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김종필 내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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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인용문1|지금은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떠오르니 내년 봄은 봄다운 봄이 되도록 열과 성을 다할 생각입니다.|취임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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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동남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제2차 김영삼 내각]]이 붕괴되자 1997년 3월 [[국민당 (동방)|국민당]], [[자유당 (동방)|자유당]], [[범민족회의]] 세 범여권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출범한 내각. [[김종필 (동방)|김종필]] 총리의 네번째 내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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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상세==
1996년 여름, 동남아시아발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한국 경제도 그 여파로 급속히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실업률과 물가가 급속히 치솟았으나 [[제2차 김영삼 내각|김영삼 내각]]은 제대로 된 대처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급격한 금융자본화를 추구하던 김영삼 내각에 맞지 않던 기존의 경제관료들이 퇴임하거나 국민당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면서 공백이 발생하였고, 제어할 사람들이 사라지자 문제가 발생해도 능숙한 대처가 어려웠다.
1996년 여름, 동남아시아발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한국 경제도 그 여파로 급속히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실업률과 물가가 급속히 치솟았으나 [[제2차 김영삼 내각|김영삼 내각]]은 제대로 된 대처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급격한 금융자본화를 추구하던 김영삼 내각에 맞지 않던 기존의 경제관료들이 퇴임하거나 국민당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면서 공백이 발생하였고, 제어할 사람들이 사라지자 문제가 발생해도 능숙한 대처가 어려웠다.


이에 1996년 10월 2일, [[김종필 (동방)|김종필]] [[국민당 (동방)|국민당]] 총재는 김영삼 총리에게 여야가 모두 참여하는 경제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하고 재무대신을 이규성 전 내각제2부관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김 총리는 연석회의 제안을 수락하였으나 재무대신 교체는 거부했다. 하지만 10월 16일, 동남아 부동산 및 인프라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던 재계 수위권 제경상업사가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것이 드러나고 이에 채권자들의 채권 회수 절차가 가속화되면서 실질적인 파산 상태에 이르자 연말까지 대기업 연쇄 도산 우려가 극에 달했다. 이미 급격한 하락세를 타던 김영삼 내각의 지지율은 11월 첫째주 '''7%까지 폭락했다.'''
이에 1996년 10월 2일, [[김종필 (동방)|김종필]] [[국민당 (동방)|국민당]] 총재는 김영삼 총리에게 여야가 모두 참여하는 경제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하고 재정대신을 이규성 전 내각제2부관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김 총리는 연석회의 제안을 수락하였으나 재무대신 교체는 거부했다. 하지만 10월 16일, 동남아 부동산 및 인프라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던 재계 수위권 제경상업사가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것이 드러나고 이에 채권자들의 채권 회수 절차가 가속화되면서 실질적인 파산 상태에 이르자 연말까지 대기업 연쇄 도산 우려가 극에 달했다. 이미 급격한 하락세를 타던 김영삼 내각의 지지율은 11월 첫째주 '''7%까지 폭락했다.'''


결국 [[자유당 (동방)|자유당]] 내부에서도 김영삼 총리에 대한 사임 요구가 거세졌고 국민당 일각과 [[사회민주당 (동방)|사회민주당]]과 [[대한공산당|공산당]]등 야권은 물론 여당인 자유당 내부에서까지 내각불신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내각불신임을 반대하던 김종필 총재도 김 총리가 지도력을 잃었다고 판단, 1997년 1월 17일 공식적으로 사임을 촉구했다. 결국 2월 3일, 김영삼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결국 [[자유당 (동방)|자유당]] 내부에서도 김영삼 총리에 대한 사임 요구가 거세졌고 국민당 일각과 [[사회민주당 (동방)|사회민주당]]과 [[대한공산당|공산당]]등 야권은 물론 여당인 자유당 내부에서까지 내각불신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내각불신임을 반대하던 김종필 총재도 김 총리가 지도력을 잃었다고 판단, 1997년 1월 17일 공식적으로 사임을 촉구했다. 결국 2월 3일, 김영삼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김종필 총재는 자유당에 연립정부를 제안했으며 내각장관, 재무대신, 과학통신대신, 상공대신, 농무대신, 노동대신, 국토교통대신 및 경제 관련 정책수립 권한과 인사권은 국민당이 갖고 나머지는 자유당 의사대로 정부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연정 총리는 자유당의 지지도를 감안하여 김종필 국민당 총재가 맡기로 했다.  3월 4일, 국회의장단이 [[익종 (동방)|황제]]를 알현하여 총리 임명을 제청했고 황제가 김종필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이튿날 제4차 김종필 내각이 출범했다.
김종필 총재는 자유당에 연립정부를 제안했으며 내각장관, 재정대싲, 과학통신대신, 상공대신, 농부대신, 노동대신, 국토교통대신 및 경제 관련 정책수립 권한과 인사권은 국민당이 갖고 나머지는 자유당 의사대로 정부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연정 총리는 자유당의 지지도를 감안하여 김종필 국민당 총재가 맡기로 했다.  3월 4일, 국회의장단이 [[익종 (동방)|황제]]를 알현하여 총리 임명을 제청했고 황제가 김종필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이튿날 제4차 김종필 내각이 출범했다.
==정부 구성==
==정부 구성==
===내각===
===내각===

2025년 3월 17일 (월) 10:3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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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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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 시대
제4차 김종필 내각
第四次 金鍾泌 內閣
1997년 3월 5일 ~ 1998년 11월 7일
출범 이전 사직 이후
제2차 김영삼 내각 권영길 내각
내각총리대신 김종필 / 제42대 내각총리대신
여당
연립여당 자유당

개요

지금은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떠오르니 내년 봄은 봄다운 봄이 되도록 열과 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취임사 中

1996년 동남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제2차 김영삼 내각이 붕괴되자 1997년 3월 국민당, 자유당, 범민족회의 세 범여권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출범한 내각. 김종필 총리의 네번째 내각이었다.

상세

1996년 여름, 동남아시아발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한국 경제도 그 여파로 급속히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실업률과 물가가 급속히 치솟았으나 김영삼 내각은 제대로 된 대처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급격한 금융자본화를 추구하던 김영삼 내각에 맞지 않던 기존의 경제관료들이 퇴임하거나 국민당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면서 공백이 발생하였고, 제어할 사람들이 사라지자 문제가 발생해도 능숙한 대처가 어려웠다.

이에 1996년 10월 2일, 김종필 국민당 총재는 김영삼 총리에게 여야가 모두 참여하는 경제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하고 재정대신을 이규성 전 내각제2부관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김 총리는 연석회의 제안을 수락하였으나 재무대신 교체는 거부했다. 하지만 10월 16일, 동남아 부동산 및 인프라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던 재계 수위권 제경상업사가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것이 드러나고 이에 채권자들의 채권 회수 절차가 가속화되면서 실질적인 파산 상태에 이르자 연말까지 대기업 연쇄 도산 우려가 극에 달했다. 이미 급격한 하락세를 타던 김영삼 내각의 지지율은 11월 첫째주 7%까지 폭락했다.

결국 자유당 내부에서도 김영삼 총리에 대한 사임 요구가 거세졌고 국민당 일각과 사회민주당공산당등 야권은 물론 여당인 자유당 내부에서까지 내각불신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내각불신임을 반대하던 김종필 총재도 김 총리가 지도력을 잃었다고 판단, 1997년 1월 17일 공식적으로 사임을 촉구했다. 결국 2월 3일, 김영삼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김종필 총재는 자유당에 연립정부를 제안했으며 내각장관, 재정대싲, 과학통신대신, 상공대신, 농부대신, 노동대신, 국토교통대신 및 경제 관련 정책수립 권한과 인사권은 국민당이 갖고 나머지는 자유당 의사대로 정부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연정 총리는 자유당의 지지도를 감안하여 김종필 국민당 총재가 맡기로 했다. 3월 4일, 국회의장단이 황제를 알현하여 총리 임명을 제청했고 황제가 김종필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이튿날 제4차 김종필 내각이 출범했다.

정부 구성

내각

평가

급히 성립된 비상거국내각이었지만 김 총리의 지도력을 통해 휘하 정치인들과 관료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면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각이 지속된 97~98년은 역성장 하는 등 경제지표는 좋지 않았지만 99년도에는 37대 국회의 난국 속에서도 지표가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4차 김종필 내각이 회복 기반을 다져놓았기에 가능했다는 평이다.

또한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IT를 주목, 육성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보수적 엄숙주의에 근거한 문화 규제도 대부분 해제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보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개발된 게임, 영화, 음악등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도록 정책적으로 장려한 것도 4차 김종필 내각의 업적이다. 이러한 기조는 김대중 내각, 노무현 내각에서도 이어져 한국이 첨단 전자정부체계를 구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내각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선호는 당시에도 높았지만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져온 국민당-자유당 갈등에 지친 국민들이 37대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을 선택하면서 김종필의 지도력이 더 이어지지 못해 아쉽다는 평도 있다. 37대 국민원의 난맥상이 아니었더라면 더 빠르게 금융위기의 피해가 복구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