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y634, 2024 - | CC-0


대일본제국
외지1945-1990
[ 펼치기 · 접기 ]


대일본제국의 외지
상항
桑港
Japanese ruling Shoko
국기 문장
width: calc(100% + 5px)
1945년 9월 2일 ~ 1997년 9월 26일[1]
아카기 조약 이전 반환 이후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주
미합중국
상항 특별자치구역
상징
국가
기미가요(君が代)
역사
[ 펼치기 · 접기 ]

일본의 주둔 1945년 9월 2일
상항 신민 칙령 반포 1945년 9월 28일
야스다 위기 1963년 3월 17일
상항 폭동 1972년 4월 10일
상항 의회 설립 1973년 10월 19일
상항 주가조작 사건 1982년 8월 20일
미합중국 반환 1997년 9월 26일

지리
면적
121.4km²
위치
미대륙 샌프란시스코
총독부 청사
소라노우치 (空の内)
접경국
미합중국
인문환경
공용어
일본어, 영어(사실상)
인구
653,940명(1996년)[2]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알파벳(사실상)
종교
국가신토, 불교, 기독교 등
정치
국가원수
천황 (天皇)
정부 수반
총독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해군통치
연호
쇼와 (1945년 ~ 1989년)
헤이세이 (1989년 ~ 1997년)
주요 총독
경제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통화
일본 엔(円)
쇼와 중반 1960년대 상항의 전경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일본아카기 조약을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를 영구 조차지로 할양받으면서 형성된 식민지. 일본의 외지 중 유일하게 영어권에 속했으며, 1945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졌다. 일미태평양평화조약에 의거해 반환되었고, 현재 미일간 합의에 따라 미국 하 상항 특별자치구역이 되었다.

오늘날의 동양식 도시의 느낌을 풍기는 이국적인 상항을 탄생시킨 시대이기도 하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서양인이라는 이미지는 상항에서 파생되었고, 상항의 문화는 일본과 서방의 결합으로서 꽃피워졌다.

상세

일본어 독음은 쇼코(しょうこう, Shoko)였다. 통치 기구로는 상항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총독부보다도 해군의 권한이 막강했고, 상항은 다른 태평양 식민지가 그랬듯 해군의 영지나 다름이 없었다.

1945년 일본군이 처음 상륙했을 때는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의 반발이 대단히 거셌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미국 시민이 아닌 일본 신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곳곳에서 테러와 반일 활동이 벌어져 초반에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상항을 다루는 데 있어 조심스러울수 밖에 없었다.

상항은 냉전 시대 적국인 미국의 본토를 정면에서 겨누는 최전방이자 요충지였고, 또한 일본이 처음으로 지배하는 백인들의 영토였다. 이러한 전략적 가치와 상징성 때문에 일본은 상항을 애지중지했고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또한 여타 공영권 식민지와 달리 해군의 영지라는 점에서 온건한 통치가 이뤄져 주민들은 곧 저항을 멈추고 상항 내 주민들과 일본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했다.

일본인들이 이주해 들어와서 건물과 땅을 사들이고, 자이바츠에 의해 공장과 회사가 지어지면서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당시 패전 직후의 미 본토가 불황에 시달리던 것에 비해서 상항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식 교육을 보급해 일본어를 가르치고, 상항 주민들에게 일본으로의 유학 기회를 주는 등 여타 식민지인은 받을수 없던 우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상항은 급속히 일본의 문화와 언어가 곳곳에 침투하고 동화되어 갔으며, 일본어는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의 지위로 올라갈수 있었다. 적어도 일본은 상항의 전략적 가치와 상징성을 고려해 주민들에게 복리후생을 제공했고, 주민들은 천황에 복종하며 살았다.

이때 일본-서양 혼혈도 매우 많이 탄생하여 본토로 이주해오기도 했다.

동양식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미국 시대에 지어진 금문교와 일본식 빌딩의 조화는 상항의 낭만을 더욱 더했다. 이렇다 보니 문화도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여 일본어로 불리는 미국식 클래식, 재즈 등이 탄생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서방 문화가 통제되던 시기, 상항 문화는 일본 문화가 정체되지 않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상항의 이면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전후 유입된 일본인들에 의해 경제가 급속도로 장악되고 종속되었다. 식민당국은 당연히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현지인들은 삽시간에 일본인들의 엔화 자금력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중하층민으로 전락해 상항의 발전된 경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일본은 또한 주민들에게 결코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상항을 개발할지언정, 일본 제국 내에서 백인이라는 인종적 격차는 극복할수 없었고 이주 일본인들에게 사회적으로 차별받았으며 정치적 권리는 1972년 상항 폭동의 맛을 본 70년대에 가서야 의회가 설립되며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항에서의 일본의 통치가 크게 흔들리는 일은 통치 종료 시점까지도 없었다. 폭동이나 소요도 일본 자체에 대한 비토보다는 총독 교체 요구, 참정권 요구 등 정책에 대한 규탄 성격인 것이 많았으며, 80년대 기준 젊은층은 자신의 나라를 일본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1989년 냉전이 끝나고, 일본이 경제 불황에 직면하기 시작하며 군축을 단행하자 상항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994년부터 시작된 미국과의 공동 협상에서 상항을 반환하는 방향으로 논의되었고, 결국 1997년 공식적으로 일미간 공동선언에 의하여 일부 태평양 속령과 함께 미국 특별자치구역으로서 반환이 이루어진다.

역사

성립

1945년 9월 2일, 아카기 조약에 근거해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일본군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태평양 제도 및 샌프란시스코를 넘긴다는 아카기 조약에 조인하고 일본군은 할양받은 영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8월 29일 캘리포니아주가 일본 할양이 확정된 샌프란시스코 시 지역에서 행정권을 포기하고, 9월 2일 일본군이 상륙해 샌프란시스코를 차지했다. 이때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일본군 제독 이토 세이이치에게 항복한다.

행정구역

교육

역대 총독

틀:역대 일본 상항 총독

평가

여담

  1. 일미태평양평화조약 발효 후 6개월 유예를 둬 반환되었다.
  2. 일본인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