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레이놀즈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펼치기 · 접기 ]
이름 Peter Wright Reynolds
피터 라이트 레이놀즈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1996년
후보자격 연도 1995년
후보선정 연도 1996년
선정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 펼치기 · 접기 ]
※ 롤링 스톤이 2015년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 피터 레이놀즈 에디 밴 헤일런
6위 7위 8위 9위 10위
키스 리처즈 리치 블랙모어 데이비드 길모어 제프 벡 피트 타운젠드
같이 보기: 명반, 아티스트, 송라이터, 가수, 드러머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펼치기 · 접기 ]
※ 롤링 스톤이 2015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밥 딜런 척 베리 레이 찰스 엘비스 프레슬리
6위 7위 8위 9위 10위
피터 레이놀즈 롤링 스톤스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 지미 헨드릭스
같이 보기: 명반, 아티스트, 송라이터, 가수, 드러머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펼치기 · 접기 ]
※ 2010년 미국의 케이블 음악채널 VH1에서 음악평론가와 현직 뮤지션, 기타 음악산업 종사자 등 총 200명 이상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순위를 정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레드 제플린 마이클 잭슨 롤링 스톤즈 밥 딜런
6위 7위 8위 9위 10위
엘비스 프레슬리 피터 레이놀즈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너바나
11위부터는 VH1 참조
VH1 선정 가장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 펼치기 · 접기 ]
※ VH1이 2000년 발표한 가장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순위.
1위 2위 3위 4위 5위
레드 제플린 피터 레이놀즈 딥 퍼플 블랙 사바스 메탈리카
6위 7위 8위 9위 10위
AC/DC 더 후 반 헤일런 너바나
11위부터는 VH1 참조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2020년 개정판)
[ 펼치기 · 접기 ]
세계 음악가 음반 판매량 순위
List of best-selling music artists
[ 펼치기 · 접기 ]
세계 음반 판매량 순위
List of best-selling albums
[ 펼치기 · 접기 ]
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Peter Reynolds
피터 레이놀즈
본명 Peter Wright Reynolds MBE
피터 라이트 레이놀즈 MBE
출생 1943년 5월 11일
영국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타인 위어 뉴캐슬어폰타인
사망 2005년 3월 1일 (61세)
아일랜드 먼스터 코크
국적 영국, 아일랜드[1]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사회운동가
소속 크림 (1967 - 1969)
무소속 (1969 - 1977)
밴드 에이드 (1985)
[ 펼치기 · 접기 ]
부모님 아버지 : 윈스턴 라이트 레이놀즈
어머니 : 줄리아 메리 레이놀즈
배우자 엔젤 유진 (1970 - 1974, 이혼)
브루스 베이커 (1981 - 2005)
학력 이스트엔드 문법 학교 (졸업)
노섬브라 대학교 (동양 철학 / 중퇴)
신체 175cm, 64kg, A형
혈통 아일랜드계 영국인
종교 불교 →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아일랜드 노동당
장르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포크 록
활동 기간 1966년 - 1977년, 1979년, 1980년 - 1981년, 1985년[2]
사용 악기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베이스, 보컬, 키보드
레이블 폴리도르, 워너 브라더스, 소니, 유니버설
링크

개요

Father of the Heavy Metal

영국 뉴캐슬어폰타인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기타리스트. 헤비 메탈의 아버지이자 대부라고 불리며 헤비 메탈 형성에 매우 큰 기여를 한 전설적인 음악가이다.

1943년 5월 11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하드록, 헤비 메탈 음악가였다. 음악적으로는 비틀즈,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더 후의 영향을 받았다. 1966년 활동을 시작해, 1967년 데뷔하였고, 이후 1977년까지 활동했다. 대표곡으로는 What a Whole Life, It's Just a Shadow 등이 있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업적 역시 뛰어나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등과 함께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불리고 있다. 롤링 스톤에 의해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4위에 랭크되었다. 음악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빌보드 1위 싱글 곡 8개를 배출했으며, 약 3억 5천만장의 음반을 팔았다. 역대 음반 판매량 7위다.[3]

더 후,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 유명 밴드의 세션 멤버로도 거론되었으나 스스로 거부하고 독창성을 지키기 위해 무소속으로 활동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크림 등 밴드에 아예 가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1971년 이후로는 언제나 무소속으로만 활동해왔다. 그러면서도 1970년대 역대 음반 판매량 4위라는 넘보기 힘든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는 파급력 있는 솔로 아티스트이다.

또한 사회 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히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1970년대에는 노동당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다. 1973년에는 Concert for Bangladesh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록 음악은 매너리즘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새로움을 시도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 음악은 완전히 끝났음을 선언하며 음악계를 급작스럽게 은퇴했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은둔하며 음악 활동은 물론, 공개 행사와 언론 노출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를 마지막으로 그는 대중들 앞에서 서지 않았다.

2005년 3월 1일,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생애

유년기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철강 노동자였던 윈스턴 레이놀즈와 줄리아 레이놀즈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3달만에 윈스턴이 공장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외동 아들로 자라났으며, 줄리아 레이놀즈는 경제난으로 가정을 돌볼 형편이 안되자 더블린에 살던 친척집으로 피터를 보냈다. 13살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자랐으며, 이스트엔드 문법 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학비를 댈 형편이 안되어 지역 대학교인 노섬브라 대학교의 동양 철학부에 입학했다.

노섬브라 대학교 동양 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불교 신앙을 접하게된 이후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불교에 깊기 귀의하였다. 1965년 인도 여행을 다녀온 이후 불교와 힌두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으나, 신앙심과 별개로 성적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노섬브라 대학교를 중퇴했다. 또 대학교 시절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정치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초기 음악 활동 (1966 - 1967)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63년이었는데, 대학교에 갓 입학했던 때에 친구가 들으라고 빌려준 비틀즈 1집 Please Please Me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날로 어쿠스틱 기타를 사서 기타를 연습해봤다고 한다. 기타에 나름 소질이 있었기도 했고 하루에 6시간씩이나 연습했던 그는 단숨에 중급 이상의 기타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또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즈, 야드버즈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고 로큰롤에 관심을 가졌다. 1966년, 피터 레이놀즈는 첫 곡을 작곡했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학교를 중퇴했다.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어서 막노동을 전전했고 리버풀에서 항만 노동자로 3달동안 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아 야드버즈 소속이었던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에릭 클랩튼이 그의 기타 실력에 관심을 가져 작곡 및 기타 연주법에 대해 몇가지 조언을 해주게 되었다. 이후 에릭 클랩튼과는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Revolver 음반을 듣고 사이키델릭 록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익숙했던 블루스 음악을 주로 작곡했다. 이후 그는 지미 헨드릭스, 더 후, 비틀즈 등 다양한 밴드의 영향을 받아 블루스와 록을 결합한 블루스 록을 시도했으며, 에릭 클랩튼도 그의 음악 장르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크림 활동 시절 (1967 - 1969)

에릭 클랩튼, 진저 베이커와의 인연으로 크림(Cream)이라는 밴드에 세션 기타리스트로 영입된다. 초반에는 베이스 기타를 조금 치는 수준이었지만, 조금 뒤에는 일렉트릭 기타를 다뤘고 1968년경에는 아예 밴드에 공식으로 가입하여 크림이 4인조 밴드가 되어버렸다. 밴드 초반에는 음악 함량이 많이 부족했지만 1년간 어깨 너머로 곡을 배우면서 엄청난 성장을 거쳐, 크림의 3집인 Wheels of Fire에서는 수록곡 13곡중 6곡을 자작곡으로 채웠다. Wheels of Fire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더블 앨범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1967~1968년 당시 활발했던 히피 운동에 심취하여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해졌다. 공산당을 탈당하고 기성 정치의 해체를 주장했으며, 그 유명한 우드스탁 콘서트에서도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영국 정부를 맹비난하며 젊은이들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69년 알타몬트 공연 참사로 인한 히피 문화의 해체 이후에도 히피 사상을 유지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상관을 평생동안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밴드 멤버들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멤버간 갈등이 심화되어 크림은 1969년 Good Bye 앨범으로 해체를 선언했고, 피터 레이놀즈도 그대로 무소속으로 돌아갔다. 이후 피터 레이놀즈는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해버린 시드 바렛의 대타로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밴드 내에서 자리를 잡던 데이비드 길모어의 반대로 핑크 플로이드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대신 더 후에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간간히 뛰었으며, 레드 제플린에도 잠깐 세션 멤버로 참여했다.

솔로 활동 (1969 - 1977)

1971년까지 단 한장의 앨범을 내지 않았던 피터 레이놀즈는 에릭 클랩튼의 도움으로 첫 솔로 1집인 House of Horses를 발매하는데, 빌보드 76위, 영국 차트 9위까지 오르며 첫 데뷔 앨범치고 매우 선전했다. 블루스와 하드 록을 결합한 구성으로 평론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았으며, 이에 자신감을 얻은 피터는 1972년 2집인 The Soldier's Tale를 발매해 처음으로 빌보드 2위에 오르고 영국 차트에서는 1위까지 올랐다. 타이틀 곡인 The Soldier's Tale는 한 잡지에서 선정한 "올해의 음악" 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솔로 활동기에는 더 후, 롤링 스톤스 등에서 세션 멤버로 거론되었으나 거부하고 솔로활동 유지를 선언했다.

1972년 3월에는 2집을 발매한지 한달만에 베트남 전쟁 반대의 주제를 담고있는 In Your Blues를 발표해, 빌보드 1위까지 오르고, 각종 국가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1972년부터는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와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포크 록, 헤비 메탈 등 블루스에서 탈피한 다양한 록 음악 장르를 시도했다. 또 프로그레시브 록까지 손대는 등 1973년까지 상당히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쳤고, 그 결과가 1973년 발매한 앨범 It's My World이다. 현재까지 약 4500만장이 팔려 1973년 2번째로 많이 팔린(1위는 핑크 플로이드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으로 등극되었고,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6위를 차지할 정도로 비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글램 록,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헤비 메탈, 포크 송 등 다양한 음악적인 성향이 앨범 속에 담겼지만, 그중에서 제일 잘나갔던 헤비 메탈로 방향을 선회해 1974년 이후로는 메탈과 하드 록, 블루스 록에 다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3년, 조지 해리슨이 주최한 Concert for Bangladesh에 참가해 밥 딜런과 함께 환상적인 공연을 펼쳤고, 이후 본격적으로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퀸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하고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의 저택에서 살면서 사실상 아일랜드인이자 영국인으로서 자신을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영국의 문화를 읊조리는 곡을 쓰기도 해 메탈 아티스트로서는 이례적으로 보수적인 기성 세대들에게서도 환영받았다.

사생활 면에서 1974년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1970년 결혼했던 그루피족 출신의 엔젤 유진의 각종 기행과 불륜[4] 행각으로 인해 질린 피터는 그와 이혼을 선언하고, 여성과는 다시는 사귀지 않을 것이라며 동성애자 커밍아웃을 해 당대 영국 사회에 큰 반항을 몰고왔다. 보수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도리어 인기가 더욱 높아져 반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인기도 엄청나게 높아졌다.

또 1970년대 중반 들어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는 길은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에서 찾아야한다는 곡인 I'll Follow My Way를 발표해 빌보드 1위에 다시 곡을 올렸으며, 동년에 불교를 버리고 무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밝혔다. 또 기성 좌파 정당인 노동당에도 입당해 이상주의적인 정치관에서도 약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1975년, 4집인 Engelsaft를 발매해 약 3200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 시기 완전히 헤비 메탈에 심취하여 거의 슬래시 메탈에 가까운 음악을 보여줬으며, 라이브 공연 당시 너무 연주를 빨리해서 한 공연에 일렉 기타를 3개나 부숴버렸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내려올 정도였다. 1975년 8월 12일 브로미치 공연에서는 약 16만명을 동원해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한 공연으로 세계 신기록을 쓰기도 했다. 1976년, 롤링 스톤이 조사한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투표에서 그는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밴 헤일런,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그리고 무명 시절의 주다스 프리스트까지 여러 메탈 아티스트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고, 반대로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다소 온건한 메탈 음악가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매우 과격하고 빠른 템포의 메탈 음악을 쓰기도 했다.

급작스러운 은퇴와 그 이후

5집 발매 직후 록 음악이 매너리즘에 빠져있기 때문에 더이상 록 음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급작스러운 발표를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록 음악계는 충격에 빠졌고 로저 워터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등 그와 친분이 있던 아티스트들이 모두 은퇴를 말렸지만 록 음악에 있어서 미래란 없다면서 그냥 앞으로 몇번의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것 외에는 아일랜드에서 요양을 하겠다며[5] 음악 활동 중단의 뜻을 밝혔다.

이후 1979년 레드 제플린과 합동 공연을 했고, 1980년 12월부터 1981년 2월까지 영국 순회 공연을 다녔으며 이후로는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 관심을 가지고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곡 3곡을 연주했다.

1985년 이후로는 공식 석상에서 자리를 비추지 않으며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자발적인 은둔 생활을 했으며, 간간히 인터뷰를 하는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91년 에릭 클랩튼의 Unplugged 앨범에서 마지못해 몇몇 곡의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해주긴 했지만, 이후에는 정말로 아무 음악도 공식 석상에서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류 음악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음악에는 꾸준히 관심을 가졌는데, 메탈리카너바나, AC/DC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가끔씩은 유명한 음반이나 노래에 대한 촌평을 남기기도 했고, 힙합에도 의외로 후한 평가를 줬다. 말년에는 음악적인 취향이 꽤 넓어져 팝 록 밴드인 플리트우드 맥의 음악도 들었다. 2001년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즘 밴드로 라디오헤드를 꼽기도 했다.

시인과 화가로서의 삶

은퇴한 이후에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문예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로 추상주의 미술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다만 남에게 더이상 새 작품을 보여주고싶지 않다는 신념 때문에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 공개된적은 없고, 시의 경우 2~3편만이 공개되었다.

사망

2005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이었고 2002년부터 암에 걸렸지만 공개하지 않아 정말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후 로저 워터스, 에릭 클랩튼, 로버트 플랜트, 오지 오스본 등의 지인들이 추모 콘서트를 열었다.

생전에도 그의 음악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지미 헨드릭스나 커트 코베인과 마찬가지로, 사후 그의 음악들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당시나 지금이나 메탈 음악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블루스로부터 이어지던 기타 리프를 헤비하게 바꿔놓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1970년대 영국 음악가로서는 예외적으로 롤링 스톤에서도 2010년대 이후로는 꽤나 높은 평가를 받는 등, 사후에 그의 업적은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사용 악기

파일:234.jpg

사진 속의 기타는 Gibson L6S이다.

Gibson Les Paul Jr를 주로 사용하였지만 Fender 기타 역시 애용하였다. 절친인 에릭 클랩튼과 함께 깁슨과 펜더에서 둘 다 시그니처 기타가 출시된 몇 안되는 기타리스트이다. 초창기에는 Gibson J-160E 기타를 사용하였다. 어쿠스틱 기타로는 Epiphone에서 출시한 Inspired by 1964 Texan 기타를 사용했다.

음악적 성향과 유산

기타리스트

송라이터

디스코그래피

앨범

Peter Reynolds Discography
[ Studio Albums ]
Studio Albums
연도 앨범 명 장르
1971 1집 House of Horses 하드 록, 블루스 록
1972 2집 The Soldier's Tale 헤비 메탈, 헤비 블루스, 하드 록
1973 3집 It's My World 헤비 메탈, 헤비 블루스, 하드 록
1975 4집 Engelsaft 헤비 메탈, 블루스 록, 포크 록
1977 5집 Is This the Life We Really Want?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Compilation Albums
연도 앨범 명
1975 1972 - 1975
1978 1975 - 1977
1982 Creamy Guitarist
1985 Sunny Blonde Sunshine
1988 Gold
1992 Greatest Hits
1993 Greatest Hits II
2006 Is There Somebody out?
2019 He Came

싱글

빌보드 1위

  • What a Whole Life (1972)
  • In Your Blues (1972)
  • The Soldier's Tale (1973)
  • It's Just a Shadow (1974)
  • I'll Follow My Way (1975)
  • Story of a Man (1975)
  • Good Bye War! (1976)
  • We Shall (1977)

빌보드 2위

  • Eclipse (1972)
  • Second Floor, Harrods (1973)
  • Money (1973)
  • o̲o̲ (1974)
  • The Wind Blows (1975)
  • He Came in to a Colour (1976)
  • Powerful Amplification (1977)

어록

It's weird not to be weird.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이상하다.
Art is only a way of expressing pain.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I believe in God, but not as one thing, not as an old man in the sky. I believe that what people call God is something in all of us. I believe that what Jesus and Mohammed and Buddha... and all the rest said was right. It's just that the translations have gone wrong.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늘 위에 떠있다는 노친네 말고. 나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그리고 부처... 그리고 모든 신들이 모두 옳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들의 가르침이 곡해되었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곡들이 형편 없어요. 가사는 눈뜨고 볼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요. 길모어가 쓴 가사는 저열한 삼류에요.
핑크 플로이드 13집(A Momentary Lapse of Reason)에 대한 촌평

여담

  •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강해서 1970년대 이후로는 쭉 아일랜드에서 살았고, 실제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북아일랜드 문제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서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 복속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가, 영국 주류 언론에 의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영국 언론의 90%는 정신병자 집단이다"라는 직설적인 말로 응수했다. 죽을때까지 아일랜드 시골집에서 기거하다가, 급작스럽게 건강이 위독해져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사망했다. 아일랜드 시골 마을이 좋았는지 아일랜드를 찬양하는 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였던 로리 갤러거와도 친한 사이였다.
  • 로리 갤러거와 쌍둥이 수준으로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기타 연주법에 아일랜드계 혈통까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해서 숨겨진 형제 설이 돌기도 했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말 로리 갤러거와 피터 레이놀즈는 판에 박은듯이 닮아서 서로 친구가 되었다. 하여간에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지만 엄청난 동안으로 그루피족을 몰고 다녔다. 40대 후반에 찍힌 사진도 30대 초반급으로 보일정도로 상당한 동안이었다. 그러다가 50대 초반에 들어 애연가답게 얼굴이 폭삭 늙어서 죽기 직전에는 오히려 노안이 되었다.
  • 워킹클래스 출신 답게 엄청난 짠순이였다고 한다. 에릭 클랩튼이 말하길 "피터를 죽이고 싶다면 달리는 2층 버스 앞에 동전 하나 떨어트리면 된다"란다. 돈을 워낙 아끼는 성향이다보니 동전이 떨어지면 그것조차 주우려다가 버스에 치여 죽을거라는 소리다.

음악 취향

기본적으로 헤비 메탈을 가장 선호했지만, 사이키델릭 록, 포크 록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인생 말미에는 팝 록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가 1998년 인터뷰에서 밝힌 "가장 좋아하는 앨범 25선"을 보면 그의 음악적 취향을 알 수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비틀즈, 1967
Never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섹스 피스톨즈, 1977
Master of Puppets
메탈리카, 1986
The Beatles
비틀즈, 1968
Revolver
비틀즈, 1966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핑크 플로이드, 1967
Killers
아이언 메이든, 1981
The Doors
도어즈, 1967
British Steel
주다스 프리스트, 1980
1984
밴 헤일런, 1984
Led Zeppelin II
레드 제플린, 1969
Bluesbreakers with Eric Clapton
에릭 클랩튼, 1966
Abbey Road
비틀즈, 1969
London Calling
더 클래시, 1979
Let It Bleed
롤링 스톤즈, 1969
So Far So Good... So What!
메가 데스, 1988
Nevermind
너바나, 1991
Paranoid
블랙 사바스, 1970
Deep Purple In Rock
딥 퍼플, 1970
Blackout
스콜피언즈, 1980
Rumours
플리트우드 맥, 1976
Use Your Illusion
건즈 앤 로지스, 1991
Who's Next
더 후, 1971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벨벳 언드그라운드, 1967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킹 크림슨, 1969

음악을 공부하는 어린이에게 추천해줄만한 앨범 3개로 비틀즈의 "The Beatles",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그리고 플리트우드 맥의 "Fleetwood Mac"을 꼽기도 했다.

타 음악가와의 관계

로리 갤러거,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피트 타운젠드, 폴 매카트니, 존 레논, 로저 워터스 등 여러 음악가들과 두루 친했고 특히 에릭 클랩튼과는 엄청난 절친 사이였다. 로리 갤러거는 후술하겠지만 음악적 성향, 외모, 성격까지 비슷해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음악적으로는 비틀즈와 더 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언급했으며 종종 존경감을 표시하곤 했다. 후배 록밴드들과도 매우 친해서, 메탈리카나 주다스 프리스트 같은 까마득한 후배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글램 메탈부터 데스 메탈까지 여러 메탈 장르들의 밴드들을 정확히 꿰고 다녀 종종 무명 밴드에게도 놀라움을 선사해줬다. 그래서 후배 메탈 팬중에서는 피터 레이놀즈의 팬들이 아주 아주 많다.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음악가들과도 가리지 않고 음악적으로 교류하였으며, 지미 헨드릭스와도 생전에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같은 성소수자였던 엘튼 존, 프레디 머큐리와도 친한 사이였다.

데이비드 길모어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로저 워터스와 정치적 성향과 음악 취향이 맞아서 절친이 된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데이비드 길모어가 처음 주도적으로 제작한 핑크 플로이드 13집을 사상 최악의 앨범이라고 비난하며 데이비드 길모어가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 화근이었다. 다만 기타 실력의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했다고 한다.

정치관

매우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치 성향으로도 유명하다. 비록 히피 사상에 심취하고 프라하의 봄으로 공산주의에 회의감이 커지면서 공산당을 탈퇴하긴 했지만 10대 때에는 공산당 청소년 조직에서 활동했으며, 대학교 때에는 영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모임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상업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이후에도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은 여전해서, 번 돈으로 산 스포츠카를 몇번 타고는 바로 자신의 철학관에 위배된다며 팔아 치워버리고 돈을 모두 기부한 일화도 있다.[6]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 뿐만 아니라 반전운동, 환경운동, 장애인 인권 등 여러 의제에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페미니즘과 동성애 권리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진보적인 활동을 보여왔다.[7]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싱글곡은 빌보드 1위까지도 올랐다. 1980년대에는 우경화된 노동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일부 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노동당 지지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노동당의 "더 큰 정부, 더 큰 통제" 정책에는 반대했다. 또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말년에는 뉴스를 볼때마다 토니 블레어에게 쌍욕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정당 정치와 성향이 잘 맞지 않았던듯하다.

환경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폴 매카트니와 정치 성향이 맞아 정치적인 목소리를 같이 내는 사이가 되었고, 존 레논과도 경제적인 면에서 많이 일치해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1972년에 보수적인 정치 성향으로 유명한 에릭 클랩튼과 정치 얘기를 하다가 빡쳐서 펜더(Fender) 기타로 에릭 클랩튼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절교 직전까지 갔다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하면서 화해했다.

성적 지향성

각주

  1. 1972년 취득
  2. 은퇴
  3. 1위 핑크 플로이드, 2위 비틀즈, 3위 마이클 잭슨, 4위 엘비스 프레슬리, 5위 엘튼 존, 6위 레드 제플린, 7위 피터 레이놀즈
  4. 지미 페이지와 바람이 났다는 설도 있다.
  5. 본래 아일랜드 혈통에 관심이 있었고 72년도에 아일랜드 국적을 따기도 했다.
  6. 여기서 그가 단순히 입만 떠벌리는 입진보가 아님을 보여준다.
  7. 다만 레디컬 페미니즘 등 여성우월주의적인 목소리에 대해서는 꾸준히 경계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해서 국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혐 음악가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진적도 있다.

기타

모티브 : 로리 갤러거, 프레디 머큐리, 존 레논, 시드 바렛,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
[ 펼치기 · 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