 설립자이며, 중국 황제의 추존 제도를 받아들여 자신의 선대 왕들과 잉글랜드 국왕, 그리고 영국의 (사실상) 첫번째 통일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을 브리타니아 제국 추존 황제로 올렸다. 연합왕국을 벗어나 브리타니아 제국을 선포한 것 역시 그이며, 브리타니아 제국 황력을 도입한 것 역시 그이다.

즉 현재의 브리타니아 제국이라는 국가의 초우위 체제는 프레더릭 3세가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리타니아 제국 내에서는 사실상의 창업 군주로 받아들여진다. 중화제국에서는 프레더릭 3세의 묘호로, 창업 군주의 묘호인 태조를 정하였다.

칭제와 영토 확장

정치개혁

종교개혁

평가

수양제가 최악의 천자를 대표한다면, 대영국 태조 선황제께서는 최고의 천자를 대표하신다. 이에 대한 이의는 없을 것이라고 짐은 믿는다.
프레더릭 5세, 정종(正宗) 실록 영력(永歷) 14년 5월 12일의 기사

거의 신 급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로 좌우와 계급, 세대를 막론하고 현재 브리타니아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황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봐도 된다.

자신의 치세동안 영국을 거의 천지개벽급으로 바꾸어놓았다. 기존 영국 왕실들의 관례에 중화 천자의 예법과 유교적 가치관을 도입하여, 자신의 후대 황제들 역시 자신 못지 않는 성군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철저한 교육 시스템을 짜놓았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개혁을 단행해 단순히 종교의 영역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 성공회의 전통을 깨부시고 스스로 황제교를 만들어 황제의 권위를 드높였고, 오랜 종교적 악습들을 손수 철폐시켰다. 비록 그의 생전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용한 혁명을 통한 브리타니아 제국 사회의 개방 역시 황제교를 통해 성립한 기독교적 윤리관의 해체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게 지배적이다.

대외적으로 프레더릭 3세의 시대는 에드워드 7세의 시대와 더불어 브리타니아가 가장 팽창하던 시기였다. 한때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불렸던 청나라를 식민지화했고, 이후 중화제국을 선포함으로서 중화 천자를 자칭한 최초의 서구 인물이 되었다. 또 중화제국 선포에 맞춰 브리타니아 제국을 선포하면서 기존의 "왕국"으로서 영국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로마의 후계자인 제국"으로 격에 맞게 올려놓았다. 즉 프레더릭 3세의 치세는 실질적인 국력도 크게 상승하였으며, 동시에 그만큼 국격도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도 유교 성리학의 신도다운 꾸준한 수양과 공부, 업무량에 맞먹는 엄청난 공부량, 그리고 단순히 문과에서만 그치지 않고 수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학식을 쌓은 것 때문에 거의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매우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프레더릭 3세가 식민지와 본토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업적들은 전적으로 프레더릭 3세 개인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과장하여 말하자면, 루이 14세 이후 가장 강력한 황권을 휘두른 황제였으며, 브리타니아 역사를 통틀어 이정도로 전제적인 권력을 가진 황제가 없었다.(그나마 에드워드 7세조지 5세 정도) 그러면서도 강력한 황권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쓰지 않았으며, 중우 정치를 박멸하고 제국을 발전시키는데 온전히 쏟아 부으면서 브리타니아는 전세계적인 최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개인사

  • 차를 매우 좋아했다. 하루에 5잔씩 마셨다고 한다. 우유를 섞은 영국식 밀크티도 좋아했지만 중국식으로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차를 더 좋아했다. 반면 술과 담배는 평생 입에도 대지 않았다.
  • 동성애자였음이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황후를 들이고 3명의 아들을 낳긴 했지만 이성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도 여성과의 관계가 끔찍하다고 했다. 동성애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스스로도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지 남성 시종과 남성 귀족 청년들만 데려다놓고 살았고,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 등 동성애 관계의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신화 영웅들을 주제로 한 정자를 세워놓았다.
  • 가장 존경하고, 참조한 인물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청나라의 강희제. 평소 중국사와 유럽 역사에 관심이 대단하여 인물에 대해 평가도 많이 내렸다. 송태조 조광윤과 광무제, 수문제는 고평가한 반면 영락제에게는 중립적인 평가를, 한무제와 건륭제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후술하겠지만 중국사는 정말 많이 공부해서 말년에 중국사 저서를 낼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사는 중국사에 비해 약했지만 그럼에도 많이 공부했다고 한다.

중국을 사랑한 황제

여러면에서 중국의 제도를 많이 연구하고, 브리타니아 제국의 체제에 도입하였다.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실에는 다른 서양권 왕정에서 볼 수 없는 제도가 많다. 황제가 총리와 독대하는 것이 아닌 매주 내각 구성원 전체와 모여 국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토론하고, 여러 학자들과 모여 학문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중국의 제도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사관을 두어 황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게하여 사후 황제의 기록물을 편찬하고, 화이트로이드 궁에 시신이 안치되는 것 외에 중화제국 본토에 능묘도 따로 조성된다. 황제가 생전 퇴위하면 태상황으로 오르는 것 역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한 것으로, 원래 영국 왕실에서 시행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프레더릭 3세에 의해 "좋은 황실 문화"라고 생각된 것중 상당수가 브리타니아 제국 황실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 제국 황실이 사실상 중화 왕조를 이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평가도 있다.

중국의 제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도 크게 동경하여 어려서부터 궁술, 기마 등 중국의 여러 문화들을 배웠으며, 중국의 고문서와 도자기, 그림들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10대 중반부터 중국어를 공부하여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거의 원어민과 다름 없는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하였다고 한다. 노년에는 아예 자신이 중국의 역사를 정리한 15권의 책을 저술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중국식 분재 키우기, 서예, 수석모으기 등의 취미도 가졌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전통 음악에 대해서도 연구하였지만 악기를 잘 다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청나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25세에 광서제의 즉위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서태후의 각종 실정으로 인해 망가진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평소에 성리학에 관심이 많아 제왕학도 공부했던 그는 청나라의 부패하고 국정에 무관심했던 황제 일가와 신하들을 경멸, 혐오하였다. 광서제의 즉위 이후 얼마 안가 B.B. 42년 영국이 청나라와 전쟁을 겪으면서 홍콩이 영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B.B. 4년에는 아예 청나라가 영국에 합병되어 옥새를 건내받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프레더릭 3세는 서양인들중 누구보다도 중국의 역사, 정치, 문화을 흠모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300년간 이어진 중화 왕조를 끝내고 "백인 천자"의 시대를 세운 장본인이 된 것이다.

종교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1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8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상서로운 독수리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구름이 나타나거나 별똥별이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어렸을때 유교 성리학의 교리를 접한 이후, 유교를 철학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프레더릭 3세는 영국 성공회의 신도로서 대놓고 기독교에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도를 통해서만 얻는 구원은 의미가 없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한다"와 같은 말을 하며 기독교적 교리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때문에 실제 종교는 유교 성리학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다만 동양의 사상인 유교를 공식적으로 믿는다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세계 전쟁에서 사실상의 승리[2]를 거둔 이후, 칭제건원하며 성공회가 영국에서 차지했던 지배적인 위치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만든 종교인 황제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일부 성공회 신도와 성직자들이 반발하였으나 프레더릭 3세는 이들을 부패한 특권 계급이자,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는 공화파 세력으로 간주하고 대숙청을 벌였다.

가정사과 건강

재위 도중의 찬란한 업적과는 달리 가정사는 상당히 불행했다. 아버지이자 부군인 윌리엄 4세가 45세에 지병으로 급사하였고 아들들도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다. 장남 프레더릭 4세는 운동과 소식, 규칙적 생활로 매우 튼튼한 몸을 가졌던 아버지와 달리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하여 프레더릭 3세의 마음을 애태웠고 결국 프레더릭 3세가 승하한 이후 황제 직을 맡은지 4년만에 쓰러져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6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차남인 길버트 프레더릭 화이트로이드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나마 3남인 윌리엄 덩컨 존스 화이트로이드가 92세로 매우 장수한 편이다.

반면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킹혼은 76세로 당대 기준으로 꽤나 장수했다. 게다가 프레더릭 3세는 80세까지 살아서 역대 영국 황제중 손에 꼽을정도로 오래 살았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 요절하는 사람이 많았던 영국 황제중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프레더릭 3세가 장수했다는 점이 꽤 흥미를 모으고 있다.

평소 프레더릭 3세는 채소 중심의 식단으로 하루 2끼만 먹었고 이것도 많이 먹지 않았다. 식후에는 소화를 위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활동을 가졌다. 또한 밤 12시에 되면 무조건 잠에 들어 다음날 6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가졌다. 이러한 생활 패턴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던 프레더릭 3세가 장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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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보통 브리타니아 제국-일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드워드 7세와 자주 비교되는 편이다.
  2. 공식적으로는 독일과 휴전을 맺었지만 독일의 식민지를 모두 뺏고 청나라까지 식민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