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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친동생인 [[숭녕제]]와는 여러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인하여 사이가 끔찍하게 좋지 않았다. 이는 의양제가 아들이 단 한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까지 숭녕제를 황태제로 책봉하는 것을 미뤄온 이유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숭녕제]]는 무려 '''69세'''의 나이로 황태제에 책봉되었고, 몇개월만에 의양제가 물러남에 따라 숭녕제는 역대 최고령 후계자이자 역대 최단명 후계자라는 두개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 자신의 친동생인 [[숭녕제]]와는 여러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인하여 사이가 끔찍하게 좋지 않았다. 이는 의양제가 아들이 단 한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까지 숭녕제를 황태제로 책봉하는 것을 미뤄온 이유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숭녕제]]는 무려 '''69세'''의 나이로 황태제에 책봉되었고, 몇개월만에 의양제가 물러남에 따라 숭녕제는 역대 최고령 후계자이자 역대 최단명 후계자라는 두개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 ||
1930년 동생에게 양위를 한 이후에는 정치에 미련을 잃은것도 있지만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기에, 숭녕제의 정사에 있어서 큰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제2차 일중전쟁]]을 수습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 1930년 동생에게 양위를 한 이후에는 정치에 미련을 잃은것도 있지만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기에, 숭녕제의 정사에 있어서 큰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제2차 일중전쟁]]을 수습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숭녕제와 사이가 나빴던 것과는 달리, 숭녕제의 아들이자 후일 [[선화제]]로 즉위하게 되는 야마시타 하야토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비교적 숭녕제와 사이를 어느정도 회복한 편이기는 하다. | ||
== 여담 == | == 여담 == |
2022년 1월 10일 (월) 16:23 판
욱일승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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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아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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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 제2대 황제 세종 경황제 | 世宗 景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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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건도공인강정융문포무현덕숭효경황제 符天建道恭仁康定隆文布武顯德崇孝景皇帝 | |
본명 | 야마시타 히로유키 ( |
출생 | 1860년 12월 21일 |
대일본제국 교토 교토고쇼 | |
즉위식 | 1905년 9월 1일 |
대일본제국 교토 교토고쇼 | |
사망 | 1932년 7월 3일 (향년 71세) |
대일본제국 우츠노미야 이시카가 행궁 | |
국적 | ![]() |
능묘 | 융릉(隆陵) |
재위 | 대일본제국 황태자 |
1882년 12월 8일 ~ 1905년 7월 31일 (22년 7월 3주 2일, 8,270일) | |
대일본제국 황제 | |
1905년 8월 1일 ~ 1930년 6월 12일 (24년 10월 1주 4일, 9,081일) | |
대일본제국 태상황 | |
1930년 6월 13일 ~ 1932년 7월 3일 (2년 2주 6일, 75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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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동아제국의 제2대 황제. 천무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총 24년간 대일본제국을 통치하며 중국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생애
만주 진공 작전
제2차 일중전쟁
선위와 붕어
개인사
자신의 친동생인 숭녕제와는 여러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인하여 사이가 끔찍하게 좋지 않았다. 이는 의양제가 아들이 단 한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까지 숭녕제를 황태제로 책봉하는 것을 미뤄온 이유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숭녕제는 무려 69세의 나이로 황태제에 책봉되었고, 몇개월만에 의양제가 물러남에 따라 숭녕제는 역대 최고령 후계자이자 역대 최단명 후계자라는 두개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 동생에게 양위를 한 이후에는 정치에 미련을 잃은것도 있지만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기에, 숭녕제의 정사에 있어서 큰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제2차 일중전쟁을 수습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숭녕제와 사이가 나빴던 것과는 달리, 숭녕제의 아들이자 후일 선화제로 즉위하게 되는 야마시타 하야토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비교적 숭녕제와 사이를 어느정도 회복한 편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