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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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특별행정구 香港特別行政區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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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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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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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1일 ~ 2024년 --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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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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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혁명(가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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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영국령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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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 홍콩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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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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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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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군 행진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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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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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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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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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1997년 7월 1일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4년 9월 26일 ~ 2014년 12월 15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9년 3월 15일 ~ 2024년 6월 13일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2020년 12월 10일 특별행정부 소멸 2024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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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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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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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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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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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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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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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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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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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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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중국어(사실상 광둥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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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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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1,777명(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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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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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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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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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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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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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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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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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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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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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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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반 간선제, 단원제, 제한선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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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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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1993년 ~ 2003년) 후진타오 (2003년 ~ 2013년) 시진핑 (2013년 ~ 2024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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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행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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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치화 (1997년 ~ 2005년) 도널드 창 (2005년 ~ 2012년) 렁춘잉 (2012년 ~ 2017년) 캐리 람 (2017년 ~ 2024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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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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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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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시장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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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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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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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요
홍콩 특별행정구 (香港特別行政區,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는 1997년 홍콩 반환이후 2024년 영연방 산하 홍콩 자치령 수립 이전까지 존재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이다.
6.역사
6.1.반환과 안정기
1997년 7월 1일에 홍콩의 주권은 영국으로 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으며 홍콩 전역의 유니언 잭이 내려지고 오성홍기와 구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게양되었다. 반환 직후 홍콩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주가가 폭락하고 많은 홍콩인들이 중국으로 이민을 가는 등의 혼란이 거리를 매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50년 동안[4]일국양제에 의한 홍콩인의 자치를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발빠른 아시아 외환위기 대처와[5] 성공적으로 치뤄진 입법회 및 행정장관 선출로 인해 홍콩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으며 해외로 망명을 간 홍콩인들도 점차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며 홍콩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콩 민주주의 붕괴의 조짐은 반환 후 6년도 채 되지않은 2003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 중국 정부가 홍콩 국가보안법[6]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50만 홍콩 시위대가 그 앞을 막았고 결국 국가보안법은 일단은 부결시켰으며, 그 이후에도 2005년 평등선거 시위, 2009년 반국가분열법 반대 시위, 2013년 애국교육[7] 필수과목 지정 반대 시위 등 여러 시위가 일어나는 등 점차 중국 본토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시진핑 집권 이후 폭발하게 된다.
6.2.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우산 혁명)
2010년대 이후 홍콩 내에서는 홍콩의 행정수반이자 실질적인 국가원수인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홍콩인들의 요구에 중국 정부는 결국 2017년 이후부터는 행정수반에 대한 직선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이는 사실 눈가리고 아웅이였다. 중국 정부에서 제의한 '직선제'란 중국 전인대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후보들을 선출한 뒤 그 후보들 중 한 명을 행정장관으로 선출하는 식이였다. 차라리 기존 홍콩 입법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이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 홍콩인들이 이를 받아드릴리가 없었고 결국 홍콩인들은 거리로 나오게 된다.
9월 22일에 홍콩의 주요 24개 대학이 동맹 휴학을 선언했고 26일 부터는 학생들이 대규모로 체포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홍콩 주민들은 이시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조슈아 웡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 반전되었다. 그는 자신들의 세대에서 민주화를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체포되어 가면서도 이를 끝까지 주장했다.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강화되어만 갔으며 단식시위가 시작되는 등 민주화 열풍은 점점더 강해져만 갔다. 그러나 이후 홍콩 경찰이 강경 진압을 천명하자 이에 우려를 표한 지도부가 일부 자수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마지막 시위대가 12월 15일에 철수하며 우산 혁명은 끝이나게 된다.
2014년 홍콩 우산 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며 완전한 민주화를 쟁취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2014년의 혁명은 홍콩인들과 세계 만방에 홍콩이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님과 홍콩 내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4년의 경험과 노력이 모여 2019년 혁명의 뿌리가 되게 된다.
6.3.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이후 홍콩은 겉으로 보기에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지 4년 반이 지났고 입법회 선거를 비롯한 여러 정치적 시스템도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경제또한 다시 호황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안정의 뒷 편에서 중국정부는 홍콩의 주권을 야금야금 파먹어가고 있었다. 2019년 3월 9일에 중국 시진핑 당시 국가주석은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을 홍콩 행정장관인 캐리 람 행정장관을 통하여 제출하였다. 이 법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홍콩 내에서 중국 정부(중국 공산당)와 홍콩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 혹은 행동을 했을 경우 국적에 관계없이 중국 본토로 송환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법안이였다.
한마디로 국적에 관계없이 홍콩에서 반중·반정부 발언을 한 사람은 중국으로 끌고갈 수 있게하는 법안이란 소리였다. 당연히 홍콩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뽑으려는 이런 시도에 많은 홍콩 시민들은 분노했고 이미 법안이 제출된 당일부터 소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2019년 6월 9일에 주최측 추산 103만 명[8], 경찰 추산 25만 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가 빅토리아 공원에서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상인들은 철시했고 초·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도 잔체로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며 부두의 노동자들과 회사원들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심지어 최종 표결이 예정되어 있던 80만 명[9]이 입법회를 포위하여 최종 표결이 연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5대 요구사항을 내세우며[10]민주화 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러나 홍콩 당국의 폭동적 시위진압과 코로나 19의 1차 대유행으로 인해 시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떨어져 가던 와중이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다시 한번 반전시킬 또하나의 기폭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 국무원과 홍콩 행정부 간의 팩스에서 유출된 한 문서였다. 그 문서의 제목은 중국어로 '关于中国人民解放军进驻香港的议案'[11] 영어로는 'Agenda on the Chinese People's Liberation Army's entry into Hong Kong'였는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중국인민해방군의 홍콩 투입에 대한 안건'이였다. 당시 홍콩 입법회는 시위로 인해 사실상 정회 중이였는데 이런 문건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홍콩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중국 정부 단독으로 인민해방군을 진주시키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많은 홍콩인들은 다시한번 분노하여 시위에 돌입하였다.
6.4.2020년 중국 정치위기와 붕괴
7.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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