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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달도 안되어 갑작스럽게 정몽준과 국민통합21이 연정 파기를 선언하며 연정에서 이탈하며 노무현 내각은 시작부터 휘청이게 된다. 그래서 노무현 총리가 손수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동정론이 불었고, 직후 열린 [[제3회 대한제국 전국동시지방선거 (동방의 등불)|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신민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신민당 내에서 이북을 기반으로 하던 노무현계는 기존의 삼남을 기반으로 하던 당내 주류 세력과 자주 대립하였고, 결국 2003년 삼남을 기반으로 하던 의원들이 대거 탈당,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여 신민당 창당 이래 최초의 분당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새천년민주당, 한국독립당 등 반노세력이 결집하여 2004년 헌정 사상 최초로 [[노무현 내각 불신임안 (동방의 등불)|'''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 하지만 한달도 안되어 갑작스럽게 정몽준과 국민통합21이 연정 파기를 선언하며 연정에서 이탈하며 노무현 내각은 시작부터 휘청이게 된다. 그래서 노무현 총리가 손수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동정론이 불었고, 직후 열린 [[제3회 대한제국 전국동시지방선거 (동방의 등불)|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신민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신민당 내에서 이북을 기반으로 하던 노무현계는 기존의 삼남을 기반으로 하던 당내 주류 세력과 자주 대립하였고, 결국 2003년 삼남을 기반으로 하던 의원들이 대거 탈당,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여 신민당 창당 이래 최초의 분당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새천년민주당, 한국독립당 등 반노세력이 결집하여 2004년 헌정 사상 최초로 [[노무현 내각 불신임안 (동방의 등불)|'''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 ||
그러나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20대 대한제국 민의원 선거 (동방의 등불)|제20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친노세력이 주축이 된 신민당이 개헌선에 근접한 압승을 거두었는데, 심지어 한독당의 텃밭이였던 함경도에서도 상당수 의석을 획득하여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그러나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20대 대한제국 민의원 선거 (동방의 등불)|제20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친노세력이 주축이 된 신민당이 개헌선에 근접한 압승을 거두었는데, 심지어 한독당의 텃밭이였던 함경도에서도 상당수 의석을 획득하여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2007년 10월 2일 ~ 4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주석과의 2차 한중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7년 12월 11일에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한편 여러 과격한 발언과 2005년 한독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여 일어난 대연정 파동 등으로 인하여 2006년 지방선거에서 신민당은 참패하였고, 내각도 지지를 급속도로 잃어 2007년 11월 노무현 총리는 의회해산 및 총리직 사임을 선언하였다. | ||
2007년 12월 19일 퇴임 이후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하여 정착하였고, 사람사는세상 사이트와 민주주의 2.0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명예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그를 찾으러 김해를 찾는 관광객은 평일에는 하루 3천명, 주말에는 1만명에 이르렀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노무현은 평일엔 6번 정도, 주말엔 10번 정도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타임즈에서는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정치적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 |||
그러나 이후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수사의 화살이 측근의 중심인 자신에게까지 뻗쳐 검찰 수사를 받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총리는 역대 최초로 검찰에 소환된 대한민국 전현직 총리가 됐다. 이러흣 친인척 비리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투신 직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 |||
== 선거 이력 == | == 선거 이력 == |
2022년 5월 9일 (월) 00:45 판
![]() 대한제국 국무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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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21-22대 국무총리대신 노무현 盧武鉉 | Roh Moo-hyun | |
---|---|
출생 | 1946년 9월 1일 |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30 (現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 | |
사망 |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금오로 20 (범어리, 양산부산대학교병원) | |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총리묘소 |
재임기간 | 제21대 국무총리대신 |
2002년 5월 7일 ~ 2004년 4월 20일 | |
제22대 국무총리대신 | |
2004년 4월 20일 ~ 2007년 12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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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생애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평양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원래 평양과는 연고가 없었으나 판사 근무 시절 평양에 매력을 느껴 정착하기로 하여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뒤 조세 전문 변호사로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던 와중 1981년 우연히 맡게 된 평림사건[1]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후 1987년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신민당 당수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1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평양 동 선거구에서 당선된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총리 취임의 밑바탕이 되었다.
1991년 16대 민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평양 동 선거구에 재출마했으나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4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신민당 평양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 역시 낙선했다. 이후 이명박 종로구 민의원이 1996년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민의원직을 자진사임하자 열린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하여 5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2년 뒤인 1998년 4월 18대 민의원 선거에서 다시 평양에 출마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출마한 선거구는 평양 모란봉 을이었는데, 선거운동 초반에는 한국독립당 김평일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막판 한독당 표심이 결집하여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러나 계속 평양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가며 기반을 다졌고, 2000년 6월 이영호 평양 낙랑 갑 민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열린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이때 한독당 후보를 6000여표차의 근소한 차이로 꺾고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 일로 지역주의 타파의 상징이 된다. 당선 이후 김대중 총리에 의해 해양수산대신으로 입각하였고 2001년 4월까지 대신직을 역임하였다.
2001년 12월 김대중 신민당 당수가 당수직을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신민당의 차기 당수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노무현 역시 당수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노무현은 행정 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고, 당 내의 다른 대권주자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지지율은 미미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신민당 내 '이북기반 총리론'과,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신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이후 2002년 열린 제19대 민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의 승리를 주도하였으나 과반수에는 약간 못미친 의석수를 얻었는데, 정몽준이 이끌던 국민통합21과 연정에 합의하여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한달도 안되어 갑작스럽게 정몽준과 국민통합21이 연정 파기를 선언하며 연정에서 이탈하며 노무현 내각은 시작부터 휘청이게 된다. 그래서 노무현 총리가 손수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동정론이 불었고, 직후 열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신민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신민당 내에서 이북을 기반으로 하던 노무현계는 기존의 삼남을 기반으로 하던 당내 주류 세력과 자주 대립하였고, 결국 2003년 삼남을 기반으로 하던 의원들이 대거 탈당,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여 신민당 창당 이래 최초의 분당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새천년민주당, 한국독립당 등 반노세력이 결집하여 2004년 헌정 사상 최초로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20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친노세력이 주축이 된 신민당이 개헌선에 근접한 압승을 거두었는데, 심지어 한독당의 텃밭이였던 함경도에서도 상당수 의석을 획득하여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2007년 10월 2일 ~ 4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주석과의 2차 한중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7년 12월 11일에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한편 여러 과격한 발언과 2005년 한독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여 일어난 대연정 파동 등으로 인하여 2006년 지방선거에서 신민당은 참패하였고, 내각도 지지를 급속도로 잃어 2007년 11월 노무현 총리는 의회해산 및 총리직 사임을 선언하였다.
2007년 12월 19일 퇴임 이후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하여 정착하였고, 사람사는세상 사이트와 민주주의 2.0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명예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그를 찾으러 김해를 찾는 관광객은 평일에는 하루 3천명, 주말에는 1만명에 이르렀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노무현은 평일엔 6번 정도, 주말엔 10번 정도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타임즈에서는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정치적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수사의 화살이 측근의 중심인 자신에게까지 뻗쳐 검찰 수사를 받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총리는 역대 최초로 검찰에 소환된 대한민국 전현직 총리가 됐다. 이러흣 친인척 비리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투신 직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87 | 제15대 민의원 선거 | 평양 동 | 신민당 | 63,075표 (51.0%) | 당선 (1위) | 초선 |
1991 | 제16대 민의원 선거 | 40,397표 (32.2%) | 낙선 (2위) | |||
1994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평양광역시장 | 847,297표 (37.58%) | |||
1996 | 7월 재보궐선거 | 서울 종로 | 36,251표 (54.4%) | 당선 (1위) | 재선 | |
1998 | 제18대 민의원 선거 | 평양 모란봉 을 | 37,136표 (35.7%) | 낙선 (2위) | ||
2000 | 6월 재보궐선거 | 평양 낙랑 갑 | 31,845표 (44.0%) | 당선 (1위) | 3선 | |
2002 | 제19대 민의원 선거 | 32,132표 (42.7%) | 4선[2] | |||
2004 | 제20대 민의원 선거 | 45,224표 (48.6%) | 5선[3]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신민당 | 1987 - 2008 | 정계 입문 |
무소속 | 2008 - 2009 | 탈당 정계 은퇴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