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동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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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6일 (금) 10:40 기준 최신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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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3대 황제
광종 열황제 | 光宗 烈皇帝
출생 1849년 8월 13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 1927년 12월 2일 (78세)
대한국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능묘 위릉(威陵)
재위 대한국 황태자
1877년 2월 10일 ~ 1890년 2월 2일
대한국 황제
1890년 2월 3일 ~ 1920년 12월 31일
대한국 태상황
1921년 1월 1일 ~ 1927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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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건성세
元建盛世

대한국 제3대 황제.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열황제(烈皇帝).

평가

뛰어난 통치력을 통해 선황의 유산을 잘 물려받아 한국을 팽창, 제국의 길로 이끌었다. 이 시기 한국은 청나라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서구 열강들을 제치고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확인하였으며 한러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본격적인 열강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울러 인구와 자원, 새로 얻은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유능한 수상들을 발굴하는 등 번영의 시기를 열었다.

하지만 통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점점 쌓여가는 국민들의 불만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고 억제하는 정치를 편 폭군의 일면도 있었으며 1910년대 후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음에도 권력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명시하지 않아 태자와 수상간의 미묘한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등 국가 운영 체계가 조금씩 망가져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렇게 쌓인 국가적 모순은 12.10 운동으로 폭발해 한국의 존망이 걸린 사건으로 비화하였으며 황제 자신은 사건에 대해 전혀 통제하지 못한채 무방비한 상태로 있다가 뒤늦게 태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후대 황제와 그 치세의 유능한 수상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었으며 이로인해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는 광종 황제 치세의 팽창과 번영이 속 빈 강정이 될 뻔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