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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은 내무장관으로 3년간 일한 뒤, 1959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록펠러가 실각할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때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과의 '''부엌 논쟁'''을 통하여, 미국 중산층의 유복함을 소련의 궁핍한 중산층과 비교하면서 서기장에게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에게 뒤쳐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미국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 닉슨은 내무장관으로 3년간 일한 뒤, 1959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록펠러가 실각할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때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과의 '''부엌 논쟁'''을 통하여, 미국 중산층의 유복함을 소련의 궁핍한 중산층과 비교하면서 서기장에게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에게 뒤쳐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미국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 ||
=== [[1960년 미국 총선]] === | |||
닉슨은 1959년 전당 대회에서 [[보수당 (신대륙)|보수당]]의 신임 당수, 즉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다. 넬슨 록펠러가 재선할 수 있었지만, 스푸트니크 쇼크를 비롯한 여러가지 악재로 인하여 인기가 높지 않았기에 비교적 인기가 높은 닉슨으로 선수를 교체한 것이었다. 보수당의 이러한 전략은 처음에는 잘 먹히는듯 보였고 실제로 보수당의 지지율은 선거 운동 초반기 13%p차이로 자유당을 제치고 1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
그러나 자유당의 당수 [[존 F. 케네디 (신대륙)|존 F. 케네디]]는 젊은 이미지를 내세워 보수당을 바짝 추격하였다. 그렇게 선거를 3주일 앞두고 대망의 TV 토론회가 열리는데, 닉슨은 케네디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보수당의 지지율 역시 폭락하였다.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닉슨의 모습과 달리, 당당하고 말도 유창하게 하는데다가 잘생기기까지한 케네디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다. 정작 케네디와 닉슨의 모습이 비추어지지 않았던 라디오 중계를 들은 사람들에게서는 닉슨이 훨씬 이성적으로 답변한데에 비해 케네디는 감성과 무논리에 호소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즉 닉슨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철저하지 못해 지지율이 밀린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뒤이은 TV 광고에서도 중독성 있는 후크송으로 무장한 케네디의 광고와 달리, 닉슨은 지루하고 밋밋한 광고를 내보내 홍보에서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 |||
다만 단지 그것만으로 닉슨의 패배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닉슨은 이른바 '''전국 의석 확보''' 전략을 세우고, 전국의 모든 주에서 최소 30%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다는 목표로 미국 전역을 유세하였다. 그러나 접전지와 우세지, 열세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돌아다닌 이러한 전략은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며 닉슨의 피로를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케네디는 미국 서부 및 중부의 접전 지역을 방문하는 동시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에게 집결을 호소하는 연설로 민주당의 집토끼와 중도층을 모두 붙잡는데 성공하였다. | |||
아무튼 이러한 선거 과정 끝에 닉슨이 이끌던 보수당은 단 '''12석'''차이로 자유당에 뒤졌다. 심지어 몇몇 지역에서는 부정선거 주장도 제기되었다. 총리 지명 투표에서는 사회당 의원들이 케네디의 매카시즘 동조 논란을 의식하여 투표에 전부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총리에 지명되는데 실패하면서 닉슨은 그야말로 선거에서 완패하게 된다. |
2022년 6월 25일 (토) 02:15 판
ⓒ Communist 1968, 2022 | CC-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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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52대 총리 리처드 밀허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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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년 1월 9일 |
캘리포니아주 캘리포니아 요바린다 | |
사망 | 1994년 4월 22일 (향년 81세) |
뉴욕주 뉴욕 | |
재임 기간 | 제-대 내무장관 (록펠러 내각) |
1956년 5월 18일 ~ 1959년 2월 9일 | |
제-대 국무장관 (록펠러 내각) | |
1959년 2월 10일 ~ 1960년 5월 11일 | |
제52대 총리 | |
1965년 9월 23일 ~ 1972년 8월 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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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가장 널리 알려진 닉슨의 사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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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52대 총리.
상세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넬슨 록펠러 내각 하에서 내무 장관과 국무 장관 직을 역임했다. 개인기를 바탕으로 1960년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했지만, 5년 뒤의 총선에서 승리해 1972년까지 총 7년간 미국의 총리로 재임하였다.
재임 기간 도중에는 중국과의 데탕트, 환경보호청 설립, 보편적 의료보험법 추진[2] 등의 업적을 낳았으며 대중적인 인기 역시 높았으나 1972년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총리직을 자진 사퇴하여 불명예스럽게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생애
청년기
1913년, 캘리포니아의 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돈이 없어서 입학하지 못했고, 대신 자신의 집 근처에 있던 대학교인 휘티어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는 태평양 전선에서 비전투 병력으로 근무하였다. 솔로몬 제도에서 실제 전선에 나가지는 않는 보직으로 4년간 복무했고, 이때 동료 군인들과의 내기 포커에서 딴 돈으로 1947년 미국 서민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물론 단순 포커로만 당선된 것은 아니었고, 그는 캘리포니아 내에서 성실한 변호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보수 정당인 보수당에서로 열심히 활동했기에 공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51년 미국 총선에서 그는 브로드웨이의 스타 배우였던 헬렌 더글러스와 맞붙었다. 그녀는 거물 정치인으로 자유당의 첫 여성 부당수를 맡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닉슨은 낙선 위기에 처했지만, 마침 닥친 미국 내의 반공 열풍을 타고 더글러스 후보를 공산당으로 몰아붙여 수백표차로 간신히 재선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네거티브 전략으로 인해 닉슨에게는 "비열한 닉슨"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더글러스를 상대로 거둔 접전승은 닉슨이 거물 정치인으로 올라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록펠러 내각의 장관으로서
1956년, 그가 모시던 넬슨 록펠러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로 취임하자 그는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43세로 내각 내에서 가장 젊은 각료였다고 한다.
정작 내무장관으로 임명될때는 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보수당 내에서도 닉슨의 낙마 여론이 높아졌지만, 닉슨은 이 위기를 TV 연설로 무마하는 정면 돌파로 답했다. 닉슨은 TV 광고에 출연해, 자신이 18,000 달러의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적인 용도로 받은 돈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강아지 체커스만을 자기를 위하여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꾸어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냐며, 불법적으로 받은 것은 맞지만 큰 부당이득을 얻은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억지로 국가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닉슨의 불법 정치 자금 수수에 대한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혔을 뿐더러, 닉슨에게는 가정적인 이미지까지 생겼다. 이른바 체커스 연설이라고 불리는 이 연설은 현재까지도 자신에게 처한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되며, 현재까지도 널리 명연설로서 인정받고 있다.
닉슨은 내무장관으로 3년간 일한 뒤, 1959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록펠러가 실각할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때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과의 부엌 논쟁을 통하여, 미국 중산층의 유복함을 소련의 궁핍한 중산층과 비교하면서 서기장에게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에게 뒤쳐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미국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1960년 미국 총선
닉슨은 1959년 전당 대회에서 보수당의 신임 당수, 즉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다. 넬슨 록펠러가 재선할 수 있었지만, 스푸트니크 쇼크를 비롯한 여러가지 악재로 인하여 인기가 높지 않았기에 비교적 인기가 높은 닉슨으로 선수를 교체한 것이었다. 보수당의 이러한 전략은 처음에는 잘 먹히는듯 보였고 실제로 보수당의 지지율은 선거 운동 초반기 13%p차이로 자유당을 제치고 1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자유당의 당수 존 F. 케네디는 젊은 이미지를 내세워 보수당을 바짝 추격하였다. 그렇게 선거를 3주일 앞두고 대망의 TV 토론회가 열리는데, 닉슨은 케네디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보수당의 지지율 역시 폭락하였다.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닉슨의 모습과 달리, 당당하고 말도 유창하게 하는데다가 잘생기기까지한 케네디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다. 정작 케네디와 닉슨의 모습이 비추어지지 않았던 라디오 중계를 들은 사람들에게서는 닉슨이 훨씬 이성적으로 답변한데에 비해 케네디는 감성과 무논리에 호소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즉 닉슨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철저하지 못해 지지율이 밀린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뒤이은 TV 광고에서도 중독성 있는 후크송으로 무장한 케네디의 광고와 달리, 닉슨은 지루하고 밋밋한 광고를 내보내 홍보에서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다만 단지 그것만으로 닉슨의 패배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닉슨은 이른바 전국 의석 확보 전략을 세우고, 전국의 모든 주에서 최소 30%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다는 목표로 미국 전역을 유세하였다. 그러나 접전지와 우세지, 열세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돌아다닌 이러한 전략은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며 닉슨의 피로를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케네디는 미국 서부 및 중부의 접전 지역을 방문하는 동시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에게 집결을 호소하는 연설로 민주당의 집토끼와 중도층을 모두 붙잡는데 성공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선거 과정 끝에 닉슨이 이끌던 보수당은 단 12석차이로 자유당에 뒤졌다. 심지어 몇몇 지역에서는 부정선거 주장도 제기되었다. 총리 지명 투표에서는 사회당 의원들이 케네디의 매카시즘 동조 논란을 의식하여 투표에 전부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총리에 지명되는데 실패하면서 닉슨은 그야말로 선거에서 완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