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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8년에서 1250년까지 2년간 비잔티움 제국과 | 1248년에서 1250년까지 2년간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존폐를 놓고 싸운 동유럽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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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0일 (수) 18:28 기준 최신판
상위 문서:흑해
페르시아의 비잔티움 침공 Bizantin Invasion of Persian empir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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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로 후퇴하는 로마군 | |||||
기간 | 1248년 1월 3일 - 1250년 2월 7일 | ||||
장소 | ![]() ![]() | ||||
원인 | 중페르시아 제국의 대외 팽창 정책 | ||||
결과 | 비잔티움 제국 멸망, 조지아 제국 성립 | ||||
영향 | 아나톨리아 반도의 군사적 혼란기 도래
제 3제국의 동방식민운동 전개 급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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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지원국 ![]() |
![]() 지원국 | |||
지휘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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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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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30,000여명 사망 5,000여명 부상 320여명 탈영 |
군인 35,000명 사망 시민 220,000명 이상 사망 군인 12,000여명 이상 탈영 |
개요
1248년에서 1250년까지 2년간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존폐를 놓고 싸운 동유럽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다.
준비
1232년 즉위한 페르시아의 3대 황제 페르펜노스 3세는 과거 헬레니즘 제국이 침략하기 전의 페르시아 강역을 복원하겠다는 꿈이 있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주변 약소국도 아닌[1] 천 년을 버틴 천하의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겠다는 미친 짓으로 시작했다.
이미 선대인 페르펜노스 2세가 다져놓은 도로망과 기반시설물 위에서 페르펜노스 3세는 군사훈련만 시행했으며, 그 덕에 페르펜노스 3세 즉위 이전에 12,000명에 불과하던 상비군은 십수년간의 훈련을 거쳐 120,000의 정예 거대 병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침공 때는 5만만 동원했다. 그리고 요안니스 4세가 즉위한 비잔티움 제국은 이 기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 제국은 해상 보급을 위해 동부 흑해의 패자였던 엘라헨스코 대공국에게 해상 통행권을 동맹을 대가로 요청했으며, 엘라헨스코 대공국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이 동맹은 흑해 동맹으로 발전한다.
진행
1248년 1월 3일 새벽, 페르시아 국경선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5만의 대부대가 콘스탄티노플 방면으로 선전포고 없이 침입했다. 개중 2만 명은 크데멘투스의 지휘 아래 시노페로 향했고, 나머지 3만은 페르펜노스 3세의 지휘 아래 콘스탄티노플로 직행했다. 이후 나머지 14000의 부대가 황제의 증원 요청에 따라 급파되면서, 총 병력은 62,000에 달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은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당장 왕위계승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복원할 새도 없이 비잔티움 상비군의 80%에 달하는 6만이 쳐들어왔고, 엘라헨스코 대공국과 동맹을 맺은 상황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당장에 흑해 어디로나 상륙할 수 있는 3만의 대부대를 대공국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단공포 현상 때문에 2만에 달하는 시민과 공직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가 몰다비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비잔티움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국고를 이용해 2000명의 바랑인 부대를 고용했다. 또한 당시 교황이던 인노첸시오 4세에게 돈을 요청했고, 그 보답으로 교황령은 라벤나와 밀라노의 무장 수송선단에 돈과 무기를 실어 보내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만 70,000명의 방어군을 갖추고 있었기에 군대에 여유가 생긴 요안니스 4세는 시노페로 10,000명의 추가 부대를 급파했다.
절정
전쟁의 절반의 승패가 걸려 있던 시노페 방어전에서 비잔티움군은 변명할 여지 없이 처참히 깨졌다 당시 가장 전장에서 많이 싸워 본 군인 중 한 명인 에벨리누스 안드레아쿠스와 32,000의 대부대가 전멸한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며, 시노페의 부대가 결사항전으로 14일을 벌어주었음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혼란에 빠져 어떠한 기회도 잡지 못했다. 당장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병력이 충분했음에도 시민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징집시켜 고기방패로 사용하는 미친 짓으로 전투를 시작했던 비잔티움군은 결국 마지망 희망이 걸려 있던 사르디스 전투에서 처참히 깨지며 마지막을 조용히 기다리게 되었다.
최후
결국 천년고도 콘스탄티노플은 무너졌고,그토록 혐오하던 이교도들이 옛 로마 땅을 밟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행보는 조지아 제국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