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따우

갈라드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9월 22일 (금) 10:5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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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해외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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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따우
浲艚 | Vũng Tàu
깃발 휘장
바람을 맞이하는 곳
Mũi Nghinh Phong
면적
143.21km2[1]
인문환경
국가 대한국
공용어 한국어, 베트남어, 프랑스어
인구 1,246,584명
인구밀도 8756.80명/km2
인구 구성 베트남계 42.9%, 한국계 35.4%, 화교 20.3%, 프랑스계 0.2%, 기타 1.2%
정치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 산하의 해외영토, 의원내각제, 단원제
국가원수 대한국 황제 선덕제
총독 위영호
수석장관 프랑수아 팜
경제
명목 GDP 전체 115억 7565만$(2020)
1인당 92,859$
GDP (PPP) 전체 91억 2936만$(2020)
1인당 73,235$
화폐 붕따우 달러(VTD, $)
ISO 3166-1
VT
ccTLD
.vt
시간대
UTC+7

개요

베트남 동남부 남중국해 연안에 위치한 대한국의 해외영토. 별명은 동양의 지브롤터.

베트남 바리어성의 바리어시와 접하고 있으며 크게 붕따우, 롱선, 고강, 푸억꺼 네개의 하중도로 이루어졌다. 1999년까지는 꼰다오 제도푸꾸이 섬까지 관할하고 있었지만 중앙정부에 의해 이 두곳이 직할령으로 개편되면서 붕따우 본토만 남게 되었다.

상징

명칭

공식 명칭
한국어 붕따우 / 영풍
정체 한자 浲艚 / 迎風
베트남어 Vũng Tàu
프랑스어 Saint-Jacques / Vung Tau
영어 Vung Tau

붕따우(Vũng Tàu)라는 이름의 유래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포르투갈 상선이 많이 정박했기 때문에 정박지라는 뜻의 근세 베트남어에서 왔다. 그러나 정작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곳을 상자크(São Jacques)라고 이름 붙였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까지 그대로 이어져 생자끄(Saint-Jacques)로 유지되었다. 1946년 베트남 독립후에는 붕따우라는 이름이 정착되었으며 한국령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한자를 그대로 읽은 봉조(浲艚)로 불리다가 1955년 붕따우 남부 절벽의 별명이었던 바람을 맞이하는 곶(Mũi Nghinh Phong)을 한자로 바꾸어 영풍(迎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81년 한국 정부가 해외영토를 비롯한 모든 행정구역을 고유 명칭으로 환원시키기로 결정하면서 한글 공식 명칭도 '붕따우'로 굳혀졌다.

국제기구에서는 영문 명칭인 Vung Tau로 활동한다.

VT라는 약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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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은 청해연화기(靑海蓮花旗), 베트남어 명칭은 lá cờ biển trong hoa sen(라꺼비언뜨롱호아센)이다. 연꽃은 국화이며 붕따우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배경의 파란색은 맑고 푸른 바다를 나타내며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지리

기후

도시구조와 구획

붕따우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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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quận, 區)
1. 박다오구
(Bắc đảo)

면적 31.2km2, 인구 416,283명. 붕따우섬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남부 도심 지역과 베트남의 바리어시 중간에 위치해 베드타운 역할을 한다. 바리어가 조금 더 가깝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 그쪽으로 통근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남베트남과의 관계가 개선되기 전에는 사실상 최전방 지역에 농사나 짓는 습지대라 난민이나 망명객들의 대규모 판자촌이 위치한 가난한 지역이었으나 60년대 중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뒤부터는 간척사업과 지반강화공사등을 통해 신도시로 개발되어 거대한 베드타운이 형성되어 현재에 이른다.
2. 고강구
(Gò Găng)

면적 22.7km2, 인구 416,283명.
3. 롱선구
(Long Sơn)

면적 41.8km2, 인구 82,137명. 붕따우 최대의 공업지구이다. 해수담수화 시설, 정유플랜트와 여러 공업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이곳의 해수담수화 시설은 일일 붕따우 물 소비량의 250%를 생산할 정도이며 일부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도 한다.
방(phường, 坊)
제1방
면적 0.90km2, 인구 4,641명(2021). 붕따우 입법원과 정부청사, 행정장관과 각료들의 관저등이 위치한 붕따우 정치행정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정부 공무원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도 위치해있다. 제4방과 비등비등한 붕따우에서 두번째로 작은 행정구역이다.
제2방
면적 2.70km2, 인구 14,765명. 아차우(Á Châu)라고도 하며, 붕따우 내에서도 지가가 독보적으로 높은 부촌이다. 대로변에는 상업단지가 위치해있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고급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다른 지역 대비 공원 면적도 넓은 편이라 생활도 쾌적한 편이다. 남쪽에는 하이당산이 위치해있으며 붕따우의 표어가 된 무이응인퐁곶(영풍곶)도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제3방
면적 1.62km2, 인구 4,359명.
제4방
면적 0.88km2, 인구 5,131명.
제5방
면적 2.89km2, 인구 3,216명.
제6방
면적 4.02km2, 인구 7,359명.
제7방
면적 1.63km2, 인구 7,359명.
제8방
면적 2.08km2, 인구 7,359명.
제9방
면적 2.74km2, 인구 7,359명.
제10방
면적 3.76km2, 인구 7,359명.
제11방
면적 9.52km2, 인구 7,359명.
12.샬럿
면적 2.22km2, 인구 6,274명. 원래 이름은 바우센이었으나 이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한 롯데그룹 회장인 신격호가 2020년 별세하자 지역 이름을 롯데그룹의 어원이 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샬럿으로 바꾸었다.
13.빠하지
면적 4.42km2, 인구 7,359명.
14.깡옌데
면적 5.02km2, 인구 67,359명. 베트남어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항구라는 뜻이다.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에 걸맞게 중국계가 상당수 거주한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중국 이민자들이 모여들어 급조한 도시라 우중충한 건물들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 형태였다. 또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붕따우 최악의 우범지대였으나 90년대부터는 점차 재개발되면서 잘 정비된 도시가 되어갔으며 치안도 덩달아 좋아졌다. 공항동북로에 접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지금은 대부분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으며 붕따우 정부는 홍콩의 모습을 빼다박은 이 지역을 보존할지 재개발할지 고민하고 있다.

붕따우항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며 동부의 응옥섬에는 석유저장시설과 소규모 휴양단지가 위치해있다. 하지만 응옥섬에 가려면 락두아방에 위치한 포구를 이용해야 한다.

15.락두아방
면적 3.14km2, 인구 7,359명.

구(區)와 방(坊)[2]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는 시민자치위원회를 투표나 합의를 통해 구성하여 행정을 볼 수 있는 자치권이 주어지나 방은 수석장관이 임명한 방장(坊長)이 행정서비스의 최고책임자가 된다. 방에서는 시민자치위원회가 방장에게 조언만 할 수 있는등 권한이 제한적이다.

프랑스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방에는 이름이 없고 번호가 매겨진다. 프랑스 파리처럼 각 방별로 별칭이 있긴 하지만 거의 쓰이지 않고 보통 숫자로 불린다. 하지만 단 네개의 방은 이름이 있는데, 보통 전통적 지명이 아닌 최근에 새로 붙여진 지명이거나 특별한 사유에 의해 타 방과 뚜렷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붕따우 본섬은 남부, 중부, 북부로 나뉜다. 보통 붕따우의 번화가 및 사무지구는 대부분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현대적이고 깔끔한 도시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중 최남단에 속하는 1, 2, 3, 4, 샬럿방은 도심으로 분류되며 이곳에 위치한 바우센 호수와 그옆의 호수의 이름을 딴 도로변에는 총독 관저, 입법원, 최고사법원 및 주요 장관들의 관저가 자리하고 있는 정치행정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여러 상업과 관광 시설이 위치해있으며 당연히 집값도 가장 비싼데 대로변의 수많은 상업건물 뒷편 좁은 길로 들어가면 꽤나 현대적이고 고급스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한채도 아니고 한호에 4백만원에서 천만원을 호가한다. 이 1, 2, 3, 4, 샬럿방 지역은 보안상 이유와 현재는 폐항된 붕따우국제공항 때문에 200m 고도 제한이 걸려있다. 원래는 100m였으나 조금씩 규제가 풀려 200m가 된 것. 남부는 붕따우가 석유 산업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다음부터 현대적인 도시 정비의 수혜를 가장 먼저 입은 곳이다.

역사

16세기까지 붕따우 근방은 유럽의 무역선들이 정기적으로 정박하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정박지’라는 뜻의 붕따우가 지명으로 굳혀진 것이다. 이곳을 드나들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상자크(São Jacques)라고 이름 붙였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에는 생자끄라고 불리며 그대로 유지된다.

1895년 2월 10일 이곳에 위치한 프억땅 요새(Phước Thắng)에서 응우옌왕조 군대가 프랑스 함선에 포격을 가했고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프랑스 통치 시대를 지나면서 단순한 정박지에 불과하던 붕따우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특유의 좋은 기후와 자연환경으로 프랑스계 지배층들의 별장 단지도 들어선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전후인 1946년 북베트남과 싸우고 있던 프랑스를 한국이 압박하며 제네바 합의를 통해 프랑스를 물리쳤고 베트남 내의 반공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그리고 친프랑스 세력을 한국이 중재하는 과정에서 1949년 베트남 공화국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응오딘지엠이 사이공과 붕따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 조직인 빙쑤옌을 비롯한 여러 친프 세력을 한국이 토벌해주는 조건으로 붕따우를 한국에 넘겼다. 다만 그냥 넘겨준 것은 아니고 한국에게 사이공을 비롯한 남부 개발을 위한 막대한 지원과 응오딘지엠 본인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52년 한국과 제네바 합의 관련국들의 참관 아래 베트남 총선거가 치러지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열강은 호치민과 베트민을 믿지 못했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반대했으며,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표면상 총선거를 찬성하는척 하면서 모든 베트남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총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며 남베트남 임시정부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다만 응오딘지엠이 그다지 베트남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한국은 반응오딘지엠 반공주의 정치, 종교단체들을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응오딘지엠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치하에서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계속되었고 탄압받던 종교인들과 반공 정치인들, 혼란이 지친 국민들이 붕따우로 몰려들며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홍콩의 구룡성채 못지않은 대규모의 빈민촌이 지어졌다. 또한 붕따우에 대한 남베트남의 군사적 위협과 압박이 심해지자 한국은 해상봉쇄를 위해 1956년 꼰다오 제도푸꾸이 섬을 점령, 붕따우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런 군사적 긴장상태는 1957년 한국과의 갈등을 꺼리던 군부 세력이 응오딘지엠을 축출하고 찐민테를 내세우면서 일단락 되었다. 한편 붕따우 정부는 거주 자격을 상향시켜 여러 이민자들을 다시 남베트남으로 송환시켰다. 하지만 붕따우의 인구는 내전을 피해 건너온 중국인들과 그냥 눌러앉게된 베트남인들 덕에 꾸준히 늘어났다.

1975년에는 붕따우 정부는 붕따우에서 석유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사실은 1950년대 초반부터 한국 정부에서 이미 알고있었지만 남베트남과의 갈등과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은폐하고 있었던 것. 아무튼 석유 덕분에 붕따우의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형성된 붕따우 토착자본들은 사이공등 베트남의 주위 대도시들에 흘러들어가며 베트남 경제도 함께 발전하기 시작했다.

정치

행정부

행정부의 수장은 입법회에서 선출한 수석장관이 맡는다. 수석장관은 내각회의 의장을 겸임하며 입법회의 동의를 얻어 장관을 임명한다. 총독은 수석장관의 각료 임명에 대한 인준권을 갖고 있지만 입법회 출범 이후에는 이의없이 인준하고 있다.

입법부


붕따우 입법회 원내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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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회(hội lập pháp, 立法會)

언어

제1공용어는 한국어지만 실제로는 제2의 위치를 점하는 베트남어가 가장 많이 쓰이며, 중국계통의 언어들도 20% 가량의 인구가 사용한다. 수백명 가량의 프랑스계 주민들도 있어 프랑스어도 쓰이며 그밖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마인어, 타갈로그어, 캄보디아어, 라오어도 쓰인다.

붕따우 출생 시민은 한국어와 베트남어 기본적으로 교육받기에 주민 대다수가 양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게다가 본인이 원한다면 교육과정 내에서 표준중국어를 배울 수도 있다.

대외관계

경제

보통 홍콩이나 싱가포르등 도시국가는 금융 허브나 항구로서 기능하며 수익을 벌어들이는 경제구조를 갖고있는 반면 붕따우는 두가지 기능을 모두 하는 동시에 석유까지 생산하는 산유국이다. 동나이강과 사이공강 하구, 간라이 만은 물론 남중국해 방면으로도 상당량의 석유가 매장되어있어 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채굴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역사적 이유로 매우 좁은 영토에 비해 공업 육성에 꾸준히 투자해와서 롱선과 고강 지역에는 공업단지와 정유단지가 위치해있으며 생필품도 어느정도 자체 생산한다. 그러나 많은 인구, 좁은 영토라는 현실적 한계로 인해 여전히 상당량을 베트남이나 외국에서 수입해오고 있는 처지다.

주민

민족

2021년 조사 기준 베트남계 42.9%, 한국계 35.4%, 화교 20.3%, 프랑스계 0.2%, 기타 1.2%가

영주권

붕따우는 명목상으로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적이란 것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영주권자가 곧 붕따우 시민이다. 하지만 이 영주권은 태생적으로 붕따우 시민이 아닌 사람에게는 매우 따기 힘들다. 붕따우 시민법에는 정부가 특정 인물에게 영주권을 부여하려면 정부 또는 입법회가 붕따우에 현저한 공헌을 하였거나 또는 할 것으로 인정한 자, 이민법에서 정한 조건을 충족시킨 자로 한정된다. 문제는 이 이민법에서 규정한 영주권을 받기 위한 조건이 배우 빡빡한데 우선 붕따우에 본인 소유의 80평방미터 이상의 주택이 있어야하며 이 주택을 제외한 전체 자산의 규모가 30만 붕따우 달러 이상(60만원 이상)이어야 한다. 아울러 한국어, 베트남어, 프랑스어 세 언어중 두개 이상을 유창하게 할 수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 조건은 한국 본토 국적자에게도 예외가 없어서 영주권을 막 퍼주는 대마은기와 큰 차이가 난다.

문화

교통

이곳도 면적은 좁고 인구는 많은 여느 도시국가처럼 개인 승용차를 배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아직까지 도시 내로 들어오는 철도조차 없어 모든 물류는 도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로를 가능한 덜 막히게 하는 것이 붕따우 정부의 최대 목표이고, 모든 도로 교통 정책은 철저하게 버스와 물류 운송에 필요한 차량 위주로 짜여져 있다. 일단 자동차를 구매하려면 자동차 가격의 130%에 달하는 10년 단위의 자동차 등록비를 내야 하며 취득세율은 무려 50%이다. 게다가 환경보증금으로 12만 붕따우 달러(한화 약 1만 2천원)을 내야 하는데 만일 붕따우 밖에서 폐차할 경우에는 돌려받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개인이 자동차를 구매하려면 자동차 가격+등록비+취득세+환경보증금까지 내야 하는 구조로,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 영주권이 없는 사람은 붕따우에서 차량을 구입할 수 없고 오직 렌트만 가능하다. 그마저 승용차 렌트 업체에게도 상당한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당연히 렌트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으며 5년 이상 장기렌트를 하면 차 가격을 상회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외국인 개인이 차를 렌트하는 경우는 없고 관광객은 대중 교통을, 업무로 방문하는 외국인은 법인 차원에서 렌트한 차량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붕따우에 방문하면 자가용이 매우 많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윗문단에서는 자가용을 완전히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한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대다수의 붕따우 시민은 그것을 감수하고 자가용을 마련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차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붕따우 정부도 아예 자가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주요 도로 교차점마다 회전교차로를 설치하는 등 교통체증을 최대한 막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 간척사업을 통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2. 한국의 동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