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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7일 (화) 01:55 판
이준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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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별인민민주공화국 국가원수 이준설 李濬說 | Lee Jun-seol | |
출생 | 1866년 4월 28일 |
인별왕국 대용부 | |
국적 | ![]() ![]() |
사망 | 1952년 5월 24일 (향년 86세) |
인별제2공화국 만산시 | |
임기 | 대용자유군 육군부사령관 |
1915년 2월 26일 - 1939년 12월 7일 | |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 총사령관 | |
1939년 12월 7일 - 1952년 3월 23일 | |
인별제1공화국 대통령 | |
1952년 3월 22일 - 1952년 3월 23일 | |
인별인민민주공화국 국가원수 | |
1952년 3월 23일 - 1952년 5월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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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7]
"인별국의 타락한 정치체제 뿌리뽑고 전세계가 우러러보는 인별국 만들것"
1952년 4월 1일 인별혁명 퍼레이드에서
인별제1공화국 제4대 대통령이자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 독재자.
1952년 오영환 정부의 민심 하락과 부정부패에 반감을 느껴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으로 권좌에 올라 1952년 인별국의 독재자가 되었으나 같은 해 민주화운동으로 사망한 독재자 아닌 독재자. 1952년 3월~4월 1달 간 인별국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생애
유년기
1866년 4월 28일 인별왕국 대용부에서 태어났다. 이준설은 인별사회주의내전으로 아버지였던 이박충을 잃고 난 이후 사회주의에 큰 반감을 얻고 이후 그가 권력을 잡은 직후 사회주의파를 대거 숙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인경력
대용자유군 육군부사령관
1915년 사회주의파가 인별국 혼란기를 틈타고 인별사회주의내전(~1939)를 일으키며 그는 같은 날 창건된 대용자유군으로 참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 창건자 이청준이 대용자유군 육군부사령관으로 영입했다.
이준설이 계획하고 실행시킨 작전은 매번 성공을 하며 인별인민군을 겁에 떨게 하였다. 이준설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한 큰 복수" 라며 기뻐했다. 그가 성공시킨 작전으로는 대표적으로는 인별 인민당 지사 기습사건, 인민광장 테러사건, 콘스트룬 샤르비노 인별인민공화국 제6대 대통령 암살 등이 있다.
1915년부터 1939년 종전까지 대용자유군 육군부사령관직을 수행하며 그가 계획한 57개의 작전 중 1개(인별인민공화국 청사 폭파작전, 1929년)를 제외한 56개의 작전을 성공시키며 큰 지지를 얻었다.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
(원수임명식 때의 이준설) 1939년 12월 7일 인별사회주의내전이 인별3파연합의 승리로 끝나며 1940년 1월 1일 대용자유군 신년기념 원수임명식에서 대용자유군 원수로 추대,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4세로 당시 평균 60대였던 대용자유군 1~7부대 사령관들에 비해 많았던 편. 심지어 당시 1880년생이었던 김대홍 대용자유군 공동창건자 겸 대용자유군 전군총사령관보다 나이가 많았다.(당시 김대홍의 나이는 60세였다.)
대용자유군 원수로 추대 된 이후로는 1939년 창건된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대용시 경계의 안전을 총책임했다. 훗날 그가 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빠르게 진행시켰던 주요 원인이 된다.
3.22 군사쿠데타
자세한 정보는 3.22 군사쿠데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오영환 정부의 민심하락
"인별국 오영환 대통령은 국민을 자신의 노예로 보고 자유를 억압하는 인별국 신사회주의파의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다." -1952년 3월 13일 쿠데타 9일 전 대용방송과의 인터뷰 중에서
1952년 오영환이 인별제1공화국 제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총기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인별 사회주의파와 반정부세력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포했으나 총기생산자와 총기소유자들의 반발이 높아졌다.
총기금지령으로 인해 총기생산자의 수익은 확 떨어졌고, 총기소유자들은 강제로 총기를 반납해야 했다. 총기생산자ㆍ총기소유자들은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인별국총기국민대연합', 이하 '총기련' 을 조직, 매일 대통령실 앞에서 시위를 하였다. 오영환 정부는 총기련을 불법단체로 규정, 시위를 진압하려 시도했으나 한번 끓어오른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쿠데타
"오영환 정부의 정책은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있으며 조국을 망국으로 만들고 있다." -1952년 3월 20일 쿠데타 2일 전 대용시에서 열린 오영환 대통령 규탄시위 연설 중에서
오영환의 정책으로 분노했던 사람들 중 이준설도 포함되있었다. 이준설은 오영환 정부를 맹비난하였다. 이준설은 대용시에서 열린 오영환 대통령 규탄시위에 참가해 연설도 했다. 오영환 정부는 뒤늦게 총기금지령을 폐지했으나 이미 민심은 등돌았고, 이준설은 3월 21일 새벽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의 병사들과 비공개로 회의를 했다.
그리고 3월 22일 0시, 이준설은 3대대에 작전명 '태풍' 을 전파하여 대용시 경계를 넘어 인양 대통령실로 탱크와 병사들을 동원해 출발했다. 인별국군은 이를 확인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양시 수비대와 소수의 국군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방어에 실패하며 인양시내로 진입했다. 인양시내에 진입한 쿠데타군은 승리를 외치며 빠르게 진격했고, 인양 대통령실 앞까지 도착했다. 인양 대통령실 앞에서도 교전이 심했고, 쿠데타군은 탱크를 앞세워 방어병력까지 모두 소탕했다. 이후 돌격대가 인양 대통령실 내부로 침입해 오영환 대통령을 국가내란유도죄로 체포하며 쿠데타는 이준설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오영환은 대통령 업무실에 혼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체포될 것을 체감한듯 표정이 굳어있었다고 한다. 오영환 체포 후 쿠데타군은 인양 대통령실을 폭파시키며 오영환 정부 몰락을 선포하였다.
오영환 정부를 끌어내린 이준설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1952년 3월 22일을 혁명절,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같은날 인별제1공화국의 제 4대 대통령으로 취임, 바로 다음날인 23일에는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하며 초대 국가주석으로 임명됬다.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수립과 이준설 정부기의 인별국
"포악하고 벌레같은 공산 사회주의계는 뿌리채 뽑아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 -1952년 3월 27일, 자유인별방송 인터뷰에서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이준설은 우선 공산 사회주의계 대숙청을 예고, 하루빨리 전향하라 말하며 집권 초 공산주의를 탄압하였다. 공산주의 세력은 이에 분노해 게릴라를 꾸려 이준설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들은 전부 숙청당했다.
오영환 대통령 공개처형
"당신들이야 말로 진짜 공산주의자들이다. 사람 몰아서 죽이는 짓." -1952년 3월 30일, 오영환이 사형집행 하루 전 감옥 간부에게 말한 말
오영환은 국가내란유도죄로 체포된 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되었던 재판에서 1, 2, 3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다. 사형판결을 받은 이후 오영환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별국 국민에게 이 정부는 잘못된 정부라 비난하고 국민들에게 자신을 복권시켜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자신들을 탄압하던 오영환 사형소식에 오히려 기뻐하며 인양에서는 오영환 사형기념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말 그대로 오영환은 모든 국민들에게 외면당했고, 오영환은 이제 국민들에게 '공화국 대통령' 이 아닌 '독재자', '범죄자' 로 낙인 찍힌 것이었다. 오영환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받을 수 없었다.
오영환은 4월 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방식은 총살형. 오영환의 사형은 무너진 인별국 대통령실 잔해 위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국민들은 오영환 사형집행장소에 집합해 오영환에게 돌을 던지며 빨리 죽어야 한다고 죽기 직전까지 비난하였고, 총기련 소속 사람들 중 일부는 총기를 들고와 자신이 죽이겠다고 민주 인별국 국군에게 간절히 호소할 정도였다고.
오영환은 총살형을 당하며 온 몸에 90개의 총알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시신은 인양시 외곽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묻고, '반역자 오영환' 이라 새겨진 비석을 세웠다. 무덤은 만들어줬지만 그 대우가 너무 처참했던 것을 보여준다.
정치체제 개편
이준설은 3월 23일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하며 인별제1공화국의 멸망을 선언했다. 이준설은 인별제1공화국의 정치체제였던 민주공화제를 폐지, 새로운 정치체제인 '전체자유주의' 를 채택하였다. 이준설은 공산 사회주의계ㆍ오영환계 정당들을 전부 불법화 시켰으며, 전체자유당을 창당, 기존 오영환계 정당들의 의석을 탈취하며 다수당이 되었다. 민주 인별국은 1당체제가 아닌 다당체제였으나, 사실상 전체자유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가져가며 1당체제나 다름이 없을 정도였다.
오영환계 정당 중 인별제1공화국 여당이었던, 그리고 가장 세력이 컸던 새로운민주당은 3월 25일 1차 국회회의에선 존재하였으나, 4월 4일 2차 국회회의 하루 전 인별민주군의 기습과 이 날 시행된 오영환계 정당 금지령으로 해체되었다. 오영환계 정치인들은 대거 체포되어 숙청을 당하였고, 소수의 오영환계 정치인들은 전황국으로 망명하여 인별제1공화국 망명정부를 수립해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정부에 대항하였다.
무자비한 반대파 숙청
"더러운 오영환계와 공산 사회주의계는 인별국의 혼란을 주도한 국가내란세력으로 이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시위나 폭동에 대해선 유혈진압으로도 답 할 수 있다." -1952년 4월 10일, 정식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집권 이후 민주 인별국 정부는 반대파 정치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오영환계 정치인들은 새로운민주당 해체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를 진행하며 정부에 대항하였고, 군은 유혈진압을 지시하며 시위대 앞으로 탱크를 이끌고 포를 발사하였다.
이후 홍삼인 인별인민민주국 국방장관은 모든 반정부시위에 무기를 투입해 진압하라 명령하였고, 청영에서는 공중에서 전투기가 포를 쏘며 진압해 수천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자유인별방송은 이 내용들을 전부 반정부 테러단체의 테러시도를 저지한 것으로 알렸고, 국민들의 귀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정부의 유혈진압은 오영환계에게 심한 피해를 낳기도 했으나 후에 오영환계의 결집과 4.28 민주화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언론탄압과 언론통폐합
경제정책
스포츠
전체자유당배 실업야구 리그
이준설 정부기의 대외관계
4.28 민주화운동
최후
사망 이후
인별인민민주공화국 멸망과 인별국 과도임시정부 이준철 권한대행 체제 수립
인별제2공화국 수립
전체자유당의 파생단체 창설
2024년 친이준설단체대국민연합 사태
현대 인별국에서의 평가
대중문화
가족
이준설의 가족은 의외로 크게 성공했거나 정치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준설의 아버지인 이박충은 초대 대용시장으로, 1841년에 대용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박충은 1850년 초대 대용시장에 취임해 20년 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임기 도중 어릴적 친구였던 아내 홍신화와 결혼해 1866년 이준설을 낳았다. 임기 이후엔 대용시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1915년에 일어난 인별사회주의내전에 대용자유군으로 참전했다가 1915년 인별인민군에 잡혀 7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는 곧 이준설이 대용자유군에 가입하는 계기가 된다.
이준설의 동생인 이준철은 인별국 과도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잘 알려져있다. 1869년 둘째로 태어난 이준철은 이준설과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1915년 형인 이준설과 함께 대용자유군에 가입, 종전 이후 대용자유군 공군사령관으로 진급 및 형과 함께 원수로 추대되었다. 이후 1945년 공군사령관직을 내려놓고 이준설과 함께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에서 활동하다 1952년 3.22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쿠데타 성공으로 이준설이 권력을 잡은 후 이준철은 후계자 자리로 임명되었다가, 4.28 민주화운동으로 4월 30일 이준설이 사망하자 이준설의 뒤를 이어 2대 인별인민민주공화국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준철은 인별국 망명정부와 3파연합과 합의해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의 멸망을 선언, 인별국 과도임시정부를 수립하여 1달간 3파연합과 함께 정부를 이끌었다. 1년 후인 1953년 최윤주 대통령의 인별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권력을 내려놓고 조용히 살아가다 1954년 1월 6일에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여담
각주
- ↑ 초대 대용시장.
- ↑ 인별국 과도임시정부 대통령.
- ↑ 6대 대용시장.
- ↑ 14대 대용시장.
- ↑ 前 대용 드래곤즈-버니즈 감독, 前 대용 버니즈-비터즈 수석코치.
- ↑ 前 대용 비터즈 단장.
- ↑ 사진기준 왼쪽이 이준철, 오른쪽이 이준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