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승천
대동아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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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의 대외 전쟁·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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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전쟁·전투 교전국
천무 운요호 사건 조선
제1차 일중전쟁 청나라
의화단 운동 청나라, 의화단
조선인 저항 운동 조선인 시위대 및 저항군
의양 만주 진공 작전 중화민국 러시아 제국
제1차 세계대전 독일제국
제2차 일중전쟁 중화민국
숭녕 지나인 저항 운동 중화민국 해방위원회 중국 공산당
선화 대동아전쟁 미국 영국 프랑스
극동전쟁 소련
아프리카 해방전쟁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브리타니아 제국-대동아제국 상호방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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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亜帝国 (だいとうあでいこく)
대동아제국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大東亞帝國 | ᠪᡝᠮᡠᠰᡝᡳ ᠮᡠᠰᡝᠪᡝᠮᡠᠰᡝᠴ ᡳᠮᡠᠰᡝᡩᡝ
Greater Oriental Empire
황실기 황실 문장
국기 정부 문장
整個帝國在皇帝的統治下合而為一
온 제국이 황제의 치세 아래 하나다

(황실 표어)
八紘一宇 (はっこういちう)
팔굉일우 (온 천하가 하나의 집안이다)

(정부 표어, 1945 ~ )
국가 海行かば
황실 찬가 君が代
국화 벚꽃
국조 봉황
지도
짙은 빨강은 대동아제국의 영역을,
빨강은 대동아제국의 속국을 의미한다.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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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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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002,121,000명 | 세계 1위
인구 밀도 90.55명/km2
기대수명 80세 (2020년)
성비 男 153.7 : 女 100.0
출산율 1.66명
계급 구성 1등 신민 [본토계] 6.48%
2등 신민 [화계] 37.17%
3등 신민 [남방계] 36.77%
4등 신민 [서양계] 14.73%
비신민 4.85%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지나어, 난쥬도어, 아먀야마어, 영어, 스페인어
공용 문자 한자, 가나
종교 국교 없음 (명목상)
국가신토 (실질적)
분포 불교 42.3%
이슬람교 0.7%
기독교 0.5%
기타 0.3%
무종교 56.2%[1]
군대 대동아제국군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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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 (管区) 12개 관구
도 (都) 1개 도
현 (県) 57개 현
특수행정구 (特殊行政区) 4개 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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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군사독재정, 황정제 파시즘, 전체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국수주의
국성 야마시타 (山下 (やました))
입법부 대동아제국 귀족원 (상원)
대동아제국 중의원 (하원)
대동아 황제 선치제
정이대장군 다테바야시 류노스케
정부
요인
내각총리대신 다테바야시 류노스케 (섭정)
부총리대신 히라오케 고지로
귀족원장 도이하라 아키라
중의원장 오카다 타다미치
니혼도지사 오카모토 유이치로
집권 여당 제국유신당 (개혁파 군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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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PPP)
円153,108,171,000,000 | 세계 1위
1인당 円51,000
GDP
(명목)
円135,095,445,000,000 | 세계 1위
1인당 円45,000
통화 대동아 엔 (円)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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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법정 연호 대동아제국 황력
ccTLD
.東亜
국가 코드
大東亜, 東亜, 245

개요


昨日は極東の中心だった日本が、今は世界の心臓である大東亜帝国に生まれ変わる。
어제는 극동의 중심이었던 일본이, 이제는 세계의 심장인 대동아제국으로 거듭난다.
[2]
성종 선화제, 1945년 9월 2일 대동아전쟁 승전 연설 中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및 남북아메리카에 위치한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상세

공식 국명은 대동아제국(大東亜帝国, 구자체로 大東亞帝國)이며, 약칭은 대동아(大東亜) 혹은 동아제국(東亜帝国)이다. 수도와 최대 도시는 대동아제국 황제의 어소가 위치한 제도(帝都) 도쿄이다. 인구는 30억 3,376만명이고 공용어는 일본어, 공용 문자는 가나한자, 국교는 국가신토이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오랜 쇄국을 끝냈다. 이후 1857년, 급진 개화 정책을 지지하던 군인 야마시타 쿠로가네가 일으킨 정변을 통해 천황제가 폐지되고 황제 제도 하에서의 대일본제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일본은 급격한 서구화 및 근대화의 과정을 밟았다. 대일본제국군이 창설되어 동아시아 최초의 서양식 군대로 거듭났고 경제도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눈에 띄게 발전했다. 또한 정이대장군 제도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전제군주제적 정치 개혁을 이루어냈다. 이후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통해 대만, 조선 등 주변 국가들을 합병하였고, 1912년에는 청나라의 붕괴를 틈타 만주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13년간 중국과 전쟁을 치뤄 중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합병하였다. 현재와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판도가 구성된 것은, 미국 및 영국과의 대동아전쟁으로 아메리카 대륙 서부,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고, 1950년대 극동전쟁을 통한 소련과의 강화 조약으로 시베리아 지역을 손에 넣으면서이다.

대동아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이며, 이에 따라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 명목상으로 의원내각제가 추구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가 이끄는 제국유신당의 초우위 체제가 2019년 선치 반정 이후 지속되고 있다. 사회 분위기는 제국주의, 국수주의, 전체주의적인 정치 상황으로 인해 매우 경직되어있다. 그러나 매우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식민지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치안과 대내적 상황이 안정되어있다. 이와 별개로 문민통제파와 군 내 개혁파, 군 내 보수파의 갈등으로 인해 내부 정치 상황은 혼란스럽다.

경제적으로는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 대국이다. 국제통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동아 엔의 발행국이기도 하다.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모두 다른 나라에 비해 우위에 있는 극초강대국이다. 인도, 미국, 캐나다 등 수많은 국가들이 현재 대동아제국으로부터 직간접적인 내정개입을 받고 있는 속국이기에 대동아제국은 단순한 자국의 국력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외교 및 군사력을 행사하고 있다.

상징

국호

대동아제국의 언어별 국호
일본어 大東亜帝国 (구자체 大東亞帝國)
조센어 대동아제국
지나어 大東亞帝國
만슈어 ᠪᡝᠮᡠᠰᡝᡳ ᠮᡠᠰᡝᠪᡝᠮᡠᠰᡝᠴ ᡳᠮᡠᠰᡝᡩᡝ
모고어 ᠡᠢᠣᠭᠤᠥᠦ ᠳᠶᠬᠷᠵᠬ ᡀᠯᠹᠴᠴ
영어 Greater Oriental Empire, Greater East Asian Empire
프랑스어 Grand Empire d'Orient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Восточная Империя
스페인어 Gran Imperio Oriental
난쥬도어 Kekaisaran Oriental Raya
네덜란드어 Groter Oosters Rijk
독일어 Großorientalisches Kaiserreich
인도어 ग्रेटर ओरिएंटल एम्पायर
아랍어 الإمبراطورية الشرقية الكبرى

대동아제국의 본 국호는 대일본제국(신자체 大日本帝国 / 구자체 大日本帝國)으로, 1945년 9월 2일 선화제의 대동아제국 선포와 함께 국호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일본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그러나 대동아 정부와 황실에서는 모든 동아시아 민족들이 함께 발전하는 국가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일본보다는 대동아제국이 더 대동아의 핵심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어 원어로는 다이토아테이고쿠(Daitōateikoku)라고 하며, 지나어로는 大東亞帝國(따똥야띠구어, Dà dōngyà dìguó), 영어로는 Greater Oriental Empire(그레이터 오리엔털 엠파이어), 프랑스어로는 Grand Empire d'Orient(그렁 뎀피에르 도리엉), 독일어로는 Großorientalisches Kaiserreich(그로쓰오리엔탈리셰스 카이저라이히)라고 한다.

약칭으로는 보통 대동아(大東亜, 다이토아) 혹은 동아(東亜, 토아)라고 하며 혹은 옛 국호인 일본(日本, 니혼)이라고 쓰기도 한다. 서구권에서 보통 Oriental Empire 또는 Japan이라고 하면 대동아제국을 가리킨다.

한편 중화민국 지하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공산당 등 대동아제국의 전복을 목표로 활동하는 반정부 조직들은 대동아제국에 대한 멸칭 표현으로 동귀(東鬼), 동제(東帝)라는 표현을 즐겨쓰며 가장 대중화된 멸칭은 일제(日帝)이다.

국기

대동아제국의 국기는 욱일기이다. 욱일승천기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하나 공식 명칭은 욱일기로, 7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유서깊은 문양인 욱일 문양을 깃발로 만든 것이다. 욱일 문양이 깃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로, 20세기에 들어서는 대일본제국군의 상징으로서 쓰이며 대내적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일본의 상징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1945년 대동아제국이 선포된 이후, 군대의 상징이었던 욱일기는 국기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기존의 국기로 취급되었던 일장기는 황실기로 급이 한단계 더 격상되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일장기와 욱일기를 둘 다 사용하며 정부 청사, 총독부와 같은 공공 기관에도 두개의 깃발이 나란히 걸려있다. 한편 군대에서는 욱일기만을 사용하며, 황실에서는 일장기만을 사용한다.

국가



君が代 (기미가요) 海行かば (바다에 가면)

대동아제국의 국가는 법적으로 바다에 가면(海行かば)으로 정해져있다. 흔히 국가로 알려진 기미가요(君が代)는 황실 찬가로, 제2 국가의 지위를 가진다. 정부와 군대 등 황제가 아닌 국가를 상징하는 노래는 "바다에 가면"이고, 황제 개인의 찬가는 "기미가요"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아제국의 헌법상 황제는 국체(國體)이자 제국 그 자체이기 때문에, 황제 개인의 찬양이 제국 전체에 대한 찬양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를 부를때에는 "바다에 가면"과 "기미가요"를 동시에 부른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을때는, 황제의 직접 발표나 황제 즉위식과 같은 황제와 관련된 일에는 기미가요를 앞에 틀고, 황제와 관련이 없는 일반 전쟁 소식이나 정부 공고 등과 같은 것에는 바다에 가면을 튼다.

황실 행사에서는 기미가요만을 부르며, 나머지 행사에서는 바다에 가면을 먼저 부르고 기미가요를 나중에 부른다. 약식으로 기미가요만을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는 "바다에 가면"이지만, 실질적 지위는 "기미가요"가 더 높다.

표어

대동아제국의 표어는 정부의 표어와 황실의 표어로 나뉜다. 정부 표어와 황실 표어 모두 공식적인 표어로 인정받으며 보통 황실 표어 밑에 정부 표어를 써놓는다.

정부의 표어는 1945년부터 현재까지 "팔굉일우"(八紘一宇 (はっこういちう))가 사용되고 있다. 팔굉일우는 "온 천하가 하나의 집안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45년 이전에는 특정한 정부의 표어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황실 표어가 제국의 대표 표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9월 2일 대동아제국이 선포되면서 정부 역시 황실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노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표어를 쓰는게 좋겠다는 선화제의 주장에 따라 정부 표어가 새로이 지정되었다.

황실 표어는 1860년 지정되어 현재까지 총 9번 바뀌었다. 황실의 표어는 보통 황제의 치세가 바뀔때 같이 바뀐다. 다만 선황이 태상황으로 물러났을때는 선황제의 표어를 그대로 쓰고, 태상황이 붕어하였을때 바꾼다. 또한 황제가 자신의 의사로 중간에 표어를 바꿀수도 있는데, 이는 1945년 선화제에 의해 딱 한번 이뤄진 일이다. 표어는 보통 일본어가 아닌 지나어로 표기되는데, 그 이유는 대동아제국이 중화 황제국의 계승국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 사용된 황실 표어는 "全世界都在日本統治之下(온 세계가 대일본의 통치 하에 있다)"로, 총 50년간(1860년 ~ 1910년) 사용되었다. 반대로 가장 짧게 쓰인 표어는 단공제의 표어인 "一個偉大帝國的臣民安居樂業(위대한 제국 속의 신민들은 평화롭다)"이다. 이 표어는 2019년 8월부터 11월까지 단 3개월밖에 쓰이지 않았고 이후 선치 반정을 통해 즉위한 선치제에 의해 폐기된다.

대동아제국의 역대 황실 표어
시대 사용 연도 원어
천무제 1860 ~ 1910 全世界都在日本統治之下 온 세계가 대일본의 통치 하에 있다
의양제 1910 ~ 1932 忠於天皇陛下,服從帝國 황제께 충성하고 제국에 복종하라
숭녕제 1932 ~ 1934 爲了和平,爲了帝國 평화를 위하고 제국을 위하라
선화제 1934 ~ 1945 帝國發展的道路上沒有障礙 제국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걸림돌도 없다
1945 ~ 1987 從東亞的領袖到世界的心臟 동아의 맹주에서 세계의 심장으로
옹희제 1987 ~ 1994 爲帝國效忠,忠於皇帝 제국에 봉사하고 황제께 충성하라
지순제 1994 ~ 1996 統一是發展帝國的力量 통합은 곧 제국을 발전시키는 힘이다
원풍제 1996 ~ 2019 談起帝國的進步,沒有人應該猶豫 제국의 진보에 그 누구도 주저하지 말라
단공제 2019 一個偉大帝國的臣民安居樂業 위대한 제국 속의 신민들은 평화롭다
선치제 2019 ~ 現 整個帝國在皇帝的統治下合而爲一 온 제국이 황제의 치세 아래 하나다

역사

대동아제국의 역사
大東亜帝国の歴史

천무 시대 (1857~1905)

일본이 본격적인 강대국의 길로 걸어선 순간으로, 이 시기에는 에도 막부가 정리되고 서양식으로 제도가 개편되었다. 내각제도가 시행되었으며 군대의 신식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과 대만을 합병하여,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중 최초로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제국 선포와 황권 강화

쿠로후네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본 내에서는 미국과의 개항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시기로, 천황을 대신해 정이대장군, 즉 쇼군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한데 문제는 쇼군이 그다지 정치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제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미국이 떠난지 2주만에 급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제13대 쇼군의 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병약하고 발달 장애가 있었으므로 정상적인 쇼군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쇼군의 권력은 저하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개혁을 추구하는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시카가(足利) 번 출신의 젊은 무사인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군대를 일으켜 간토 지역의 번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이후 천무 유신이라 불리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에도와 교토를 점령하고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을 시해하고 고메이 천황을 폐하였다. 천황제도를 폐한 이후 그는 직접 대일본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일본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연호를 천무로 하였으며, 여러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개혁에 나섰다. 그의 천황제 폐지와 칭제는 당대 일본 열도의 주요 정치 세력에게 매우 충격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곧바로 유신 전쟁이 발발했다. 총 3년간 치뤄진 유신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천무 황제를 따르는 신 일본제국군이 승리하였으므로, 일본 전역의 패권을 천무 황제가 장악하게 되었다.

천무 황제는 급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민중들의 인기를 얻는 한편 자신들의 정적을 대숙청했다. 번을 모두 폐지하고 현을 두어 중앙 집권제의 기틀을 다졌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서양의 여러 선진 문물들이 일본으로 수입되었으며, 천무 황제는 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하게하여 일본 내에서도 서양에 못지 않은 신식 무기와 제품의 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1868년 내각제도를 시행하여 귀족들에 한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인 중의원을 구성하고 내각총리대신을 선출했다. 또한 국가신토를 공식적인 국가의 사상으로 선포하여 황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대외 팽창 정책 : 대만과 조센의 합병

조선총독부 (1900~1945)

천무 황제 시대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이 추구되었다. 홋카이도와 류큐를 복속 시킨 것이 이때이며, 조선과 대만과 같이 발전에서 도태되어있던 국가들을 식민지화시키는 것 역시 시행되었다. 이는 당시 대영제국, 미국, 프랑스 등 여러 열강들이 추구한 제국주의적인 대외 정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만의 식민지화는 1892년부터 진행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센과 대만에 양쪽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대일본제국에게 있어서 청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1892년부터 일본은 조센과 대만 인근에 군대를 배치하여 조선 및 대만의 합병 야욕을 드러냈다. 1894년 조선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일본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센 번 다이묘 리 사이고의 허가를 받고 조선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이에 반발한 청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이유로 전쟁을 선포했으나 도리어 일본에게 패하였으니 이를 제1차 일중전쟁이라고 부른다. 1차 일중전쟁의 결과,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 신세에서 벗어나 일본의 반 식민지가 되었고 대만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후 조샌 번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은 더더욱 심화되었다. 1897년, 일본은 조선이 자국과의 무역 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의 주요 군사 및 관공서를 점거하고 고종으로부터 사실상 조센 번의 경제를 일본에게 예속시키는 정유각서를 받아내었다. 이후 눈치도 볼게 없게 된 일본은 미국과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군사적 동맹을 맺는 것과, 인도차이나와 필리핀의 통치권을 영구히 인정하는 조건 하에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0년 조선을 완전히 일본에 복속시켰다. 이로서 단숨에 일본의 영역은 일본 열도에서 류큐, 대만, 조센으로 넓혀졌다.

의양 시대 (1905~1930)

선황제와 마찬가지로 대외 팽창 정책이 주를 이뤘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일중전쟁을 통해 영토를 비약적으로 넓혔다. 특히나 일본 최대의 식민지인 중국이 일본으로 귀속된 것이 이때이다.

영토 팽창과 대내 정책 수정

1905년, 천무제는 79세의 고령의 나이였기에 이를 이유로 자신의 장남인 야마시타 히로유키에게 황위를 물려줬으니, 그가 바로 대일본제국 제2대 황제인 세종 의양제이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중화 대륙은 혼란에 휩쌓였다. 이 혼란의 틈을 타 대일본제국은 군대 11만명을 만주에 급파하여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거하고, 만주를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군벌들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만주 지역을 완전히 점거한건 아니었다. 이 당시에는 단지 만주를 자국의 영토라고 선포만 한 상태였고 실질적으로 만주가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은 1917~1918년 경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여기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대일본제국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공격하였다. 당시 독일의 식민지였던 태평양 열도의 섬들을 공격했다. 동시에 칭다오, 산둥반도 등에서도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는데 이는 현지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하여 후대의 제2차 일중전쟁에 영향을 주었다. 1918년 독일이 항복한 이후, 일본은 베르사유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독일령 태평양 및 중국 식민지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1919년에는 기미년 만세 사태가 있었다. 1900년 멸망한 조센 번의다이묘였던 리 사이고가 1919년 사망했는데, 이에 관해 일본이 리 사이고를 독살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았다. 이에 분노한 조센의 민중들이 1919년 3월 1일 조선 내 최대 도시인 게이조 및 주요 도시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이다. 시위는 1달만에 진압되었으나 조센인 수백만이 참여한 시위는 일본 정부에 충격을 주어, 일본 정부가 각 식민지에서 무력이 아닌 점진적인 동화 통치로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일중전쟁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1920년에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산둥반도가 일본에게 넘어간 것에 관련해 현지인과 일본 정부의 갈등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산둥반도를 일본의 땅으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관청을 습격하고 일본군에 돌은 던지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였다. 이것이 외교적 문제로 번져, 일본은 산둥반도의 일본인들과 일본군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중화민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제2차 일중전쟁이다.

초반에는 중화민국이 각종 군벌들의 분열로 인해 오합지졸인 상태였기에, 중화민국의 명목상 수도였던 베이징이 단 5개월만에 일본군의 손에 들어오고 남경, 상해 등 대부분의 도시들이 일본군에 함락되는 등 승리가 눈 앞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절대로 중국을 일본에게 넘길 수 없다는 구호 아래에 주요 군벌들이 단합해 일본에 맞섰고, 이에 따라 일본은 상대적으로 초기의 기세에 비해 분전하였다.

그러나 전선이 밀고 밀리는 고착 상태로 된 것을 제외한다면 이미 주요 도시들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있던 상태였으므로, 점차적으로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에 밀리는 상태였다. 의양제의 퇴위 이전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의양제의 퇴위 당시에는 대부분의 중화민국군이 일본에게 정리된 상태였고 전쟁이 5년 안에는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30년 의양제는 고령을 이유로 황위에서 물러났다. 의양제의 슬하에 딸밖에 없었던 관계로, 황위는 그의 동생이자 황태제였던 야마시타 요시노부에게 넘어갔다.

숭녕 시대 (1930~1934)

숭녕제는 단 4년밖에 즉위하지 않은 관계로,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제2차 일중전쟁을 적절하게 마무리하면서 대동아전쟁으로 가는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중전쟁의 마무리

숭녕제는 1930년 즉위해 1934년 승하할때까지 단 4년밖에 즉위하지 않았으므로, 치적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1933년 제2차 일중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일중전쟁의 막바지 과정을 처리하고 전후 중국을 정리하는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33년 중국 국민당군은 대일본제국군에 항복하였다. 중화민국과 대일본제국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북경에서 조약을 맺었다. 중화민국은 대영제국과 인도제국의 관계에서 본따 국체만이라도 남겨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숭녕제과 군부 관계자, 내각은 이를 거부하고 중국을 일본에 합병시켰다. 몽골과 티베트는 독립국으로서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일본의 총독이 파견되고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있었으므로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부 중국인들이 있었으나, 일본군의 발빠른 대처 속에서 이들의 반란은 쉽사리 진압되었다. 또한 중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 독립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주요 조선 독립 조직들도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주하게 되어, 식민지 조선 내의 치안은 안정될 수 있었다.

1934년,숭녕제은 간암으로 인하여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숭녕제의 차남이었던 야마시타 하야토가 대일본제국의 제4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선화 시대 (1934~1987)

보통 대부분의 대동아제국 신민들이 선화 시대를 최고의 성군 시대로 여긴다. 청나라의 강건성세나 당나라의 정관지치, 한나라의 문경지치에 비견된다. 일본의 4대 대외 팽창 전쟁중 3개인 대동아전쟁, 극동전쟁, 아프리카 해방전쟁이 모두 선화제의 치세에 일어났고 이 전쟁들을 통해 대동아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일본은 극초강대국으로 거듭났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대동아 사회투쟁을 통해 군정이 종식되고 민정이 자리잡았으며 1980년대에는 이러한 번영이 꽃을 피워, 대동아제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 성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대동아전쟁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본영, 4월 15일 오전 6시 발표.

제국육해공군은 오늘 15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네덜란드과 전투상태에 드노니라.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군은 하와이 방면 미영 함대 및 항공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하고, 필리핀 및 그 밖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 오늘 오후 1시 발표

하나, 제국군은 오늘 15일 미명, 하와이 방면 미 함대 및 항공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하노라.

둘, 제국군은 오늘 15일 미명, 겐슈(廣州)시에서 영국 포함 페트렐호를 격침하며,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같은 시각 우리에게 항복하니라.

셋, 제국군은 오늘 15일 미명,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노니라.

넷, 제국군은 오늘 15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의 적 군사시설을 폭격하노라.

1938년 4월 15일, 실질적 개전을 알리는 대본영발표

일본은 제2차 일중전쟁의 수혜를 입어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빗겨나갈 수 있었지만, 1933년 전쟁이 끝난 이후 전시경제 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터진 공황은 일본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이는 내부 정치적으로 내각의 힘이 약화되고 군부가 압도적인 힘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의 영토 팽창과 군비 확충을 경계하여 대일본 석유 수출 제한령을 선포했다. 일본은 중국 유전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1934년 당시 중국산 석유가 일본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6%에 불과했고, 나머지 84%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중 75%가 미국산 석유였다. 당연히 이는 일본에게 있어서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고, 군부가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미 전쟁을 준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일본 내에서는 미국,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한다면 이길 수 있을리가 없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인구 8억에 달하는 중국이라는 강력한 식민지를 확보한 일본은 몇년간 열심히 준비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이 여론의 주류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선화제와 군부, 내각의 강력한 주장 하에, 중국조선, 만주, 대만 식민지에서 철광, 은광, 유전이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수많은 군함들과 전차가 생산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석유 수출 제한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대공황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으며, 미국 및 영국, 프랑스와 대적할만한 충분한 전력을 갖추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긴장된 상태로 지속되던 1938년 7월 30일, 필리핀의 미국 주둔군이 훈련중이던 일본 전투기를 오인 격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은 이를 미국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필리핀과 하와이, 알래스카 전역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시작했다. 3일 이후, 프랑스와 영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이에 따라 대동아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대동아전쟁 초기에 일본은 홍콩을 6일만에, 인도차이나를 단 26일만에 점령하고, 태국을 동맹국으로 삼아 버마와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대공세를 전개했다. 동시에 필리핀 상륙 작전이 이뤄져 1938년 10월 1일 필리핀을 점령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포로로 잡았다. 싱가포르는 1938년 10월 12일에, 양곤은 1938년 12월 7일에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일본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주요 정부 요인들이 네덜란드 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정부 자체는 1939년 1월 3일 일본제국군에게 항복했다.

호주 전역의 사진 (1942년 1월)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막강한 해군력을 토대로 미군의 패권 하에 있던 주요 섬들을 함락시켰으나, 미국 본국의 막강한 생산력으로 인하여 의미 있는 진격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본래 붙들고 있던 중국과, 새로 복속시킨 필리핀 식민지는 미국과의 전력 차이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39년 5월 3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필리핀 상륙을 시도한 미국이 일본군에 의해 분쇄되었고 1939년 10월 1일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항공모함 5척이 침몰하는 대패를 입었다. 이후 해상 재해권은 일본제국 해군에게 떨어져, 1940년 2월 18일 하와이에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1940년 5월 태평양 전역의 해상 패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이후,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두고 미국과 일본의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에서는 강화를 맺어야한다는 여론도 거셌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강화 제안을 거부하고 일류샨 열도를 통해 1941년 6월 12일 알래스카에 상륙하면서 아메리카 본토 상륙 작전을 진행하였다. 비슷한 시기 일본 해군에 의해 1941년 7월 30일, 캘리포니아 및 브리티시 컬럼비아에서도 상륙작전이 진행됨에 따라, 1941년 연말과 1942년 연초에 미국군과 캐나다군은 아메리카 대륙 서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미군과 캐나다군은 아메리카 반도 본토에서 항전을 계속했으며 남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미국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1943년 남아메리카 전체가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일본에 의해 함락된 이후, 1943년 7월에는 미니애폴리스가 일본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1944년 2월에는 에드먼턴과 댈러스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무조건 항복 선언 당시의 전세

미군은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결사항전을 계속하였지만 이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일본제국은 1940년부터 중화 본토에서 진행된 핵 무기 실험을 통해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한 상태였으며, 1945년 8월 6일 실제로 원자 폭탄이 미국 동부의 대도시인 보스턴에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시카고에 투하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절대로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미국 정부는 8월 15일, 일본군에 대한 절대 항복을 선언했고, 9월 2일에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해상의 야마토 함에서 일본의 선화제에게 항복 문서에 조인함에 따라 미국과 그 동맹국은 일본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대동아제국의 선포

1945년 9월 2일 야마토함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항복을 받아낸 선화제는 뒤이어 대동아제국을 선포하였다. 대동아제국은 일본이 본래 내세우던 "대동아 공영권"에서 따온 이름으로, 동아시아 민족이 일본의 주도 하에 서양의 세력을 몰아내고 함께 발전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최대의 서양 세력인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모두 몰아내고 동아시아 전역을 재패했으며, 더 나아가 태평양 일대의 패권을 확보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완벽하게 이뤄냈다는 의미에서 자국의 이름을 대일본에서 대동아로 고쳤다.

대동아제국이 건국됨에 따라 대동아제국의 황제로는 자동으로 선화제가 즉위하게 되었고, 제국 수도는 교토에서 제국 최대의 도시였던 도쿄로 옮겨졌다. 또한 중의원과 귀족원에서 새로운 제국 헌법이 제정되어 총 5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진 신민 제도 등이 시행되게 되었다. 대동아제국은 중화 황제국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헌법에 추가되어, 제국의 정통성을 새로이 확립했다.

극동전쟁

1945년 9월 미국을 굴복시킨 일본이었지만, 북쪽에서는 여전히 국제 사회주의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버티고 있었으며, 소련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지하정부 및 일본공산당 등의 세력은 신생 대동아제국에게 있어 판도 유지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따라 대동아 정부는 단순히 공산당과 같은 불순 세력을 잡는 것을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본진인 소련을 공격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몰아내어야 일본과 동아시아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소련 공격을 준비하였다.

소련과 대동아 제국의 국경 분쟁 역시 전쟁을 유발한 요소중 하나였다. 대동아제국은 중화민국을 멸망시킨 이후 중국의 영토 대부분을 영향력 하에 두었지만, 본래 중화민국의 영토였던 몽골과 신장 일대에서는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 지역은 제2차 일중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혼란을 틈타 독립한 지역들로 모두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대동아제국은 일본과 중화민국의 조약을 토대로 몽골과 신장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몽골과 신장에서 독립적인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는 1950년대까지 이어지며 대동아와 소련의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동아전쟁 종전 7년 이후인 1952년, 대동아제국은 소련의 극동 관구 지역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단 2주만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의 극동 지역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대동아의 영토로 삼았다. 소련군은 즉각적인 반격 공세에 나섰지만 이미 한번 잃은 파워 밸런스를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개전 6개월 이후인 1952년 10월까지 끝을 모르고 계속 일본에게 밀려 결국 바이칼 호수와 투바까지 대동아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소련의 막대한 생산량은 1952년 11월 8일에 있었던 크라스노야르크스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소련의 추운 겨울도 일본을 주춤하게 하여, 1953년 연초에는 다시 몽골과 투바 지역을 소련이 탈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열을 다시 갖추고 1953년 봄부터 대공세에 나서 예니세이 강을 넘고, 1953년 가을에 우랄 산맥에 도달했다. 대동아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던데다가, 1953년 10월부터 찾아온 추위로 인해 대동아군은 주춤하였으나, 소련은 대동아제국과의 평화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을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있었다.

1953년 11월 2일부터 소련과 대동아제국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은 1월 말까지 진행되었으며, 강화협정에 따라 우랄산맥을 경계로 우랄 산맥의 서쪽은 소련의 영토로, 동쪽은 대동아제국 및 대동아의 위성국인 극동 시베리아 공화국티무르 연방 공화국의 영토로 하기로 하였다. 또한 소련은 일본 공산당 및 식민지 독립 운동 단체와의 교류와 지원을 중단하는 대신, 독립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보장받으며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1954년 2월 1일 최종적으로 강화 회의의 결정안이 공개됨에 따라, 약 1년 반에 걸친 극동전쟁은 종료되었고 대동아제국이 동아시아 내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해방전쟁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미국과 같이 완전히 공중분해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인도제국이 일본령으로 떨어졌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를 일본에게 내어주어야했다. 따라서 프랑스와 영국은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식민지 중심 경제가 한계에 이르며 1960년대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프랑스, 영국 정부는 식민지들의 독립을 일부 허가하기도 하였으나 대다수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것을 막았으며 이는 포르투갈 등 여타 식민 열강국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동아제국은 이러한 식민지 주민들이 독립하는 것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아프리카의 식민지 독립군을 돕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식민지 독립 운동이 활발해지자 군대를 직접 동원하여 아프리카 식민지의 무력 해방을 도왔다. 물론 이는 철저히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야욕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이 주력으로 해방시킨 식민지들은 일본이 태평양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긴 인도양 패권에 맞닿아있는 동아프리카 지역에 집중되어있었다. 1964년 12월 2일 군부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모잠비크에 투입되어, 모잠비크 해방군과 연합하여 포르투갈군을 몰아내었으며, 이후 1966년 4월 3일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연방의 해방이 마무리될때까지 산발적인 프랑스-포르투갈-영국 당국군과 대동아군의 교전이 있었다. 이러한 교전들을 묶어 아프리카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한 식민지 해방 운동 뿐만 아니라, 흑인 해방 운동 역시 지원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을 타도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를 침공한 것이 있다. 에티오피아 역시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목 하에 대동아제국군의 침공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점을 들어, 아프리카 해방전쟁이 식민지 주민들을 해방시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단지 서구권에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치룬 또다른 제국주의적 전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쟁 이후, 마다가스카르를 제외한 모든 구 식민지들은 일정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물론 이 식민지들은 대동아제국에 귀속된 사실상의 속국이자 제2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눈가리고 아웅이자 위선질이라는 서구권의 비판이 거셌다.

비슷한 논리로 일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성향의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은 대동아제국의 해방전쟁은 식민지 뺏기 싸움에 불과하다며 대동아제국군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1960년대 후반 대동아제국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자치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동아 사회투쟁

사회투쟁 당시 대동아 국회의사당 앞의 모습

본래 일본과 대동아는 군국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한 나라였다. 초대 황제인 천무제는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을 폐위시킨 후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며, 따라서 대동아제국은 그 근본부터 군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무제 시대에 차등 투표에 따른 대동아제국 중의원과 중의원에서 선출되는 대동아제국 내각이 존재했음에도, 군인의 힘이 더욱 강력하여 내각 총리대신으로 군인이 선출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나 이런 양상은 대동아제국의 4대 팽창 전쟁인 제2차 일중전쟁, 대동아전쟁, 극동전쟁, 아프리카 해방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대동아제국군의 거듭되는 승전보는 민중으로 하여금 군부의 지지율을 높였지만, 동시에 숨막히는 군국주의 체제는 제국 신민들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 후반 아프리카 해방전쟁이 종료된 시점에서 대동아가 더이상 패권을 확보할만한 영토는 없어보였고, 따라서 대동아제국 민중 사이에서는 군부가 알아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민정 내각으로 점진적인 정권 이양을 이루어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의 권력을 넘어섰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져있던 군부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1970년 2월 16일, 점진적인 군부의 영향력 축소와 민정 이양을 촉구하는 평화로운 집회가 제도 도쿄에서 열렸는데, 군부는 이를 기마 경찰부대를 투입하여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32명의 사망자와 1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군부의 지지율은 대폭락했고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중국, 아메리카, 호주 등 각지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그 틈을 타 4등 신민으로 추락하여 온갖 사회적 멸시를 받던 백인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며 사회적인 혼란이 극대화되었다.

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더욱 적극적인 사회 통제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지만 선화제는 이를 거부하고, 내각총리대신 다나카 요시이를 해임하고 중의원의 제1야당이자, 온건파 자유주의 정당인 대동아 민주당의 당수 오쿠보 타다미치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였다. 또한 차등 투표제를 없애고, 제1신민과 제2신민, 제3신민 그리고 제4신민에 따른 차등만이 존재할 뿐 귀족과 평민, 빈자와 부자 사이에 그어떠한 차등도 없는 보통 선거를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황제의 이러한 파격적인 개혁에 군부는 결사 반대하였지만 법적으로 황제의 어명은 의회나 군부의 결정보다 위에 있었으므로, 위로부터의 개혁이 즉각적으로 실시되었다.

황제가 이례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인 자신의 황권을 위협할정도로 성장한 군부를 숙청하고 비교적 온건한 근황파 민정 내각을 두어 자신의 황권을 복구시키려는 의도였다는 설이다. 어찌되었간데 결과적으로 군정의 민정 이양을 촉구한 민중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셈이었으므로 집회는 대부분 정리되었고 급진적인 식민지 독립 운동은 절대 다수 신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체 진압되었다.

1970년 8월 20일, 첫 총선에서 중도 좌파 성향의 대동아 민주당이 263석을, 중도 우파 성향의 대동아 자유당이 206석을 얻음에 따라 대동아제국 역사상 최초의 민정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군부의 지지를 받던 보수파 황국안민회는 43석을, 진보파 화평정우회는 12석을 얻는데 그쳤다. 선거 결과에 따라 군부는 지지를 잃었고 황제와 민중의 지지를 받은 중도파 양대 민정 정당이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대동아제국 내에서는 사회 운동이 지속되었다. 계급제적인 요소가 대부분 철폐되어, 출신 지역과 신분에 따라 결정되던 온갖 복잡한 신분제는 혈통에 따른 귀족-평민의 2계급, 그리고 출신지에 따른 1신민-2신민-3신민-4신민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권위주의적인 군부 문화를 청산하자는 가치 아래에 학교에서의 체벌 지양 풍조도 등장했다. 이러한 운동은 1971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71년 1월 이후에도 이런 개방적 사회 풍조가 이어져 대동아제국의 사회가 크게 변모하는데 일조하였다.

4대 전쟁과 뒤따른 사회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대동아제국은 1980년대 후반까지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를 통틀어 "선화성세"라고 한다. 청나라의 강건성세에 못지 않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안정기로, 대동아제국은 신분과 출신지에 따른 일부의 차이가 있긴 하지였지만 전반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새로운 극초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7년, 총 40년간 재위했던 선화제는 지병으로 쓰러져 붕어하였다. 황위는 그의 첫번째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야마시타 류타로가 이었다.

옹희 시대 (1987~1994)

옹희 시대에는 선화제의 치세 때 마련된 민정 체제가 꽃을 피우던 때였다. 그러나 각 정당의 암투로 인한 지나친 정계 혼란,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판, 거듭되는 불경제 등으로 인해 사회의 분위기는 어수선한 것을 넘어 칙칙하게 변해갔고 대동아제국은 성장동력을 잃은 극초강대국이 되어갔다. 대동아제국의 신민들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통틀어 옹희 대침체라고도 한다.

고착화된 민정 통치

1990년대 초반의 도쿄

선화제 시대에 시행된 민정 내각제 통치는 선화제 말기에 완전히 고착화되어, 옹희제 시대에 들어서는 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사회에 스며들게 된다. 옹희 원년에 치뤄진 총선만 봐도 좌우 극단파는 의회의 5% 정도를 얻는데 그쳤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이상적 양당 구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민정 통치의 고착화는 대동아제국의 사회에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문화적 자유주의의 등장으로 대동아제국의 대중문화는 유례 없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인권의 개념 역시 자리잡아, 군대가 나라를 다스리기보다는 친근한 경찰이 시민의 치안을 지킨다는 의식이 대동아제국 내에서 뿌리내렸다.

그러나 민정 통치는 다소 혼란스러웠으며 2년 간격으로 여야가 바뀌거나 총리가 교체되는 일이 흔하였으므로 선화제 시대와 같은 안정된 군정 통치를 바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잦았고, 정경 유착으로 인하여 내각이 총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총리의 평균 임기는 1년 2개월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정치권은 불안정해졌다. 이는 선화제 말기 때도 볼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선화제라는 거대한 전제군주적 카리스마를 휘두른 명군이 붕어한 이후 즉위한 옹희제의 치세에는 그러한 양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 때문에 옹희제의 문민 통치기를 두고 옹희제가 지나치게 유약했다고 평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거듭되는 경제 위기

대동아제국 내에서 민정 통치의 여론이 악화된 또다른 원인으로는 경제 위기가 있었다. 대동아제국은 식민지 수탈을 통해 경제가 유지되는 구조였고, 선화제 말기에는 단순 식민지 수탈을 넘어 식민지간의 무역과 압도적 생산량을 통해 높은 경제 수준을 유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식민지가 더이상 팽창되지 않고 인구 수 팽창도 점차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내수 시장에 의존하던 대동아의 경제 성장률은 점차적으로 낮아졌다.

단순한 경제 침체 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 역시 거듭되었다. 체제의 결함에서 나왔던 경제 위기부터, 내각의 대규모 부정부패와 분식 회계로 인한 경제 위기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경제 성장률은 0%를 넘어 마이너스에 도달하였고, 이로 인해 대동아제국의 식민지 수탈이 더욱 악독해지자 동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동아제국의 식민주의적 수탈을 거부하는 폭동이 발생하는 등 대동아제국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틈타 일부 좌익 용공단이 조장한 파업이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며 경제 위기는 19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고 제국 신민들의 삶의 질은 점차적으로 낮아졌다. 세기말적 경제 상황을 두고 옹희 시대 불경제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져나갔다.

지순 시대 (1994~1996)

현재는 지순제의 독자인 선치제가 묘호를 문종(文宗)으로 고쳐 올리긴 했지만 단공제 시대까지만해도 묘호가 상종(殤宗, 지식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有知而夭)이었을 정도로 재위 기간이 짧았다. 이는 어려서 제대로 된 황권도 휘두르지 못한데다가 원풍제에게 강제로 황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보통 옹희제의 침체기에서 원풍제의 제2의 전성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의 중간에 있던 황제로 인식된다.

지순 헌정 위기

옹희제가 불과 54세로 사망한 이후, 황태자조차 없는 상황에서 옹희제의 장자인 야마시타 아리토모가 지순제로 즉위하였다. 이때 지순제의 나이는 불과 19세에 불과하였으므로 정상적인 정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따라서 황권은 매우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선화제 이후 지속된 정치 경제적 불안정은 어린 황제가 다스리는 대동아제국의 정세를 어지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황태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황제가 급작스레 승하하였기 때문에 지순제가 실제 황제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인식은 황실 내에서 드문 드문 있어왔다. 그중에서는 옹희제의 동생이자, 옹희제 시기 황실 내에서 제2의 권력을 가졌던 야마시타 다메모토가 황제가 되어야한다는 여론이 황실 내에서 컸다. 옹희제의 황제(皇弟)들이 군사적 실권을 가진 것 역시 지순제에 있어서는 큰 위험으로 다가왔다. 대동아제국의 황자들은 보통 군대에 입대하여 황위에 오르지 않을 시 일반적으로 군대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되므로, 황권이 크게 약화된 시점에서는 군대를 황제의 직속 기구로 두려는 시도가 곧 큰 리스크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황실 내의 정치적 싸움은 거듭되고 있었고 실제로 지순제를 상대로 한 암살 시도도 빈번했다. 이에 지순제는 거듭되는 암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 개혁을 명분으로 군대 내 황실의 영향력을 약화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였다. 야마시타 다메모토는 이를 자신에 대한 선전 포고로 받아들이고, 국가를 안정시키고 황제를 둘러싼 간신들을 처단한다는 모토 하에 반정을 일으켰다.

군사적으로 지순제 쪽에 붙어있던 군사 수가 압도적이었던만큼 초반에는 지순제파가 군사적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지순제 쪽의 군대가 실책만을 거듭한 반면, 무인들을 측근으로 두고 있던 야마시타 다메모토의 군대는 연전 연승을 거듭하였다. 결국 3월 27일 도쿄 일대를 야마시타 다메모토의 군대가 장악하였고 지순제는 5일을 버텼으나 결국 야마시타 다메모토에게 황위를 양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서 대동아제국 역사상 최초로 무력에 의해 황제가 퇴위하고, 새로이 황제가 즉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웠던 정계를 개편하고 간신과 부정부패자를 처단한다는 기치 아래에, 문민 통치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군인 내각총리대신의 시대가 열렸다. 중의원 보통 선거 제도는 사실상 폐지[3], 내각 인원의 1/3을 군인이 채웠다. 이런 변화의 결과로 1960년대 이후 해체된 군국주의적 사회가 부활하였다. 거의 헌법을 바꾸는 수준의 엄청난 정치적 사태였기에, 이 사건은 지순 헌정 위기라고 불린다.

어린 황제로 인해 약화된 황권,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전략적 실패로 패한 황제측 군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무인 세력 등 때문에 지순 헌정 위기는 보통 명나라정난의 변에 비견되곤 한다. 다만 건문제 주윤문이 정난의 변 이후 행적이 묘연했던 반면, 지순제는 사실상의 폐위 이후에도 황족으로서 나름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죽을때까지 조선경성어소에 감금되었고 30세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원풍 시대 (1996~2016)

원풍 시대에는 원풍제 개인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강력한 개혁과 숙청 정책 하에, 선화제 말기, 옹희제, 지순제동안 이어져온 뿌리 깊은 사회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사회 복지 정책 등 각종 경제, 정치, 사회 개혁 정책으로 인하여 원풍제 시대에는 옹희제 침체기를 벗어나, 대동아제국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한 전제군주적 정치와 무인 정치는 각종 부작용으로 작용하는 등의 어두운 면 역시 존재했다.

공포정치의 개막

지순제를 쫓아내고 즉위한 원풍제는 본래부터 무인 측근이 많았고 본인도 군대를 이끄는 무인이었다. 그는 황권 강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수많은 황족들이 대숙청을 당해 한직으로 물러났다. 이 시기부터 황족들의 군대 통솔권이 박탈되었고, 선 황제였던 지순제는 일본에서조차 쫓겨나 조선 반도로 보내져 경성의 경성어소에 강제로 유폐되었다.

황족을 정리한 원풍제는 강력한 군국주의 파시즘 정부를 건국하여 명목상의 전제군주정 정권이었던 일본을 실질적 전제군주 정권으로 만들었다. 군비를 크게 강화하였고, 징집 제도를 강화하여 군인 수를 확충하였다. 총리는 오직 육해공군의 대장만이 오를 수 있었으며 내각의 인원도 1/3은 군인 출신이었다. 언론의 검열과 사상 및 발언의 자유 박탈, 보통 선거 폐지, 인권의 부정 등 시대를 역행하는 독재적 정책 역시 이때 시행되었다. 그러면서 중의원 의원 수의 과반수 이상을 자신이 임명하게 하여 내각과 의회를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어, 국가 정치 전체를 자신이 홀로 통치할 수 있게 하였다.

주요 정당들은 전부 해산되었고 오직 황제의 어용 정당이었던 대동아평화당만이 합법화되었다. 일본 공산당 뿐만 아니라 주요 좌파, 자유주의 단체들의 회원들은 집단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형무소로 보내지거나 총살형당했으며 반황실을 이유로 무고하게 끌려간 이들도 많았다. 기독교, 이슬람교도 역시 탄압을 받아 수많은 교회, 성당, 모스크 등의 종교 시설들이 잿더미로 변하고 성직자들은 학살당했다. 원주민 개화 산업이라는 명목 하에 뉴기니 섬과 태평양 연안의 원시 부족들도 학살을 면치 못했다. 이와 같은 공포 정치 속에서 사망한 인원 수만 86,000명 이상이며 일부 반정부 단체는 그 수를 80만 이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발전

이러한 강력한 사회 통제 정책과 별개로 경제 사회적으로 대동아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원풍제는 철인 독재자였지만 그와 별개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심 분야만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그 외의 분야는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면서 유능한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정책의 미흡한 점을 쉽게 받아들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정할 줄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원풍제는 겉모습과는 달리 대동아제국을 크게 발전시켰다.

경제적으로 사회 복지 정책이 발전한 것이 원풍제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선화제, 옹희제 시대에는 겉으로 경제가 크게 발전하긴 하였으나 계급간, 지역간 경제 불평등 문제는 심각하였다. 일본 본토 내에서조차 빈민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으나 이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 위기의 반복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원풍제 시대에는 이런 점을 시정하기 위한 복지 제도가 적극 반영되어, 빈민의 수가 급감하고 전체적인 삶의 질 수준도 나아졌다. 식민지 수탈 위주로 돌아가던 대동아제국의 경제 체제도 수정되어 수탈보다는 강력한 내수 경제 시장을 통한 경제의 유지, 그리고 막대한 자원을 통한 각 지역간의 무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자리잡았다. 그 결과 대동아의 오랜 경제 위기는 잦아들었고 경제적 수준은 높아졌다.

사회정치적으로는 부정부패가 뿌리뽑혔다. 원풍제는 사회 안정을 명분으로 부패한 문민 정권에 참여하였던 수많은 정치인들을 숙청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유착하던 기업인들까지 대거 처벌을 받으면서, 부패 정치인들중 상당수가 법의 심판을 받고 자리에서 쫓녀갔으며, 이로 인하여 대동아제국 내의 부정부패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원풍제의 강력한 리더십 하에 대동아제국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사회의 활기가 되돌아왔다.

철인정치 하에서의 부작용

완풍제 시대 하에 대동아제국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완풍제의 나이가 늙어지고 정권 장악력이 약해지면서 점차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났다. 그가 세운 전제군주적 정치 체제는 완풍제의 정치적 수완이 절정에 달했을때 적절하게 작동하던 것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점차 견제 장치가 없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완풍제의 측근들이 완풍제의 권위를 빌려 사익을 위하여 전제군주적 권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정치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완풍제가 한창 국가를 재정비했던 1990~2000년대에 이런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2010년대 들어 완풍제의 정치적인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완풍제가 1990년대 대숙청으로 건립한 전제군주적 정치 시스템은 대동아제국에 짐으로 작용하였다.

2016년 완풍제는 자신의 손자인 야마시타 규이치에게 물려주고 황위에서 물러났지만, 완풍제는 상황으로서 지속적으로 정치에 간섭하였으므로 실질적인 재위기는 2019년까지이다. 그러나 단공제와 완풍제는 각각 나이가 어리다는, 혹은 나이가 너무 많다는 문제로 인해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었고, 이는 더욱 큰 체제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단공 시대 (2016~2019)

단공 시대는 보통 지순 시대와 많이 비교된다. 부정부패의 주체가 민정 내각에서 군부로 바뀌었을 뿐이지 부정한 지도 세력에 대한 반발과 개혁을 외치는 철인 군주의 등장, 그리고 쫓겨난 유약한 황제 등의 요소가 많이 비교된다. 특히나 선치 반정으로 쫓겨난 단공제의 아버지인 완풍제지순제를 쫓아내고 황위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지순제의 아들인 선치제가 단공제를 쫓아내어 재미있는 사례로 언급된다.

선치 반정

군부의 오랜 독재는 민정 권력을 주장하는 세력과, 군부 내 개혁파의 반발을 샀다. 군부는 완풍제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는 기득권화되어 하나의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또한 이로 인하여 부정부패와 같이 완풍제 초기에 해결되었어야할 수많은 문제가 반복되었으며 이는 군부 스스로가 완풍제가 표방했던 개혁 정책을 계승하지 않고 있음을 내보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완풍제의 후기부터 군부에 대한 지지율은 점차 떨어져가고 있었으며 이는 2016년 단공제의 즉위 이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독재자의 퇴임과, 새 지도자의 지나치게 어린 연령으로 인하여 더욱 심각해졌다.

군부 내에서는 초기 완풍제가 추구했던 개혁이 군부의 기득권 화로 인해 진행되지 않고 퇴보하고 있다는 비판이 대두되었고 이는 개혁파 군부라는 또다른 세력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2019년 국가를 33년간 철혈통치해온 완풍제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황제인 단공제는 20대 초반에 불과한 어린 황제였고, 이는 절대권력의 부재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보수파 군부가 사실상 황제의 역할을 섭정했지만, 이는 군부 내에서조차 반발을 이끌어내는데에 불과했다. 이로 인하여 단공제의 친정 직후부터 쿠데타가 시도되는 결과를 낳았다. 2019년 8월 완풍제의 사망 이후, 2개월간 군부 내에서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이러한 반란의 과정을 두고 선치 반정이라고 부른다.

완풍제에 의해 황제직에서 쫓겨난 지순제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인 야마시타 이에마사가 반란의 중심에 섰다. 야마시타 이에마사는 불과 16세에 불과하였으나, 군부를 이끌기에 충분한 지략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명분상으로도 불의하게 황위를 찬탈한 완풍제와 단공제로부터 황위를 다시 되돌려받는다는 목표를 내걸었기에 황위 요구의 명분이 충분하여, 군부 내 개혁파의 선봉장에 설 수 있었다. 물론 개혁파 군부 내의 주요 인사들도 반란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은 2019년 10월 7일 일본 본토와 식민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대동아제국군과 대치하였다.

대동아제국군은 야마시타 이에마사 반란군에 대항하였으나 민중적으로 보수파 군부는 지지를 잃은 상태였으며, 대동아제국군 내에서조차 개혁파 군부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한달만에 정부군측은 수세에 몰렸다. 완풍제의 쿠데타를 단 30년만에 역으로 당한 셈이었다. 단공제는 쿠데타군이 점령한 도쿄를 빠져나가, 교토에서 농성하였다. 황지(皇地)로 지정된 교토만큼은 쿠데타군이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시타 이에마사 측의 군대는 이를 단순히 무시한 이후, 교토에 총공격을 감행했고 이와중에 교토 어소가 완전히 불타 단공제가 실종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단공제의 실종으로 인하여 단공제의 행방을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도망쳤다는 설, 불에 타 죽었다는 설, 혹은 야마시타 이에마사 측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설 등이 다양한데, 이로 인해 단공제가 소련으로 망명했다, 유럽에서 목격되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현재까지 나돌고 있다. 아무튼간에 정부군 측을 제압한 야마시타 이에마사의 반란군은 도쿄에서 혁명 성공을 공표했고, 야마시타 이에마사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선치제가 되었다.

선치 시대 (2019~ )

선 황제 단공제를 쫓아내고 황위를 되찾은 선치제는 현재 대동아제국의 시대이기도 하다. 대동아제국의 최연소 황제로 즉위한 선치제의 시대는 강력한 숙청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군부의 파워가 비교적 약화되고, 문민 통치의 요소가 늘어났다.

개혁파 군부의 집권과 숙청

선치제가 이끄는 개혁파 군부가 집권하긴 했지만 선치제는 군부 역시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자신의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개혁파 군부의 핵심 인원의 토사구팽이 이뤄졌다. 그러면서도 선치제는 자신에게 핵심적인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은 남김으로서 개혁파 군부의 집권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개혁파 군부의 정당인 제국유신당의 창당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선치제가 바란 통치의 방식은 자신의 황권이 완고하면서도,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의 힘이 약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체제에 의해 황권이 유지되길 바라는 방식이었으므로, 황제의 권한을 세우고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각 파 견제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제국유신당 내부는 처음에는 개혁파 군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내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민정 정치인들도 들어왔고 내각총리대신이 1년 간격으로 교체되면서 군인 출신의 내각총리와 문인 출신의 내각 총리가 번갈아가며 집권했다. 민간인 총리가 나온 것은 1994년 이후 최초이다.

이와 같은 선치제의 황권 강화와 끊임 없이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려는 실험은 2019년부터 현재 2022년까지 지속되고있고, 그 효과는 아직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젊은 황제의 적극적인 의지에는 많은 제국 신민들이 공감하고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제국이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가 정체성

중화 황제국과 동아시아 황제국들의 정체성 비교
한·수·당·송·명 청나라 대한제국 대동아제국
종교 사상관 공유 O X
중화 천자 칭제 O O X O
중화 본토 지배 O O X O
한족의 지지 O X X
역대제왕묘 배향 O O X O

대동아제국은 일본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국가이지만, 대동아 정부는 자국을 일본과 그 국체가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동아제국의 국체는 동아시아 그 자체로, 일본 하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인 모두가 함께 발전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대동아는 법적으로는 일본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총합이다. 그에 따라 대동아제국은 꽤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대표 문화권인 중화 황제국을 계승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국가 원수의 명칭도 천황이 아닌 황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아의 황제는 단순히 일본의 천황위만을 계승하는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대동아의 황제는 일본 천황, 조선 국왕, 몽골 대칸, 중화 황제, 대월 황제, 인도제국 황제 등 여러 동아시아 문화권의 국왕위와 황제위를 계승하고 있다. 즉, 대동아제국은 일본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일본 하나만이 대동아가 된 것이 아니라, 조선, 몽골, 대만, 중국 등 수많은 국가들이 뭉쳐 대동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동아가 중화 황제국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이 중화이므로 중화를 계승함으로서 동아시아 문화 전체를 대표한다는 일종의 중화 사상에 입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리

후지산

대동아제국의 영토는 동아시아 전체와 오스트랄라시아, 남아메리카 북부, 중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서부, 그리고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걸쳐있어 매우 방대하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이며, 지구의 최북단부터 최남단까지 영토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토가 몹시 방대하다. 서쪽으로는 벵골부터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접하며, 남북으로는 각각 북극과 호주에 접한다.

기후적으로는 일본 본토가 온대기후와 열대기후, 냉대기후의 양상을 띄며 전반적으로 국토는 온대기후를 띄는 곳이 많다.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은 열대기후를, 북부 시배리아와 몽골 일대는 냉한대기후의 양상을 띄기도 한다. 몹시 풍부한 자연 환경 때문에 대동아제국 내에서 이동하는 것이 거의 해외여행 수준일때도 있으며, 해외에서도 대동아의 풍부한 자연 환경을 보기 위해 대동아제국을 많이 방문한다.

대동아제국이 접해있는 바다로는 일본해, 황해,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이 있다. 서쪽으로는 인도양에 접해있으며, 대동아제국의 영토가 크게 둘러싸는 바다는 일본양이라고 부른다. 본래 이름은 태평양이었으나, 대동아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이 태평양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며 일본양(日本洋)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주요 도시

제국 내에서 가장 큰 도시는 도쿄이다. 도쿄는 행정구역상 인구가 800만, 광역 전체 인구는 4,000만명에 달한다.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이며 도쿄 본궁이 위치하는 도시로서 제국의 수도 역할도 한다. 그 외에 여러 기업의 본사와 정치 시설들이 위치하여있다. 두번째로 큰 도시는 쇼카이이며 호쿠쿄, 오사카, 교토, 횻코, 쇼가이, 가미나토, 가와우치, 라사쓰, 도키도 등이 큰 도시로 꼽힌다.

제국의 수도는 당연히 내각총리대신 관저, 국회의사당, 정부청사와 도쿄 본궁이 위치한 도쿄이다. 도쿄에 이은 제2의 수도는 교토로, 규모는 작지만 수천년동안 일본의 수도로 있었으며 1945년까지도 대일본제국의 수도였다. 이후 대동아제국이 건국되며 도쿄 천도가 이뤄졌다. 1857년부터 1860년까지는 아시카가번의 우츠노미야시가 제국 수도로 기능했으나, 현재는 문화재가 많은 소도시에 불과하다. 다만 우츠노미야 행궁이 존재하여 황제가 요양 측면으로 방문하곤 한다. 제국의 수도는 제국수도법을 통해 도쿄로 법적으로 지정되어있다. 동시에 교토도 제2의 수도이자, 도쿄가 수도로서 기능할 수 없을때의 수도로 명시되어있다.

행정구역

대동아제국의 행정구역
大東亜帝国の行政区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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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의 행정구역 지도
大東亜帝国の行政区域
    국경     관구    
데이코쿠혼토 (帝国本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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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니혼도 (日本都) 도쿄 (東京) 137,185,000명
조센현 (朝鮮県) 게이조 (京城) 81,625,000명
다이완현 (台湾県) 다이호쿠 (台北) 16,331,000명
총합 235,141,000명
만슈 (満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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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기쓰린현 (吉林県) 나가하루 (長春) 25,040,000명
료네이현 (遼寧県) 신요 (瀋陽) 50,784,000명
구로가와현 (黒川県) 가쓰지 (合爾) 30,896,000명
오키야스현 (興安県) 가무가야 (熊谷) 7,890,000명
총합 114,610,000명
모고 (蒙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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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가이모고현 (外蒙古県) 고린 (庫倫) 8,089,000명
나이모고현 (內蒙古県) 고와 (呼和) 5,524,000명
준지현 (準爾県) 우로모쿠 (烏鲁木) 6,741,000명
즈가현 (圖瓦県) 고쿠시 (克子) 621,000명
누노사토현 (布里県) 우오란 (烏蘭) 1,560,000명
총합 22,535,000명
사이하쿠 (西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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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세이기쓰린현 (西吉林県) 우라지오 (浦塩) 2,564,000명
교쿠호쿠현 (極北県) 기타야마 (北山) 1,710,000명
호나카바현 (火半県) 미네미나토 (嶺港) 800,000명
총합 5,074,000명
지나 (支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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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가와기타현 (河北県) 홋쿄 (北京) 204,426,000명
야마니시현 (山西県) 세이안 (西安) 154,954,000명
요가와현 (四川県) 세이토 (成都) 121,518,000명
고소현 (江蘇県) 난쿄 (南京) 145,563,000명
고호쿠현 (湖北県) 무칸 (武漢) 88,700,000명
훗겐현 (福建県) 쇼가이 (上海) 106,000,000명
고세이현 (江西県) 난쇼 (南昌) 112,058,000명
고도현 (広東県) 가미나토 (香港) 208,000,000명
운난현 (云南県) 군묘 (昆明) 81,357,000명
총합 1,222,576,000명
난호 (南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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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호쿠에쓰현 (北越県) 가와우치 (河內) 52,470,000명
난에쓰현 (南越県) 사이공 (柴棍) 50,300,000명
헤루코현 (減木県) 요네자와 (米沢) 16,946,000명
후케루야마현 (老山県) 만쇼 (万象) 8,100,000명
타이슈현 (泰州県) 가타나쿠 (方哭) 70,000,000명
마쓰에이현 (抹平県) 쓰야마 (津山) 32,776,000명
난쥬도현 (南中島県) 가미노야마 (上山) 315,300,000명
리쓰인현 (建賓県) 나가와 (明川) 111,046,000명
총합 656,938,000명
도인도 (東印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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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니시구라현 (西蔵県) 라사쓰 (拉薩) 3,300,000명
아마야마현 (尼山県) 다카무라 (高村) 25,000,000명
후탄현 (不丹県) 호젠 (法善) 779,000명
아산현 (阿參県) 야마가와 (山川) 41,240,000명
헤이본현 (丙盆県) 기씨가쓰 (吉且) 252,258,000명
멘란현 (緬懶県) 요슈 (陽州) 57,500,000명
총합 380,077,000명
교쿠난도 (極南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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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호리시마현 (濠島県) 도키도 (時斗) 32,700,000명
나오시마현 (直島県) 히가시네 (東根) 5,000,000명
소도시마현 (小豆島県) 신켄 (新硏) 24,000,000명
총합 61,700,000명
호쿠비슈 (北美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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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가자무라현 (風間浦県) 가와야마 (川山) 58,600,000명
이소로쿠현 (五十六県) 도리가타 (鳥形) 12,300,000명
노시로현 (能代県) 소후자와 (曽布沢) 6,000,000명
이나고자와현 (稲子沢県) 야마다 (山田) 10,000,000명
총합 86,900,000명
쥬비슈 (中美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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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다카하마현 (高浜県) 고노우라 (神野) 42,500,000명
미야즈현 (宮津県) 교탄고 (京丹後) 26,000,000명
요나고현 (米子県) 이와미 (岩美) 5,600,000명
이세노미야현 (伊勢県) 오하다 (島根) 18,240,000명
오난현 (邑南県) 이와데 (岩出) 10,800,000명
하마다현 (浜田県) 히로가와 (広川) 6,200,000명
가마현 (嘉麻県) 히다카 (日高) 6,700,000명
오노다코현 (小野田県) 오다키가와 (大滝川) 5,000,000명
다나베현 (田辺県) 이나미 (印南) 4,680,000명
총합 125,720,000명
난비슈 (南美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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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이시하마현 (石浜県) 아이사이 (愛西) 51,000,000명
안조현 (安城県) 이와데 (垂井) 18,700,000명
오타가와현 (太田川県) 나가하마 (長浜) 35,000,000명
총합 104,700,000명
특수행정구 (特殊行政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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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청 소재지 인구 수
도도쿠엔구 (東德園区) 아고쿠 (阿克) 706,000명
니혼요도구 (日本洋島区) 요쥬 (洋中) 2,200,000명
시란구 (錫蘭区) 노베오카 (延岡) 45,700,000명
마쓰시마구 (末島区) 우치코 (内子) 35,500,000명
총합 84,106,000명
제국 전체
3,002,121,000명

대동아제국의 행정구역은 (都), (県), (区)로 나뉘어져있다. 하나로 뭉쳐 "도현구제"라고 하기도 한다. 도현구제가 시행되는 지역은 총 57개인데, 그중 52개, 비율로는 91.2%가 현이다. 나머지 5개중 4개는 구이고 1개는 도이다.

관구 (管区)

관구(管区 (かんく))는 공식적인 대동아의 행정구역 체계는 아니지만, 문화권이 비슷한 지역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불리는 명칭들이다. 현재 총 12개의 관구가 존재한다. 각 관구의 인구는 들쭉날쭉인데 가장 인구가 적은 관구는 5백만의 사이하쿠 관구이고 가장 인구가 많은 관구는 12억명의 지나 관구이다.

도, 현, 구와 달리 독자적인 정부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관습적으로만 불리는 지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들의 기준이 된다. 대표적으로 국영 전기 기업인 대동아 전기 회사는 12개 관구에 따라 각 지부가 존재하며 이는 대동아 제국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각 관구별로 기준이나 언어 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규모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 인문적인 이유로 12개 관구는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관행적 행정구역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제국 전반에 미치고 있다.

관행적 행정구역이라는 것은 군대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군대는 각 관구에 따라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 애시당초에 관구라는 것이 나누어진 기준도, 각 군대 지휘부가 통솔하는 현에 따른 것이다. 총 12개의 관구에서 지휘부가 존재하며 이 지휘부는 대동아제국군 대본영의 지휘를 받는다. 당연히 각 관구별로 처한 환경도 다르니, 그 특색도 다양한데, 가령 겨울에 온도가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사이하쿠 관구의 육군은 최고 수준의 방한력을 자랑하고 반대로 밀림 지대가 넓게 분포한 난호 관구 지역의 육군은 밀림 지역에서도 엄청난 기동성을 선보인다. 이에 따라 각 전장의 특성에 따라 특정 관구의 군을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대동아제국의 군대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특수행정구는 그 어떠한 관구에도 속하지 않는데, 특수행정구들을 묶어 아예 하나의 관구로 취급하고 있다. 다만 이 지역은 육해공군의 통솔권에 있지 않으며 이 지역들은 말 그대로 군사적, 안보적으로 특수한 행정이 시행되는 지역이기에 황제 직할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도 (都)

대동아의 유일한 도급 행정구역인 니혼도

도( ())는 도현구에서 가장 상위권에 속하는 행정구역으로 현재 대동아제국에 설치된 도급 행정구역은 제도(帝都) 도쿄와 제2수도 교토가 위치한 니혼도가 유일하다.

도지사는 현의회에서 선출되는 현지사와 달리 직선으로 선출되며, 이는 대동아제국의 모든 행정구역 수장중 유일하게 직선으로 선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지사의 권한은 현지사나 구의 총독에 비해 격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원제로 이루어져있는 현의회와 달리, 도의회는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어져있다. 도 자체가 받는 예산도 구나 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도는 그야말로 니혼도와 같이 제국의 중심지에만 설치될 수 있는 특별한 행정구역 등급이다.

니혼도지사는 보통 대동아제국 황제, 대동아제국 내각총리대신, 태정령막군에 이은 대동아제국 내 권력 서열 4위로 분류된다. 즉 직선으로 뽑히는 공직자중 가장 그 권력이 높기 때문에 4년에 한번 치뤄지는 니혼도지사 선거는 모든 제국 신민들의 관심을 받는다. 다만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가 치뤄진 것은 1990년대까지의 이야기이고, 원풍제 집권 이후 민주적 절차 상당수가 폐지됨에 따라 현재는 니혼도지사 선거에서 대체로 군부 출신 후보가 7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하고 있다. 물론 30~40% 가량을 문민 후보가 받는 이례적인 경우도 있다.

선치제선치 반정으로 집권한 이후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니혼도를 폐지하고, 니혼도를 황실 직할의 황도로 삼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대신 조센현을 조센도로, 다이완현을 다이완도로 승격시키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고 기쓰린현, 료네이현, 구로가와현, 오키야스현을 전부 합쳐 만쥬도를 만드는 구상도 나온다. 아직까지는 니혼도 정부 측의 반발이 크기 때문에 선치제가 마음 먹고 니혼도 정부 인사들의 목을 전부 치지 않는 이상은 니혼도 폐지 후 황실 직할령 편입이 어렵지만, 현재 추세로 봤을때 니혼도 폐지는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현 (県)

현( (けん))은 대동아제국의 광역행정구역 단위중 가장 보편적인 단위의 행정구역이다. 총 57개의 도현구급 행정구역중 90%에 달하는 52개의 도현구급 행정구역이 현으로 분류되어있다. 인구상으로 보자면 제국 인구인 30억명중 28억명이 현 단위의 행정구역에서 살고 있다.

현의 인구는 많게는 3억 1,530만명(난쥬도현)에서 적게는 62만명(즈가현)에 이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작은 현의 경우 500만명에서 2,000만명, 많은 현의 경우 8,000만명에서 1억명 정도 되는 것이 일반적인 규모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지나 관구와 같이 인구 수가 너무 많아서 해당 관구에 속하는 거의 모든 현의 인구 수가 1억명이 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너무나도 인구가 많은 현들을 제외한다면 500만명~4,500만명이 평균치이다.

각 현의 규모가 제각각 다르고 환경도 다르기 때문에 각 현은 인구 비례에 맞추어 예산이 배정된다. 군부대가 많거나 수용소가 존재하는 등 특수 목적으로 예산이 많이 필요한 현의 경우 보통 현의 각 예산을 심사하는 중의원이 아니라 각 업무에 맞는 부서가 따로 예산을 책정하기에 문제가 없다. 다만 재해가 발생했거나, 폭동이 발생한 지역 등은 특별히 더 많은 예산을 얹어주기도 한다.

현 정부 기관의 최고 수장은 현지사이며 현지사는 현의회의 다수당에서 선출한다. 현재는 대동아제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으나, 중앙정부가 아닌 현의회에서는 여전히 군부의 힘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으므로 현지사에서 간혹 민정 출신의 정치인이 뽑히기도 한다. 물론 군부의 정당인 제국유신당만이 대동아제국 내 유일 합법 정당이기에, 민정 출신의 정치인이더라도 이는 군부를 지지하는 테크노크라트 정도에 불과하고 진짜로 군부에 대항하는 민정 정치인들은 현의회 내에서 매우 소수의 파벌만을 이끌고 있다. 현의회는 주민들의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며 현의회 의석은 10만명당 한석으로 결정된다. 다만 5,000만명 이상의 현에서는 50만명당 한석, 1억 이상의 현에서는 100만명당 한석이다.

특수행정구 (特殊行政区)

마쓰시마구가 위치한 마쓰시마섬의 항공 사진

특수행정구(特殊行政区 (とくしゅぎょうせいく))는 대동아제국의 도현구를 구성하는 단체중, 가장 자치권이 낮은 지역이다. 현재 총 4개의 지역인 도도쿠엔, 니혼요도, 시란, 마쓰시마에 설치되어있다. 이 지역들은 그 어떠한 관구에도 낄 수 없을정도로 변방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특수한 행정 체계가 작동되고 있다. 특행구(特行区 (とく ぎょう く))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특수행정구에는 보통 총독이 파견되며, 구의회는 선출되지만 그 권한은 제한적이다. 또한 지역에 군 부대가 다수 설치되어있어 안보 문제로 인하여 거주의 자유가 잘 보장되지 않는다. 안보 유지를 위하여 주민들은 강도 높은 감시를 받으며, 전쟁이 일어날 시 가장 먼저 징병될 수 있도록 군사 훈련도 하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본토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이기에, 비신민(정치범들과 흉악범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해 지어진 강제노역 수용소들이 존재한다. 이로 인하여 대동아제국 내에서 특수행정구는 매우 기피되는 거주지이다. 본토의 유력 정치인들이 이곳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은 대게 좌천, 심지어는 숙청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4]

시란구마쓰시마구의 인구가 많긴 하나 절대 다수가 3~4등 신민이다. 1등 신민의 비율은 단 0.6%에 불과하고 2등 신민도 2.5%밖에 안된다. 비신민의 비율은 무려 27.3%로 모든 지역중 최고를 달린다.[5] 수용소에 수감된 비신민들이 탈옥할 시 이들을 잡기 위해 곳곳에 CCTV와 같은 방범 장치들이 설치되어있어 사실상 이 지역을 무사히 벗어나는건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도도쿠엔구는 드넓은 중앙아시아의 사막이, 나머지 구역은 엄청나게 넓은 인도양일본양을 건너야하기 때문에, 탈옥에 성공하더라도 5년 이상 살아남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오히려 이런 혹독한 환경 때문에 탈옥했다가 자수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을 정도.

대동아 본토에서 떨어져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촘촘한 특행구의 치안 체계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마쓰시마섬의 경우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밀림 어딘가에는 대동아 공안계에서는 전설로 내려오는 의열단일본 공산당이 명맥을 유지하여 대규모 봉기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수용소에 수감되어있지 않은 비신민이나, 일반 주민들은 보통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마쓰시마구니혼요도구에는 원주민들 역시 살고 있으며, 이들은 제4신민으로 분류되어 독자적인 삶을 살아간다. 시란구마쓰시마구는 섬의 규모가 꽤 크기 때문에, 농업이 잘 발달되어있고 울창한 밀림을 이용한 관광업 등도 발달했다. 니혼요도구의 경우 작은 일본양 섬들로 구성되어 어업이 주를 이룬다. 한편 도도쿠엔구는 지역의 80%가 사막인 관계로, 인구 수가 이들 지역중 가장 적은 70만명 정도이다. 도도쿠엔구의 주민들은 보통 목축업에 종사한다.

도도쿠엔구모고 관구에 합류하여 현으로 승격되기를 바라고 있다. 실제로 즈가현이 1985년 주민 투표에서 93.7%의 찬성으로 특수행정구에서 벗어나 현이 된 사례가 있었다. 다만 즈가현은 모고 관구의 다른 지역과 문화적인 동질감이 컸고, 단지 인구수만 극적으로 적어서 특수행정구가 된 사례였기 때문에, 본토에서도 멀고 문화도 이질적인 다른 특행구와는 차이가 있다. 본국에서도 도도쿠엔구의 현 승격은 고려사항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사이하쿠 관구의 호나카바현교쿠호쿠현을 구로 강등시키는 안을 고려중이다. 만약 이것이 실현된다면, 사이하쿠 관구는 세이기쓰린현만이 남게 되므로, 사이하쿠 관구 자체가 해체되고 만슈 관구의 일부로 포함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황제와 황실

대동아제국 황실의 상징인 일장기

대동아제국의 황실(大東亜帝国皇室 (だい とうあ ていこく こうしつ))은 대동아 정치의 중심이자 모든 권력의 정점으로, 살아있는 신인 황제를 비롯하여 각 황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매우 강력하다. 원풍제 시대에 폐지되었으나 황족들은 군사 교육을 받고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각종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황권이 강해지는 반면 황족들이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그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일개 장관/총독급,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황족의 말이 곧 헌법에 준한다는 수준의 말을 들을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원풍제선치제의 황족 대숙청으로 인하여 황족의 수가 10여명 수준으로 정리된 상태이다. 방계 가문들도 3개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고, 그 외에 특권을 누리던 황족들 대다수는 선치 반정지순 헌정 위기라는 두번의 황족 주도 쿠데타 과정에서 대숙청을 당해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거나 목숨을 잃었다.

대동아제국 황제


대동아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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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동서분열 동위 - 효정제 남제 황조 제고제 | 제무제 | 소소업 | 소소문 | 제명제 | 소보권 | 제화제
서위 - 문제 | 폐제 | 공제
북조 효소제 | 무성제 | 고위 | 고항 소량 황조 양무제 | 양간문제 | 양효원제 | 양경제
북주 - 주민제 | 주명제 | 주무제 | 주선제 | 주정제 진(陳) 황조 진무제 | 진문제 | 진백종 | 진선제 | 진숙보
수당 시대
수 황조 수문제 | 수양제
당 황조 당고조 | 당태종 | 당고종 | 당중종 | 당예종 | 측천무후 | 2차 재위 당중종 | 당상제 | 2차 재위 당예종 | 당현종 | 당숙종 | 당대종 | 당덕종 | 당순종 | 당헌종 | 당목종 | 당경종 | 이오 | 당문종 | 당무종 | 당선종 | 당의종 | 당희종 | 당소종 | 이유 | 2차 재위 당소종 | 당애제
오대십국시대
오대 황조 주전충 | 주우규 | 주우정 | 이존욱 | 이사원 | 이종가 | 이종후 | 석경당 | 석중귀 | 유지원 | 유승우 | 유빈 | 곽위 | 시영 | 시종훈 십국 황조 자립 정권
송금 남북조시대
송 황조 송태조 | 송태종 | 송진종 | 송인종 | 송영종(英) | 송신종 | 송철종 | 송휘종 | 송흠종 요 황조 요목종 | 요경종 | 요성종 | 요흥종 | 요도종 | 천조제
남송 황조 송고종 | 송효종 | 송광종 | 송영종(寧) | 송이종 | 송도종 | 송공제 | 송단종 | 송소제 금 황조 금태조 | 금태종 | 금희종 | 해릉양왕 | 금세종 | 금장종 | 위소왕 | 금선종 | 금애종 | 금소종
서하 황조 하태조 | 하의종 | 하혜종 | 하숭종 | 하인종 | 하환종 | 하양종 | 하신종 | 하헌종 | 말제
원명청시대
원 황조 원세조 | 원성종 | 원무종 | 원인종 | 원영종(英) | 원진종 | 천순제 | 원문종 | 원명종 | 2차 재위 원문종 | 원영종(寧) | 원혜종
명 황조 홍무제 | 건문제 | 영락제 | 홍희제 | 선덕제 | 정통제 | 경태제 | 천순제 | 성화제 | 홍치제 | 정덕제 | 가정제 | 융경제 | 만력제 | 태창제 | 천계제 | 숭정제
순 황조 이자성
청 황조 천명제 | 숭덕제 | 순치제 |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 가경제 | 도광제 | 함풍제 | 동치제 | 광서제 | 선통제 | 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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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 제9대 황제 선치제
大東亜帝国の国家元首である時、国体である皇帝陛下はアマテラスオミカミの子孫で生きている神であり、皇帝陛下神から与えられた絶対的な権力として大東亜帝国を統治される。 神から出る権力である大東亜帝国皇帝の権力は絶対不可侵であり、皇帝陛下の代理人、そして皇帝陛下の新河である大東亜帝国神民は、皇帝陛下の名に絶対服従する義務を負う。
대동아제국의 국가 원수이시자, 국체이신 황제 폐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으로 살아있는 신이시며, 황제 폐하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적 권력으로서 대동아제국을 통치하신다. 신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인 대동아제국 황제의 권력은 절대 불가침이며 황제 폐하의 대리인, 그리고 황제 폐하의 신하인 대동아제국 신민들은 황제 폐하의 명에 절대복종할 의무를 지닌다.

대동아제국 황국헌법 제1호

대동아제국 황제(大東亜帝国皇帝 (だい とうあ ていこく こうてい))는 대동아제국의 국가 원수로 전제적인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헌법에 따라 황제는 대동아제국의 국체(國體)로서 대동아제국 그 자체와 같은 위치에 있는, 신격화의 대상이다. 현 황제는 제9대 황제인 야마시타 이에마사(山下 (やました)家正 (いえまさ))이며 연호는 선치(善治)이다. 대동아 황제의 성은 야마시타(山下 (やました))이다.

본래 대동아의 전신인 일본에서 국가 원수의 자리에 있던 것은 천황(天皇 (てんのう))이었다. 그러나 과거 무로마치 막부 정이대장군의 머나먼 후손인 아시카가 번의 하급 무사 출신이었던 야마시타 쿠로가네가 일으킨 군사 정변인 천무 유신 이후 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과 함께 천황 자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일본제국 황제(大日本帝國皇帝 (だい にっぽん ていこく こうてい))가 대신하였다. 천황은 종교적인 의미까지 더해진 상징적 존재였기에 반발이 컸고, 유신 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까지 이어져, 1860년 천무제가 직접 자신이 진정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임을 표방하였다. 물론 이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며, 황제는 신의 자손이기에 신격화의 대상으로 높여야한다는 황권 강화의 목적이 크다.

대일본제국의 황제 자리는 1857년부터 1945년까지 거의 100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선화제의 치세에 대동아전쟁제2차 일중전쟁 등의 여파로 일본제국의 영토가 크게 넓혀지면서, 1945년 9월 2일 선화제는 더이상 일본만의 제국이 아닌 모든 동아시아의 국가가 하나되어 발전하는 제국이라는 의미의 대동아제국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대일본제국 황제의 이름은 "대동아제국 황제"로 바뀌었다. 동시에 선화제동군연합을 통하여 대동아제국 황제가 일본 천황 뿐만 아니라 중화 황제, 인도 황제, 조선 국왕, 몽골 카간, 대남 국왕, 러시아 차르, 태국 국왕, 마자파힛 국왕, 네팔 국왕, 부탄 국왕 그리고 일본양의 보호자, 아프리카의 보호자, 아메리카의 보호자를 겸하여 재위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있다. 원풍제단공제 이후로는 로마 황제 역시 겸하고 있다.

황제의 정식 명칭은 일본 천황, 중화 황제, 인도제국의 황제, 조선국의 국왕, 몽골의 카간, 대월국의 국왕, 태국의 국왕, 마자파힛 왕국의 국왕, 네팔 왕국의 국왕, 부탄 왕국의 국왕, 티베트, 일본양과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보호자이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이신 현인신(現人神) 대동아제국의 황제 폐하(日本天皇、中華皇帝、インド帝国の皇帝、朝鮮国の国王、モンゴルのカガン、大月国の国王、タイの国王、マザパヒッ王国の国王、ネパール王国の国王、ブータン王国の国王、チベットと日本洋とアフリカとアメリカの 保護者であり、アマテラスオミカミの子孫である現人神大東亜帝国の皇帝陛下)이다.

대동아제국 역대 황제 목록
대수 연호 묘호 시호 출생 사망 즉위 퇴위
1 천무 열조 고황제 1826 1910 1857 1905
2 의양 세종 경황제 1860 1932 1905 1930
3 숭녕 환종 예황제 1861 1934 1930 1934
4 선화 성종 태황제 1904 1987 1934 1987
5 옹희 강종 영황제 1940 1994 1987 1994
6 지순 문종 장황제 1975 2005 1994 1996
7 원풍 헌종 현황제 1943 2019 1996 2016
8 단공 - 2000 ?[6] 2016 2019
9 선치 현 황제 2003 2019

대동아제국 내에서 황제가 가지는 권력은 절대적이다. 대동아제국 헌법 제1조에서부터 신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인 대동아제국 황제의 권력은 절대 불가침이며 황제 폐하의 대리인, 그리고 황제 폐하의 신하인 대동아제국 신민들은 황제 폐하의 명에 절대복종할 의무를 지닌다라고 명시되어있다. 물론 현대국가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고 대부분의 정사는 그 분야의 전공자들인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와, 실질적으로 정부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동아제국군이 맡지만, 대동아제국의 황제는 이러한 모든 정치의 흐름을 뒤집을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군사 정변이 일어났을때 군사 정변의 수장은 대동아제국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아야하며 인정을 받지 못할 시 자진하여 해산하거나 심지어 할복 자살을 하기까지 한다. 혹은 아예 황제가 직접 친위 쿠데타 혹은 정변을 주도하기도 하는데, 지순 헌정 위기를 통해 즉위한 원풍제선치 반정으로 즉위한 선치제가 그 예시이다.

대동아제국 황제가 개혁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선화제 시기 터진 대동아 사회투쟁의 결과로 문민 통치 시기가 이루어졌으나 이 개혁은 전적으로 선화제가 주도하여 이뤄진 것이다. 반대로 부패한 정치인들을 숙청하고 군국주의적인 철인 통치 개혁을 내세운 1990년대 일본의 정책 방향은 원풍제가 주도했다. 현재는 선치제가 군부와 민정 양쪽 모두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자신만의 전제권력을 세우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대동제국 황제가 살아있는 신으로서 압도적인 전제권력을 가지고 대동아의 신민들은 모두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대동아의 황제를 반대하는 과격한 좌파 세력이나 내부 독립파들은 국체를 부정한 죄로 즉결 처형된다.

당연히 대동아제국의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나 이슬람, 힌두교 등의 다른 종교들은 절대적인 탄압과 멸시의 대상이며[7] 무신론, 이신론, 범신론적 성격이 강한 불교만이 그 세력을 유지하는 중이다.

황실

야마시타 가문의 가몬

대동아제국의 국성은 야마시타(山下 (やました))이다. 야마시타 가문은 아시카가 번에서 대대로 하급 무사로 지내오다가, 유신 전쟁을 통하여 일본을 평정하고 황제 자리를 차지하였다. 일반적인 대동아 시민들은 야마시타라는 성을 쓸 수 없고 다른 한자더라도 발음이 같으면 안된다. 이는 아마테라스 신의 자손이자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가미)인 대동아 황제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야마시타 가문으로 구성되는 황실은 작게 보았을때 황제의 가족들로 구성되지만, 방계 출신의 황족들도 많다. 다만 황제와 8촌 이상의 관계를 가진 황실 구성원은 그때부터 황제 계승권을 상실받으며 황적도 박탈되어 일반 귀족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8촌 지간이더라도 황제의 사촌은 황제의 사촌이기에, 이들은 귀족중 가장 급이 높은 공작이나 2번째로 급이 높은 후작위를 서임받는다. 한편 황제와 가까운 황족이더라도, 여성 황족이 평민 남성과 결혼할 경우 황적을 박탈당한다. 귀족과 결혼할 경우 황적은 유지하나, 그 자손은 황족이 아니라 일반 귀족이 된다.

집안 싸움이 극심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제6,7,8,9대 황제는 정상적으로 재위를 시작하거나 마친 적이 없을 정도이다. 제6대 황제인 지순제는 제7대 황제인 원풍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였으며, 게이조고쇼에 유폐되었다가 30세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반대로 원풍제의 손자인 제8대 황제 단공제는 지순제의 독자인 제9대 황제 선치제가 일으킨 선치 반정 도중 실종되었다.[8] 이런 존속 살해는 계속 이어져, 선치제에 의해 원풍제의 묘소는 파묘되고 시신은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외에 원풍제와 관련된 총 26명의 황족들이 지순 헌정 위기 당시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사형당하거나 유폐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구 황족들이 제거된 결과 현재 제대로 황족 대우를 받는 황족들은 10명이 채 넘지 않는다.

추밀원

대동아제국 추밀원(大東亜帝国推密院 (だい とうあ ていこく すい みつ-いん))은 대동아제국 황제의 자문 기관으로, 대동아제국 중의원, 대동아제국 귀족원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의사 결정 기구는 아니다. 총 70명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철저히 황제에게 자문만을 할 뿐, 법에 대한 표결을 하지 못하며 인사권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추밀원 의원은 오직 백작 이상의 귀족만이 될 수 있으며, 황제에 의해 해임되지 않는 한 영구히 추밀원 의원으로 재직할 수 있다. 명목상 선거로 선출되는 중의원과 달리 추밀원은 황제가 모든 의원을 직접 임명한다. 따라서 추밀원 의원이 되는 것은 늙은 귀족들이나 무공을 세운 장수들, 유력 정치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명예로 여겨진다.

현재는 중의원 의원에 있어서도 과반 이상을 황제가 임명하기에 추밀원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다. 의회 해산, 의회 소집, 총리 해임 등의 사안에 있어서 추밀원을 관례적으로 소집한다. 하지만 황실 업무에 있어서는 여전히 큰 역할을 맡으며, 황실의 예산 등 황제가 직접 다루기 곤란한 여러 업무들을 도맡는다. 그렇기에 추밀원은 의회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실청

도쿄에 위치한 황실청의 모습

황실청(皇室庁 (こうしつ-ちょう))은 황제를 직접적으로 보좌하는 기구로, 황제를 보좌하는 또다른 기구인 대동아제국 추밀원을 상위 기구로 두고 있다. 아무리 추밀원의 권한이 강하더라도 추밀원이 황제와 황족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으므로 일반 사무와 같은 잡무들은 거의 다 황실청이 맡는다고 할 수 있다. 황제 책봉이나 예산 책정같은 중요한 일은 추밀원이 결정하는 일이지만 이것도 사실상 황실청의 업무를 통해 도출된 여러가지 선택지중 추밀원이 그중 어느것이 가장 나을지를 토론하는 것에 가깝다. 황실청은 재무와 같은 딱딱한 업무 뿐만 아니라 황제와 황족의 시종을 들고, 어소를 관리하며 황실 기록물을 관리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 때문에 실록을 편찬하는 황실 사관부터 일개 요리사, 하인들까지 전부 황실청 직원으로 등록되어있어 황실청의 규모는 매우 거대하다.

황실청장은 추밀원 의원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직접 임명한다. 황실청장의 임기는 2년으로 정해져있지만 황제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연임하는게 가능하고 반대로 해임될수도 있다. 황실청장에는 주로 급이 높은 공작급의 귀족이나, 정부 또는 군부의 고위급 인사를 앉히는게 관례로 되어있다.

황실청의 본청은 도쿄고쿄 바로 옆에 위치해있다. 그 외에도 교토고쇼, 게이조고쇼, 홋쿄고쇼, 세이안고쇼 등 제국의 거의 모든 어소에는 황실청의 분청이 붙어있다. 황실청 본청의 직원 수는 약 750명이며 분청까지 전부 합치면 9,000명~13,000명의 규모이다.

정치

대동아제국 국회의사당 (도쿄 소재)

대동아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로, 황제에게 무한한 전제 권력이 주어진다. 또한 제국주의, 군국주의, 전체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군부가 가지는 힘이 정치계 전반에 강력하게 작용한다. 의원내각제가 표면적으로 시행되고 있어 내각총리대신의 권력도 존재하나, 내각총리대신은 1996년 이래 줄곧 군인들만이 돌아가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쟁을 담당하는 전쟁성은 아예 내각에서 독립되어, 군 지휘권자인 태정령막군이 전쟁성을 통솔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대동아제국 내에서 대동아제국군은 곧 정부와도 같다.

그러나 문관 정치인들이 가지는 권력도 미약하게나마 있다. 군인들이 모든 분야에서는 뛰어날 수는 없기에, 내각의 2/3을 기술 관료, 즉 문관 테크노크라트로 채우기 때문이다. 대동아제국 대장성을 필두로 한 경제 부처는 특히나 문관 정치인들의 힘이 강력하다.

1970년부터 1996년까지 약 26년간 대동아 자유당민정정우회로 대표되는 중도우파 세력과 중도좌파 세력이 양당제를 구성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문민 내각책임제를 시행하였던 적도 있었다. 이 시대는 비록 계급별 차등이 있긴 했지만 보통 선거의 요소가 도입되고 언론 자유와 인권의 개념이 미약하게나마 수립되는 등 민주적인 체제가 자리잡았다. 이 시기는 문민 통치 시기라고 불리며 대동아제국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적 체제가 도입된 때로 불린다.

그러나 거듭되는 부정부패와 경제 위기에서의 미흡한 대처는 민중들로부터 민정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민주정의 민중 지지 상실은 지순 헌정 위기라는 군부의 쿠데타로 인한 파시즘적 군국주의 독재 체제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문민 정권을 지지했던 지순제의 아들인 선치제지순 헌정 위기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목 하에 일으킨 선치 반정 이후에도 문민 통치는 요원하며 도리어 황제 중심의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민주주의적 요소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오히려 일반 대중들은 문민 정부와 군부의 무능에 치를 떨어 이러한 민주주의 후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어 앞으로 대동아 내에서 민주주의가 도입되기란 힘들어보인다.

선치 반정 이후, 선치제에 의한 전제 군주 권력의 강화가 이뤄지고 있어 군부 역시 원풍제 시대만큼의 권력을 가지지는 못하고 있다. 군부에서 임명하던 태정령막군을 자신이 직접 임명하게하였고, 국회의원의 60%를 자신이 임명하게 해 군부의 의회 장악을 무산시켰다. 군부가 유일의 정당인 제국유신당을 장악하고 내각총리대신도 배출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이는 황제의 어용 조직에 불과하고 현 내각총리대신 역시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문관 총리이다. 군사독재의 기본적인 요소는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개혁이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각

대동아제국 중앙성청
大東亜帝国中央省庁
1부 12성 23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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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의 내각은 대동아제국 황제를 보조하는 정부 기구로서, 황제가 일일히 개입하기 힘든 세밀한 국가 운영을 도맡는 정부 기관이다. 내각은 총 1개의 부와 12개의 성, 그리고 23개의 국으로 이루어져있다. 구조는 성(省)이 부(府)의 하위 기구로서 존재한다.

대동아제국 내각부의 휘하에 12개의 성이 있다. 내각부의 수장인 대동아제국 내각총리대신은 12개 성의 수장인 대신을 임명한다. 대신은 장관과 같은 역할을 맡으며, 그중 가장 격이 높은 대동아제국 대장성의 수장인 대동아제국 대장대신이 부총리를 맡는다. 하지만 이는 정해진 것이 아니며 파워게임에 따라 전쟁대신이나 사법대신과 같은 다른 부처의 대신이 부총리를 맡을 수도 있다. 각 성의 대신들은 내각총리대신의 의사를 통해 임명, 해임되지만, 명목상으로 황제의 동의를 얻어야한다. 뿐만 아니라 황제는 내각총리대신의 동의 없이 대신을 해임하고, 추천할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인사권에 있어서 각 성이 반드시 내각부의 밑에 있는 것은 아니다.

대동아제국 정보성은 특이하게 내각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중앙성이다. 따라서 대동아제국 정보대신대동아제국 황제가 직접 임명하며, 내각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런 초법적인 권한은 1945년 대동아제국 선포 이후부터 시행되어왔으며, 이 때문에 정보성은 내각에 속하면서도 내각이 아닌 그 무언가로 여겨지고 있다. 아예 정보성을 내각총리대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흑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정보성이 가지는 힘이 강력하다. 물론 정보성도 일반적으로는 내각 전체와 따로 노는 경우는 드물고, 단지 황제의 직속 기구로서의 특수성만이 존재하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동아제국의 중앙성중에서는 대동아제국 대장성, 대동아제국 전쟁성, 대동아제국 정보성, 대동아제국 내무성의 급이 가장 높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 부처의 대신들은 부총리급의 의전을 받으며, 이 4개 부처의 대신에서 가장 많은 부총리가 배출되었다.

대동아제국은 군국주의 국가이지만 모든 부처가 군인 출신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인들이 국가 운영에 있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다보니, 핵심적인 몇개 부처만을 제외하면 나머지 부처는 군인들에 순종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문민 관료인 테크노크라트로 채워진다. 일반적으로 외무성, 내무성, 정보성, 전쟁성을 제외한 다른 부처에 군인 출신이 배치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동아제국 대장대신은 그런 문민 테크노크라트중에서도 가장 권한이 높기 때문에, 군부의 폭주를 제어하는 문민 통치의 브레이크로 작용하고 있다.

내각총리대신


대동아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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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치 시대
임시
유타보쿠 아카쓰킨
제83대 섭정
다테바야시 류노스케
인세이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아즈치모모야마 · 에도 · 내무경

내각총리대신은 대동아제국의 정치 전반을 통솔하는 최고위 공무원이다. 내각총리대신은 보통 집권당의 당수이며, 중의원과 귀족원에서 투표로 선출된다. 총리가 되기 위해서 특별한 자격은 필요 없으나 연령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는 16세 이상이어야한다.

또한 1996년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현재까지 문민 총리가 나온적이 없다.

총리의 임기는 정해져있지 않다. 무제한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총리의 임기는 보통 짧으면 1년, 길면 8년 정도로 여겨진다. 정치적 혼란 등을 이유로 수개월만에 사퇴하는 총리도 적지 않다. 내각이 사퇴하였을때는 군부의 수장인 대동아제국 정이대장군이 섭정하기도 한다. 현재도 내각 성립이 안되었기 때문에, 정이대장군이 섭정 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내각총리대신은 반드시 황제의 임명을 받아야한다. 이는 1970년대부터 1996년까지, 즉 민정 통치 시기에는 관례로서만 존재했지만, 1996년 이후로 황권이 강해지며 진짜로 황제가 총리를 직접 임명하는 구조가 되었다. 황제가 총리 임명을 거부하면 총리로서 임기 시작이 불가하며 반대로 황제가 자신의 의지로 총리를 해임하는것도 가능하다.

의회와 선거

대동아제국 귀족·중의원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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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바야시 류노스케 정이대장군 섭정
2021.08.10 ~
유일 합법 정당

제국유신당
350석 600석
좌측은 귀족원(상원) 의석 수, 우측은 중의원(하원) 의석 수

대동아제국 중의원이 하원의 역할을, 대동아제국 귀족원이 상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상원에는 오직 귀족들만이 출마할 수 있으며, 중의원은 신분에 상관 없이 누구나 출마할 수 있다. 중의원은 4년에 한번씩, 귀족원은 2년에 한번씩 1/3을 선출하나 그 임기는 유동적이기에 의회 해산이 이뤄지면 중의원의 임기는 더욱 짧아질 수도 있다. 귀족원 선거는 오직 귀족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반면에 중의원 선거는 거주 지역에 따른 차등이 있긴 하나 보통선거제도의 확립으로 자유로이 투표가 가능하다.

이는 이론적인 이야기이고 1996년 이후 정상적인 선거가 치뤄진적은 단 한번도 없다. 1996년 지순 헌정 위기 이후 귀족원은 헌법 개정으로 전부 지명직으로 바뀌었고 중의원 의원 500명중 350명을 황제가 직접 임명하게 하여 정상적인 내각제를 붕괴시켰다. 2019년 선치 반정 때는 한술 더 떠서 중의원 의원 수를 600명으로 늘렸는데 그중 300명을 황제가 임명하게 했고 나머지 300명중 50명은 추밀원 추천, 50명은 분야의 전문가가 선출되는 직능 의석이라 실질적인 민선 의원은 200명밖에 안되었다. 그마저도 선치제가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자신의 친위 조직인 개혁파 군부가 주도하는 제국유신당만을 유일한 합법 정치 조직으로 지정하여, 선거의 의미를 없애버렸다.

정당

정당명 이념 스펙트럼 의석수
제국유신당
帝国維新党
황정제 파시즘
전체주의
극우
600 / 600 (100%)
2019년 선치 반정 이전 원내 정당 및 파벌
군정
파벌
제국결집회 (파벌)
帝国結集会
온건 근황주의
동아민족주의
극우
160 / 500 (32%)
헌치동지회 (파벌)
憲治同志会
강성 근황주의
보수주의
극우
137 / 500 (27%)
민정
정당
대동아 민정공치회
大東亜民政公治会
자유주의
온건 개혁주의
중도 ~ 중도좌파
64 / 500 (13%)
대동아 자유당
大東亜自由党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중도우파 ~ 우익
60 / 500 (12%)
안민정우회
安民政友会
군국주의
황정제 파시즘
우익 ~ 극우
17 / 500 (3%)
사회민주전선
社会民主戦線
사회민주주의
온건 사회주의
중도좌파
4 / 500 (0.8%)
기타 파벌 및 무소속 의원
58 / 500 (12%)

제국유신당가 존재하기 전인 원풍제단공제의 시대에는 황제가 특별한 정치 조직을 만들지는 않은 대신, 무소속 의원들끼리 황제의 친위를 도모하는 회파를 만들어 활동했다. 150석정도는 민선이었기에 기존 양당이었던 민정공치회와 자유당의 영향력도 상당했으나, 실권은 군부와 황제의 지지를 받는 회파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원풍제의 정치적 판단력이 흐려진 원풍제 후기와 단공제 초기 시대에 무소속 의원들끼리 권력을 위하여 민정과 담합해 군부와 황권 강화보다는 자신의 실권을 챙기며 파벌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치제가 도입한 것이 정당 전면 금지와 제국유신당의 유일정당화이다.

그나마 내각책임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던 197~90년대에는 황제가 추천하는 귀족원 의원 30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의석이 보통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때는 중도 진보 성향의 대동아 민정공치회와 중도 보수 성향의 대동아 자유당의 양당제가 이뤄졌다. 마지막 선거 당시의 의석은 민정정우회가 500석중 264석을, 자유당이 189석을 차지하고 있어 양당의 의석이 총 90.6%에 달했다. 그 외에 군부의 지지를 받는 극우파 안민정우회가 23석을, 강경 진보 성장진보당이 16석을, 중도파 대동아 신생당이 4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의회 해산과 동시에 이들 정당은 영향력을 상실했고 2019년 선치 반정을 통해 전부 해산되기에 이른다.

군인들의 파벌로는 크게 대동아제국의 영토 팽창을 주장하는 강성파 헌치동지회와 판도의 현상 유지를 주장하는 온건파 제국결집회가 대립하였다. 헌치동지회는 강성한 근황주의를 주장하였고 제국결집회는 문민 관료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들은 모두 황제의 임명직 의원들이었으므로 각 파벌의 이념이나 주장하는 바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지 않았고 단지 이권 다툼의 모임이었을 뿐이었다. 그 외에도 5~7개의 군소 파벌들이 존재하여, 헌치동지회와 제국결집회의 대립에서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 담론

대동아제국의 정치 세력
← 좌익   우익 →
비합법 민간
비집권세력
집권세력
비국민 문민파 보수파
(통제파)
개혁파
(황도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립파 자유주의
(진보파)
보수주의
(보수파)

대동아제국 내에서는 황실 중심주의, 국수주의, 제국주의, 제한적 민주주의가 가장 주된 정치 이념으로 기저에 깔려있다. 황정제를 폐지해야한다는 공화주의자나 반제국주의자들은 제국 내에서 별종 취급을 받는다. 매우 강경한 민족주의 역시 특징으로, 동아시아 민족들이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일종의 민족주의 의식은 대동아제국 전체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과도 같다. 또한 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제한되어야한다는 사고 역시 널리 퍼져있다.

진보파와 보수파에 따라 제국주의, 국수주의, 제한적 민주주의 등의 여러 이념들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진보파는 황국신민 민족주의팽창주의로 대표되며, 보수파는 순혈민족주의안정으로 대표된다. 진보파가 주장하는 황국신민 민족주의란 인종과 민족에 상관 없이 대동아제국의 황국신민들은 모두 제국의 일원으로 여겨야한다는 사상이며, 순혈민족주의는 반대로 야마토인 및 동아시아인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권리를 줘야한다는 사상이다. 또 진보파는 제국의 영토 팽창을 지지하는 반면에, 보수파는 현재 영토의 유지와 치안의 강화에 초점을 둔다. 황권에 대해서는 양측이 비슷한 입장을 내고 있다. 진보파와 보수파 둘 다 극단적인 국수주의 및 제국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같다고 할 수 있다.

1996년부터 2019년까지는 보수파 군부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2019년 선치 반정으로 인하여 보수파 군부는 쿠데타로 인해 몰락했다. 2019년 이후로는 개혁파 군부를 대표하는 황제 친위 정당인 제국유신당이 정치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민정 통치를 지지하는 세력은 현재로서는 와해된 상태이다.

사회주의, 사회자유주의, 직접 민주주의와 같은 담론들은 각광받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탄압받는다. 1970~1996년간의 민정 통치 시기에는 자유주의가 진보 정당의 주요 담론으로 올라섰으나, 1996년 군부의 쿠데타 이후 급격히 보수화된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자유주의 분파 내에서 사회자유주의는 사실상 전멸했고 남은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들도 보수적 자유주의로 회귀한 상태이다. 이마저도 2019년 2차 군부 쿠데타로 대부분 멸절되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헌법에 따라 추종 및 관련 결사 조직이 비합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온건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연장선으로 유일하게 허가되었지만, 이 역시 정부의 집요한 탄압을 받아야만했다. 민정 통치 시기에조차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반제국주의, 반황실 이념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대중적으로 기피되었으며 공안에 의해 이들이 탄압되는 일도 빈번했다. 1996년과 2019년에 있었던 두번의 쿠데타를 통해 현재 사회주의자들은 대동아 본토 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중앙 정부의 힘이 비교적 미약한 특수행정구 정도에서나 볼 수 있다.

경제

세계 최강대국으로 30억에 달하는 막대한 인구와 높은 경제적 수준으로 인하여 전세계 GDP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경제적 극초강대국이다. 세계 시가총액 상위 기업 50개중 41개가 대동아제국 국적의 기업이며, 세계 부호 상위 30인중 27명이 대동아인일정도로 대동아제국은 현재 전 세계의 경제 패권을 쥐고 있는 국가이다.

지역별로 각 산업이 고루 발전하여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금융업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최강을 달리고 있다. 세계 석유의 11.5%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란과 아메리카 대륙 중부를 영향력 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 산업에서도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정유 산업이 발달했기에 중동으로부터 석유를 넘겨받고 이를 정제해 되팔기도 한다. 이러한 자원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수출에 두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수출액은 세계 1위 규모이고, 30억이나 되는 내수 시장 때문에 수입액도 최대라 그야말로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금융업이 크게 발달하여, "과거에 금이 모두 중국으로 모였다면 이제 모든 돈은 대동아로 모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의 금융 시장을 꽉 잡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 게이조증권거래소, 가미나토증권거래소, 가와야마증권거래소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거대한 증권거래소로 그중에서도 도쿄증권거래소는 한번 사건사고가 터졌다하면 세계 증시가 휘청일정도로 전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만 빈부격차가 심한 국가이다. 1등 신민들은 매우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 2등 신민은 중산층 수준의 삶을, 3등 신민과 4등 신민은 이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나 3~4등 신민의 빈민층들은 거의 노예나 다름 없는 대우를 받으며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민정책을 통해서 인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시민들을 3~4등 신민으로 받아주고는 있지만 이들중 대다수는 막노동자로 생활한다.

원풍제 시대에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 제도가 신설되면서 빈민층의 삶은 매우 나아졌다. 그러나 전국민적으로 사회진화론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대동아제국 내에서는 오히려 복지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군수비로 돌려야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하층민의 폭동을 막고 최소한의 경제 순환 시스템을 유지해야한다는 대동아제국 후생성대동아제국 대장성을 필두로한 문민 경제 관료들의 반론이 존재한다.

통화

대동아제국 화폐의 인물
- 1차 (1945년) 2차 (1978년) 3차 (2000년)
1엔 후쿠자와 유키치 기도 다카요시 니토베 이나조
5엔 나쓰메 소세키 미야자와 겐지 가야마 미쓰로
10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20엔 사카모토 료마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50엔 노기 마레스케 야마시타 도모유키 야마모토 이소로쿠
100엔 쇼토쿠 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대동아제국의 화폐는 대동아제국 엔이며, 현재 1엔과 5엔, 10엔, 20엔, 50엔, 100엔이 대동아제국 중앙은행에서 발행되어 사용되고 있다. 엔보다 더 작은 단위로는 센이 있는데, 100센이 1엔이며 현재 1센, 5센, 10센과 50센 동전이 발행되어 사용된다. 한편 엔은 모두 지폐로만 존재한다.

대동아 중앙은행은 대동아제국의 모든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 기구로서 본부는 도쿄에 위치한다. 발행권은 오직 대동아 중앙은행에만 존재하므로, 사적으로 유통하는 모든 화폐는 위조지폐로 간주된다. 대동아제국의 영토가 방대한만큼 모든 엔과 센이 도쿄에서 발행되는건 아니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화폐 발행국은 모두 대동아 중앙은행의 직속 기구이다.

화폐의 전면에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있고, 뒷면에는 또다른 역사적 위인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5엔과 10엔에는 문학가가, 20엔과 50엔에는 근현대 정치인 및 군인이, 100엔에는 대일본제국 건국 이전의 역사적 인물이 그려지는게 관례로 하고 있으며, 현재 화폐의 인물은 총 2번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동전에는 풍경화가 그려져있고 이는 발행 이후 현재까지 바뀐 사례가 없다.

군대

대동아제국군

대동아제국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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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1884 천무제
1905 의양제
1930 숭녕제
1934 선화제
1987 옹희제
1994 지순제
1996 원풍제
2016 단공제
2019 선치제
정이대장군
1884
1900
1910
1920
1930
1940
1950
1960
1970
1990
1980
2000
2010
2020
사카모토 료마
가쓰라 다로
구로다 기요타카
미나미 지로
사이토 마코토
야마시타 도모유키
도이하라 겐지
스즈키 데이이치
츠지 마사노부
미나모토 겐지
히카루 고이치
오카자키 유바이치
스즈키 센이치로
다테바야시 류노스케
육군 원수
1886
1904
1912
1934
1944
1983
2000
2020
야마가타 아리모토
노기 마레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야마나시 한조
마쓰이 이와네
고노 히로타카
아사카 노무타로
히라오케 고지로
해군 원수
1898
1913
1940
1957
1993
사이고 주고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에다 미츠쿠니
오구라 사다스케
공군 원수
1942
1954
1986
2009
2021
오니시 다키지로
우타다 아레자와
모리 오토보마치
이토 마쓰노부
가와바타 겐타로
우주군 원수
2021 다카노 요시마사
황제 · 정이대장군 · 전쟁대신
대동아제국군
大東亜帝国軍 (だい とうあ ていこく ぐん)
표어 萬族平和 東亜解放
만족평화 동아해방
군종 대동아제국 육군
대동아제국 해군
대동아제국 공군
대동아제국 우주군
통수권자 대동아제국 황제 (선치제)
지휘·감독권자 대동아제국 정이대장군 (다테바야시 류노스케)
군령권자 대동아제국 대본영
상비군 15,752,000명
예비군 408,113,000명
병역 제도 징병제

전세계적으로 가장 군사력이 강력한 국가이다. 예비군만 4억명에 달하며 여기다가 동맹이자 속국으로 두고 있는 다른나라의 군대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동아제국군의 전신인 일본군은 1850년대부터 착실한 근대화를 거쳐 동양 최초의 근대화 군대로 거듭났다. 처음에는 미숙한 면이 많았지만, 1894년 제1차 일중전쟁에서 청나라를 꺾은 이래 점차적으로 군대가 발전하여 1934년에는 중국을 멸망시켰고 이후 세계적인 강대국들과 세계 전쟁을 치룰 수 있을만큼 군사력이 발전했다. 1945년 대동아전쟁을 통해 영국과 미국, 캐나다를 굴복시키고, 1954년에는 극동전쟁으로 소련을 우랄산맥 너머로 쫓아냈다. 또한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 해방전쟁으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 아프리카 영향력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동아제국군은 특별한 큰 교전을 치루고 있지 않으며, 반제국 세력과의 산발적인 교전이나 국제적인 분쟁에 주로 관여하고 있다.

대동아제국군의 막대한 힘은 국제적으로 대동아제국이 강력한 외교력을 가지는데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다. 또한 강력한 군을 통하여 속국이나 동맹국이 대동아제국군에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함에 따라 대동아제국의 내부적인 패권을 유지하는데에도 기여한다. 현재 상황에서 전세계 군대가 연합해도 대동아제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군사외교적인 힘 역시 강력하나, 대동아제국군은 특히 정치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선화제부터 지순제까지 이어진 문민 통치 시기에는 군대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1996년 지순 헌정 위기를 통하여 군부가 문민통치파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이래로 보수파 군부가 권력을 독점해왔다. 이후 2019년 선치 반정을 통해 군부 내 집권 세력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군부가 정계에 행사하는 막대한 영향력은 현대까지 이어져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소년병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15세에서 17세 사이의 나이에 군인이 되며, 이 때문에 2019년 선치 반정 이후 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10대에서 30대 사이에 있는 청년들이다. 현 정이대장군인 다테바야시 류노스케는 20세, 합참의장인 히라오케 고지로는 26세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35세 이상을 넘지 않는다.

또한 여성들의 입영을 거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군 내에서 동성애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1~30대 군인들의 73% 정도가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애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대동아제국군 내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1950년대 이후 군 내 동성애자 비율은 결코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 않아 여성 입영을 허용해야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현 군 수뇌부와 정부 수뇌부 역시 대부분이 1~30대 청년 장교들로 구성된만큼 절대 다수가 동성애자로 분류된다.

정이대장군


대동아제국 정이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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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사카모토 료마
제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3대
사이고 주도
제4대
사이온지 긴모치
제5대
구로다 기요타카
제6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7대
가쓰라 다로
제8대
노기 마레스케
제9대
가쓰라 다로
제10대
고다마 겐타로
제11대
모리 오가이
제12대
야마나시 한조
제1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제14대
사이토 마코토
제15대
요나이 미츠마사
제16대
미나미 지로
제17대
도이하라 겐지
제18대
야마시타 도모유키
제19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20대
스기야마 하지메
제21대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22대
스즈키 데이이치
제23대
사나다 조이치로
제24대
츠지 마사노부
제25대
야마시타 도시나카
제26대
오카다 데츠히데
제27대
에다 미츠쿠니
제28대
히카루 고이치
제29대
아리가타 요치스케
제30대
미나모토 겐지
제31대
이토 하야다바시
제32대
아베 보로쿠
제33대
카오루 미치타다
제34대
아야자키 나츠시
제35대
오쿠보 미네유키
제36대
시마다 요시
제37대
구로다 한겐
제38대
미조구치 세이켄
제39대
호소카와 모리히로
제40대
스즈키 센이치로
제41대
이치노타니 겐타로
제42대
다니자키 키리마루
제43대
오카자키 유바이치
제44대
긴코 요리미치
제45대
겐지 다루가야바시
제46대
호소다 나오미치
제47대
스즈키 슌이치
제48대
다테바야시 류노스케
황제 · 내각총리대신 · 가마쿠라 막부 · 무로마치 막부 · 에도 막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은 과거 에도막부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 가마쿠라 막부에서 천황을 대신하여 사실상 일본 전체를 다스리는 군인 출신의 정치적 지도자를 의미하였다. 12세기부터 19세기 중기까지 정이대장군은 국가 원수나 다름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특히나 도쿠가와 가문이 다스린 에도 막부가 유명한 편이다. 1857년 천무제천무 유신을 통하여, 마지막 도쿠가와 정이대장군이 시해되면서 정이대장군직이 공석이 되었지만, 천무제 스스로도 무사 출신이었던만큼 무인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 자체는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아, 정이대장군 직 자체는 유지하였다.

그러나 종전의 정이대장군들과 달리, 가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정이대장군의 직이 황제의 임명직으로 개편되면서 더이상 정이대장군은 천황 위에 군림하는 제2의 국가원수라고 부르기 어려워졌다. 오히려 대동아제국의 황제를 보좌하고, 황제의 명을 따라 정치 분란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황제의 직속 신하에 가깝게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선직인 총리와 달리 정이대장군은 살아있는 신인 대동아제국 황제의 임명직인만큼 큰 권력을 가진다. 특히나 지순 헌정 위기 이후 군부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정이대장군은 총리에 이은 권력 서열 3위로 부상하였다. 선치 반정 이후로는 총리가 몇개월 주기로 교체되면서 총리를 꺾고 압도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되었다.

정이대장군의 업무는 "황제 호위"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명예직 정도로 간주될 때도 있다. 하지만 정이대장군이 가지는 진정한 권력은 장관직 역임에서 나온다. 정이대장군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최고 보좌 공무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기본적으로 발언권도 높을 뿐더러, 황제가 특정 부처의 장관에 정이대장군을 앉히게 함으로서 내각을 견제하기도 한다. 정이대장군은 보통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정보대신 자리에 앉으며, 때에 따라서는 전쟁대신은 물론 총리직까지 차지해 군 통수권을 장악한다. 또한 내각불신임이나 총리 해임 등으로 인하여 내각에 공백이 생길 시, 정이대장군이 섭정을 맡기도 한다. 현재 정이대장군인 다테바야시 류노스케는 내각총리대신(섭정), 전쟁대신, 정보대신 직에 앉아있어 내각의 1인자로서 활동하는 중이다.

정이대장군의 임기는 보통 2년에서 4년정도이며 황제가 주기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 짧으면 1년 안에 교체할 수도 있다. 정이대장군 직은 기본적으로 군부 내 최고위직인만큼, 군부 전체의 수장이라는 인식이 강하여 정이대장군직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군부 내에서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오히려 황제가 이를 통해 군부를 견제하기도 한다. 물론 정해진 임기는 없기 때문에, 황제의 의중만 있다면 무제한적으로 연임시키는것도 가능하다.

파벌

대동아제국군 내 3대 파벌
개혁파 (황도파) 보수파 (통제파) 문민파

대동아제국군의 군부는 크게 3개의 파벌로 갈라져있다. 제국 체제의 개혁과 팽창주의를 주장하는 개혁파, 현상 유지와 보수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보수파 그리고 군대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는 문민파가 그것이다. 보통 문민파는 문민 정치인들과 합쳐 문민통치파로 불리고 있으므로 보수파와 개혁파는 더욱 군대의 이익을 주장하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개혁파 군부와 보수파 군부로 불린다.

문민파는 1970년대부터 1996년까지 25년이 넘는 세월동안 대동아제국 군대를 주도하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와 군사가 철저히 구분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세력이었으므로 중앙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들은 1996년 원풍제의 주도로 일어난 지순 헌정 위기 당시 비주류로 물러났고 문민파에 속하던 몇몇 군인들조차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로는 보수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보수파의 보수적인 정책 추구와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에 대동아 국민들이 피로감을 느끼던 면이 컸고, 결정적으로 군부 내에서조차 점차 썩은 물이 되어가던 보수파에 대한 비토 감정이 높아졌기 때문에 2019년 개혁파가 주도하는 선치 반정을 통하여 보수파는 대대적으로 몰락했다. 이후로는 개혁파와 이들을 대표하는 선치제가 정권을 잡고 있다.

각각의 파벌들은 모두 군부에 기반을 둔 만큼, 우파/보수주의적인 정치관을 공유하지만 사상이나 외교 면에서 다른 면을 보인다. 문민파는 중도우파적 자유주의를, 보수파는 우파적 보수주의를, 그리고 개혁파는 극우적 결속주의를 주장하는 조직이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개혁파는 기타 잇키 등 파시스트 사상가들이 기반이 된 황도파가 발전한 조직이고, 반대로 보수파는 선화제 시기 때에 주로 주도권을 잡았던 통제파에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국제 평화를 중시하는 문민파와 달리, 보수파는 힘에 의한 균형을 중시하고 개혁파는 압도적은 군사력을 통한 팽창주의적인 사상을 견지한다.

군 내에서도 지지층이 각각이 갈리는데 문민파는 주로 군대 내 관료들에서, 보수파는 고령 군인들에게서, 개혁파는 청년 장교들에게서 주로 지지를 받고 있다.

사회

화족

대동아제국 육등작(六等爵)

황제

왕작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일대화족

황제 밑에 왕작,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구분되는 육등작이 존재하며 이들을 통칭하여 화족이라고 부른다. 화족은 서양의 귀족과 같으며 대체로 세습된다. 하지만 세습되지 않는 특별한 귀족의 경우 일대화족이라고 부르며, 일대화족의 경우 왕작부터 남작까지 다양하게 서임될 수 있다. 다만 왕작에 책봉되는 일대화족의 경우 세습 왕작 가문인 이왕, 만왕, 월왕, 섬라왕(왕후작)[9] 및 황제의 친인척 가문(황공족)과는 구분되며 한단계 아래로 대우받는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경우 일대화족과 세습화족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대동아제국의 30억 인구중 세습 화족은 그중 약 1.7%인 51,435,703명이며, 일대 화족의 경우 4,019,477명으로 집계되어 전체 화족은 55,455,180명으로 추산된다.

왕작

대동아제국의 제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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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에 해당하는 화족에 속하지만, 그보다 더욱 급이 높은 공작 및 후작 이상의 등급이 되는 화족들을 의미한다. 황공작, 왕후작, 일대왕작이 존재한다. 일대황작은 현재 아무도 서임되어있지 않다.

황공작

방계 황족을 위한 제후왕 작위로는 황공족이 존재한다. 이는 중화 황제국에서의 친왕 또는 군왕의 자리와 같다. 황공족은 왕후족과 같은 위치에 있지만 이름만 황제의 친척이라는 의미에서 황공족이 된 것이다. 현재 총 3개의 방계 가문이 황공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방계 황족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황제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경우에만 황공족이 될 수 있다. 혹은 몇몇 사례에서 황제가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황적을 가진 공작을 일대 황공족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황공족을 구성하는 3개 가문인 호소카나 방계족, 햐아토 방계족, 규이치 방계족은 세습 작위이며, 그 외의 황공작들은 모두 일대 황공작들이다. 그러나 현재는 3개 가문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이 황공작으로 서임되어있지 않으므로, 일대 황공족은 없다.

왕후작

왕후족(王侯族 (おうこう-ぞく))은 대동아제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과거 왕족이었으나 현재는 대동아 황제의 신하가 된 왕작 가문들을 뜻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공작 가문이지만, 황제 바로 밑에 있는 최상위권 왕작으로 대우받는다. 즉 중화 황제국에서 제후왕의 자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제후왕은 이왕, 만왕, 월왕, 섬라왕 그리고 서장왕(달라이 라마)로 나뉘어진다.

현재 대동아제국에서 제후왕 자리를 자치하고 있는 왕후족은 전주 이씨 왕족(조선 국왕), 짜끄리 왕조(태국 국왕), 응우옌 왕조(대월 국왕), 아이신기오로 왕조(대청 국왕) 이렇게 총 4개 가문이다. 이중 짜끄리 왕조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왕조는 본래 황제국의 황족이었으나 대일본제국 시대에 일본 황족에 복속되어 황위를 빼앗겼으며, 대동아제국이 건국된 이후 일개 공작가에서 격이 높아지긴 하였으나 황족이 아닌 제후왕족으로만 격상되었다. 가문은 아니지만 티베트 불교의 수장이자, 현재 명목상 티베트의 국왕인 달라이 라마 역시 왕후족으로 분류되기에 대동아제국의 왕후족은 4개 가문에 1개 재위를 포함하여 총 5개가 되게 된다.

작위 명칭은 이왕, 만왕, 월왕과 같지만, 이들은 조선이나 대월, 대청 등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옛 왕조로서 존중받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수장이라는 특수한 위치를 인정받아 티베트의 수장으로 왕후족중 유일하게 재위하고 있으나 대동아제국 황제가 티베트의 보호자를 겸하므로 이 역시 국왕위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적인 공작가와는 명백하게 구분되어, 대동아제국 황제와 황실에 다음가는 의전을 누리고 있다.

왕후작은 황제의 지시만 있으면 얼마든지 추가가 가능하지만, 1945년 월왕섬라왕 작위의 생성 이후 현재까지 그 어떠한 세습 왕작 가문도 새로 생기지 않았다.

일대왕작

국가에 매우 큰 공을 세운 귀족에게 부여하는 최고 순위의 작위로, 현재 금왕(金王), 천축왕(天竺王), 제왕(齊王), 진왕(秦王) 작위가 존재한다. 이들은 세습으로 왕위를 물려주지는 않으며 대우 역시 5대 왕후작 가나 황공족보다 낮게 취급된다.

왕후작은 기본적으로 5개 가문만이 인정받기 때문에 아무리 공을 높게 세워도 세습 왕족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일대왕작에 서임되는 것이 귀족들에게는 가장 큰 명예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황제가 일대 왕작을 받은 귀족의 자녀에게 또다시 같은 왕작을 줌으로서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물론 이 경우는 매우 적거나 혹은 그만큼 해당 귀족이 큰 공을 세웠을때 생기는 일이다. 보통 일대왕작의 자녀는 왕작에서 한단계 아래인 공작으로 서임된다.

천축왕은 이름은 왕이지만 실제로는 인도제국의 총독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지역의 총독들은 대부분 공작 내지는 후작으로 서임받지만 인도제국의 총독은 그 중요성이 남다르기에 왕작으로 서임된다.

인종 구분

1등 신민

일본 본토, 즉 니혼 열도, 다이완 섬, 류큐 제도, 조센 반도, 만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제1신민으로 대우받는다. 이 지역들은 제2차 일중전쟁 이전에 대일본의 영토에 편입된 지역으로, 동화의 수준이 매우 높아 반란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제1신민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제1신민으로 규정된 민족은 야마토인으로 야마토인은 과거 일본 열도에 거주하던 본토인, 조선인, 대만인 그리고 일부 협화인들을 의미한다. 만슈 지역에 거주하는 협화인들은 일부가 야마토인으로 규정받고 있으며 일부는 제2신민인 지나인으로 분류된다. 기준은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만주족이거나 여진족들은 대부분 야마토인으로 인정받고 있고, 만주에 살더라도 지나 본토 출신의 한족이라면 지나인으로 간주된다.

제1신민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대동아제국의 중심에 있는 민족이다. 그 수는 약 3억명 정도로, 전체 대동아 인구의 5~6% 정도이다. 그야말로 특권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귀족 서임, 정계 진출, 회사 설립 등 여러 분야에서 대동아제국 정부에 의한 특혜를 받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 및 구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탈 경제와, 높은 수준의 금융업 및 서비스업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전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다. 대동아제국 전체의 일인당 명목 GDP가 4만 5천엔수준인데, 제1신민들의 명목 GDP는 무려 15만엔에 달한다. 일반 대동아인에 비해 3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본토가 아니라 지나, 남방 지역,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상당수의 제1신민이 살고 있으며 전체 3억 1등 신민중 5천만명 정도가 본토 외부에서 거주한다. 이들은 야마토인들이거나 야마토인들의 후손들이다. 야마토인이 제2,3,4신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기피되는 일일 뿐더러 그 자식은 낮은 계급으로 격하된다. 또한 야마토인일지라도 조선, 대만, 만주의 독립을 주장하거나 공산당에 가입하는 등의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비신민으로 신분이 격하된다.

2등 신민

제2신민은 대동아제국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최대 민족으로, 지나인과 모고인을 포함한다. 이들은 주로 지나만슈, 모고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예전에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이민을 간 일부 지나인들도 제2신민에 포함된다.

최고 상류층인 야마토인에 비하면 소득 수준과 권리는 적지만 그럼에도 중산층 이상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다른 지역에 비교해봤을때 매우 높고, 지나 자체가 인구가 10억이 넘는 꽤나 방대한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는지라 야마토인들만큼이나 부유한 제2신민들도 상당하다. 또한 대동아제국이 명목상으로 중화 황제국을 표방하고 있는지라, 중화 황제국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몽골과 중국 지역은 정치적인 상징성이 매우 커서 제2신민중에서 중의원 의원과 같은 고위직 공무원에 오르는 사례도 빈번히 찾아볼 수 있다. 애초에 지나인들과 모고인들의 외양이 야마토인들과 큰 차이가 없기에, 말해주지 않으면 아예 모를정도로 야마토에 동화된 지나인들도 매우 많다.

이들은 대동아 인구 30억중 약 12억명 정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고위층인 제1신민과 하류층인 제3~4신민 사이에 낀 중간계급으로서 대동아제국의 전반적인 생산성을 이끌고 있다. 대체로 고위직이 많은 야마토인이나, 3D 직업에서 자주 종사하는 제3~4신민과 달리 제2신민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하여 샐러리맨, 농민, 노동자, 고위 공무원, 기업가 등으로 분포하고 있다. 말 그대로 대동아제국 내에서 중위 계층에 속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등 신민

제2신민에 이어 대동아제국 내 제2의 인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인구는 10억 이상이다. 이들은 동남아시아인들로 구성되며, 주로 남방 지역과 인도 지역에 거주한다.

주로 막노동판이나 농사 일과 같은 3D 직업에 종사한다. 인구 70%정도는 중위에서 저소득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며, 20%는 저소득, 10%는 중위에서 고소득 수준의 재력을 가지고 있다. 인구의 90%정도가 사회 하류층으로 분류되는만큼, 이들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육체 노동에 주로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대동아제국 내 농업 생산량의 약 86.3%를 제3신민들이 부담하고 있다. 일부는 지나로 이주하여 소작을 받아 농사를 짓기도 하는데, 이들 소작농의 소득 수준은 높지 않다.

본래 동남아인들이 지나인들이나 야마토인들의 외양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는만큼, 인종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정치적, 사회적인 권한은 철저히 제한되어있고, 중앙 정치계에 진출하는 제3신민들도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들중 일부는 높은 재산을 축적하여, 제2신민이나 야마토인에 필적하는 높은 재력을 쌓은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으며 대다수는 동남아 지역에 넓게 펼쳐진 농작지 및 공장 지역에서 근무하는 것이 현실이다.

4등 신민

종교

이세신궁

국가 무신론에 가까운 수준으로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이 시행되는 국가이다. 비교적 무신론적인 색체가 강한 불교는 교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전체 인구의 42%정도만이 불교를 믿고 있고, 나머지 인구의 대부분은 무종교인들이다.

그러나 대동아제국 정부가 국가 무신론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대동아제국 제국헌법에 따르면 황제가 곧 신이기 때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종교가 박해받는 것. 대동아제국의 법에서 대동아제국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국가신토는 종교가 아닌 국가를 지배하는 사상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불교를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사를 방문하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동아제국 정부는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는 선이라면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있지만, 이슬람교, 정교회, 개신교, 가톨릭 등 유일신 종교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 등이 "불온 종교"로 지목되어 큰 탄압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1960년대 종교 조사에 따르면 전 인구의 20%정도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자였지만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과, 민중들의 아브라함 계통 종교 혐오 정서로 인하여 현재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겨우 1.2%정도만을 차지하고 이마저도 황제를 어쩔 수 없이 제2의 신으로 인정하는 등 기존의 종교 교리와는 많이 멀어진 상태이다.

이런 종교 탄압은 대동아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속국에서도 제도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국가신토를 국가 사상으로 취급하고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는 등의 정책이 이뤄졌기 때문에, 이를 밑바탕할 세속주의적인 정책이 추진되었고 따라서 현재는 대동아제국과 그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에서 종교가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잃어가는 형국이다.

교육

언어

인권

문화

영상물

문학

음악

음식

외교

브리타니아 제국과의 관계

작가의 말

중화 황제국의 황위, 귀족 작위, 그리고 일본의 전근대 역사 등 대부분의 면에 있어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작가의 지식적 한계로 인하여, 현재 설정을 쓰면서 사학도나 일본 역사, 중국 역사를 전공하신 분들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고 있다. 피드백을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각주

  1. 국가신토는 명목상으로 종교가 아닌 사상이기 때문에 종교로 집계되지 않는다. 국가신토와 불교를 둘 다 믿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2. 번역기를 돌린 것이기 때문에 더 나은 번역이 있다면 관련 전공자들이 추천 바람.
  3. 중의원 선거가 치뤄지긴 하였으나 민선 의원이 75명에 불과했던 반면 황제 지명 의석이 200석, 추밀원 지명 의석이 50석에 달했다.
  4. 이를 반영하듯이, 1998년에 원풍제에 의해 니혼요도구 총독으로 임명 받은 전직 관방장관 가야마 테츠로가 임명 소식을 듣자 기뻐하기는 커녕 울었다는 소문이 있다. 가야마 테츠로는 대표적인 문민파 정치인이었으므로 군부 통치를 선호한 원풍제의 눈에 띄었고, 따라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주류이다.
  5. 참고로 2위는 사이하쿠 관구이다. (21.2%) 이 지역 역시 혹독한 수용소로 유명하다.
  6. 2019년 선치 반정 도중 교토고쇼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실종 상태. 스위스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고 타죽었거나 선치제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설 등 소문만이 무성하다.
  7. 1990년대까지는 그래도 기독교인들을 봐주자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순 헌정 위기 이후로는 기독교도들은 얄짤없이 제4신민이나 비신민으로 강등된다.
  8. 선치 반정 당시 단공제가 몸을 숨기고 있던 교토고쇼대동아제국 공군의 네이팜탄이 떨어져 어소 전체가 불에 탔는데, 그후 행방이 묘연하다.
  9. 서장왕작의 경우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도 세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문으로 보기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