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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size:13.5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rgba(235,193,82,.8);">1. 생애</div> | <div style="font-size:13.5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rgba(235,193,82,.8);">1. 생애</div> | ||
1441년(세종 23),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원손이 되었으며, 이에 세종이 기뻐 2급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는 교지를 발표하였다. 안타깝게도 광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는데, 현덕왕후는 광종을 낳고 얼마 안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종 이전에도 문종은 아들을 얻었으나 두 아들 모두 얼마 못가 죽고 말았으니, 광종이 사실상 유일한 아들로 온 왕실의 관심과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어머니처럼 보살핀 것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광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혜빈 양씨가 광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광종에게 젖을 물렸다고 한다. | |||
1448년(세종 30), 6살이 된 광종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왕실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광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으며 할아버지 세종이 실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문종과 비슷하게도 논어를 이른 나이에 졸업하고 사서오경을 일찍이 배웠으며, 어릴때부터 조회와 조계에 문종과 함께 참석해 국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이때까지는 문종이 건강했으나, 광종이 13살이 되던 해부터 문종은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광종이 성년이 다된 1460년(문종 10년)에는 병이 심화되어 광종에게 서서히 정사를 맡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자신이 북한산성의 완성을 보기까지는 친정하기를 원했기에 광종에게 많은 일을 맡기지 않았다. | |||
1461년(문종 11년)에 이르러 문종의 병이 극심해지자, 광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 광종은 대리청정을 매우 우수하게 수행하였는데,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노역자들을 찾아 격려하기도 하고, 적절한 휴식과 대가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직접 수차례 방문하여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지 감독하였다. 이러한 정성은 다음 해 탕춘대성을 축성할 때도 똑같이 실시하여 한양 백성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잡학에 조예가 깊었던 광종은 대리청정 동안, 독자적으로 관상감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산학과 천문의 이론적인 연구와 교육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관상감이 설치된 1465년에는 행차하여 관리들의 실력을 직접 시험해보았는데, 광종의 학식이 높아 관리들이 고초를 겪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관종은 매우 흡족해하여 관리들에게 포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 |||
1466년(문종 16년)이 되어서 문종의 병이 목숨을 위태롭게하자 광종에게 양위하고자 했으며, 하루는 대신들이 석고대죄하며 반대하였으나, 다음날에 문종의 기력이 쇠한 채로 대신들에게 간청하여 양위하였다. 그러고 문종은 상왕이 되었는데,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훙서하였다. 그렇게 11년의 왕세자 생활과 5년의 대리청정 끝에 광종은 2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광종은 원손, 세손, 세자를 모두 거친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으며, 이것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었고, 그의 왕권도 역시 매우 강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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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5일 (금) 17:30 판
光宗 · 광종
光宗 · 광종
1441년(세종 23),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원손이 되었으며, 이에 세종이 기뻐 2급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는 교지를 발표하였다. 안타깝게도 광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는데, 현덕왕후는 광종을 낳고 얼마 안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종 이전에도 문종은 아들을 얻었으나 두 아들 모두 얼마 못가 죽고 말았으니, 광종이 사실상 유일한 아들로 온 왕실의 관심과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어머니처럼 보살핀 것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광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혜빈 양씨가 광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광종에게 젖을 물렸다고 한다.
1448년(세종 30), 6살이 된 광종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왕실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광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으며 할아버지 세종이 실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문종과 비슷하게도 논어를 이른 나이에 졸업하고 사서오경을 일찍이 배웠으며, 어릴때부터 조회와 조계에 문종과 함께 참석해 국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이때까지는 문종이 건강했으나, 광종이 13살이 되던 해부터 문종은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광종이 성년이 다된 1460년(문종 10년)에는 병이 심화되어 광종에게 서서히 정사를 맡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자신이 북한산성의 완성을 보기까지는 친정하기를 원했기에 광종에게 많은 일을 맡기지 않았다.
1461년(문종 11년)에 이르러 문종의 병이 극심해지자, 광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 광종은 대리청정을 매우 우수하게 수행하였는데,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노역자들을 찾아 격려하기도 하고, 적절한 휴식과 대가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직접 수차례 방문하여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지 감독하였다. 이러한 정성은 다음 해 탕춘대성을 축성할 때도 똑같이 실시하여 한양 백성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잡학에 조예가 깊었던 광종은 대리청정 동안, 독자적으로 관상감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산학과 천문의 이론적인 연구와 교육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관상감이 설치된 1465년에는 행차하여 관리들의 실력을 직접 시험해보았는데, 광종의 학식이 높아 관리들이 고초를 겪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관종은 매우 흡족해하여 관리들에게 포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1466년(문종 16년)이 되어서 문종의 병이 목숨을 위태롭게하자 광종에게 양위하고자 했으며, 하루는 대신들이 석고대죄하며 반대하였으나, 다음날에 문종의 기력이 쇠한 채로 대신들에게 간청하여 양위하였다. 그러고 문종은 상왕이 되었는데,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훙서하였다. 그렇게 11년의 왕세자 생활과 5년의 대리청정 끝에 광종은 2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광종은 원손, 세손, 세자를 모두 거친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으며, 이것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었고, 그의 왕권도 역시 매우 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