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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llang|de|Albestrenberger Bund}})은 1807년부터 1873년까지 지금의 [[알베스트렌베르크]] 지역의 존속했던 국가이다. [[틸지트 조약]](Frieden von Tilsit)으로 [[동프로이센]](Ostpreußen)과 [[서프로이센]](Westpreußen)이 분리 독립된 뒤, [[라인동맹]](Rheinbund)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원정]] 당시에 [[러시아 제국]]과 비밀리에 협상함에따라 [[빌뉴스]], [[리트비아]] 일대로 확장하여 친러시아 면모를 보였다. 이후에 [[보오전쟁]](Preußisch-Deutscher Krieg) 중 [[라스텐부르크 전투]](Schlacht bei Rastenburg)에서 패배함에 따라 독일 지역 내 영향력을 잃고 연방에서 퇴출되었으며,<ref>당시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동군연합적 체제는 자체적인 관세동맹을 중심으로 유지한 채로 독일 지역과의 경제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는 점에서 이중 관세동맹의 모습을 보였다.</ref> 그 뒤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 지역이 통일하여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 성립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카를 요제프 2세]](Karl Joseph II)가 통일 왕국을 수립하면서 관세 동맹에 의거된 동군연합체적 성격은 소멸하게 되었다.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llang|de|Albestrenberger Bund}})은 1807년부터 1873년까지 지금의 [[알베스트렌베르크]] 지역의 존속했던 국가이다. [[틸지트 조약]](Frieden von Tilsit)으로 [[동프로이센]](Ostpreußen)과 [[서프로이센]](Westpreußen)이 분리 독립된 뒤, [[라인동맹]](Rheinbund)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원정]] 당시에 [[러시아 제국]]과 비밀리에 협상함에따라 [[빌뉴스]], [[리트비아]] 일대로 확장하여 친러시아 면모를 보였다. 이후에 [[보오전쟁]](Preußisch-Deutscher Krieg) 중 [[라스텐부르크 전투]](Schlacht bei Rastenburg)에서 패배함에 따라 독일 지역 내 영향력을 잃고 연방에서 퇴출되었으며,<ref>당시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동군연합적 체제는 자체적인 관세동맹을 중심으로 유지한 채로 독일 지역과의 경제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는 점에서 이중 관세동맹의 모습을 보였다.</ref> 그 뒤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 지역이 통일하여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 성립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카를 요제프 2세]](Karl Joseph II)가 통일 왕국을 수립하면서 관세 동맹에 의거된 동군연합체적 성격은 소멸하게 되었다.


==개요==
{{본문|알베스트렌베르크의 역사}}
===성립 이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sche Kriege) 이전에 [[동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국]](Deutschordensstaat)의 정복 이래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773년의 하나의 주로 편입되었다. [[서프로이센]]의 경우에는 뒤늦게 18세기 이후에 진행된 [[1차 폴란드 분할]]로 획득하게 된 영토였다.<ref>이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이 [[서프로이센]]을 편입하기 이전까지 [[동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를 기준으로 [[월경지]] 영토로서 유지되었다.</ref>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획득한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은 온건적 통치책을 펼치면서 [[폴란드인]]들이 믿고있던 [[가톨릭]]을 존중하였고<ref>[[프로이센 왕국]]은 전신인 [[프로이센 공국]]의 성립부터도 [[마르틴 루터]]의 세속국가 수립의 영향을 받아 첫번째 [[개신교|프로텐스탄티즘]]을 추구한 국가였다.</ref> 학교 내에서의 [[폴란드어]] 교육을 허락하기도 했다.<ref>이런 온건 통치책을 펼친 [[프리드리히 대왕]]은 개인적인 일화로서 폴란드인과 폴란드를 '더러운 유인원'과 '야만인의 종속된 정부'라는 혹평을 한 만큼,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ref>
==틸지트 조약과 관세 동맹의 수립==
1806년에 독일 서남부의 국가들을 규합하여 [[라인동맹]]을 결성시킨 [[나폴레옹]]은 북독일의 중심국가였던 프로이센 왕국을 위협하게 됨에따라 프로이센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어 반나폴레옹 전선에 합류했다. 허나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군]]에 대응하지 못한 프로이센은 [[잘펠트 전투]](Schlacht bei Saalfeld)를 시작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에서 연달아 패배함에따라 수도 [[베를린]]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을 포기하고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를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일라우 전투]](Schlacht bei Preußisch Eylau)와 [[프리틀란트 전투]](Schlacht bei Friedland)에서의 패배로 임시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마저 프랑스군에 함락됨에 따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게 되었다.
[[틸지트]]에서 이루어진 강화 조약은 프로이센으로서는 굴욕적이면서도 지나치게 가혹했다. 당시 프랑스 제국의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마저도 프로이센에 대한 지나친 패전 처우에 대해 반발했으나,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대항했던 프로이센에 대해 금전적, 영토적 배상을 요구하였고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의 강화 조건을 묵인할 수 밖이 없었다. 이렇게 성립된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의은 [[엘베강 서부]] 지역의 [[베스트팔렌 왕국]],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프로이센 영토의 [[바르샤바 공국]], 마지막으로 결사항전을 벌였던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을 묶어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으로 분리시키면서, 프로이센의 영토는 1/3 이하로 축소되었으며 상비군의 규모를 제한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은 당시 프랑스에 협조적이었던 [[피슈하우젠]](Fischhausen) 후작,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Ludwig August I)를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을 겸임하여 통치하게 했는데,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명목적으로 [[아샤펜부르크]] 후작과 더불어 [[라인동맹]]의 가맹국 대표로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제국의 독단적인 행태에 질린 나머지 비밀리에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I)과의 협력을 제의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대등한 국가로 대우하지 않은 채, 러시아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수립하고 오스만 문제에 러시아를 배제한 일에 대해 적대감을 갖추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의 협력 제의를 적극 받아들일 수 있었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동-서 프로이센 내부의 제후국들을 중심을 별도의 관세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1807년 11월,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Albestrenberger Bund)의 성립을 선포했다. 프랑스 제국은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를 친나폴레옹 인물로서 인식함에따라 이 사건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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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8일 (일) 11:41 판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
관세 동맹에 의거된 국왕과 국민의 정부
독일어: Albestrenberger Bund
독일어: Regierung des Königs und des Volkes basierend auf Zollunion

 

18071873
국기 국장
라인동맹 가맹국1807~13
독일관세동맹 가맹국1834~66
알베스트렌베르크 관세동맹1807~73

검은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알베스트렌베르크 동맹 세력권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정치
공용어 독일어, 폴란드어
정부 형태 입헌적 동군연합체
국왕[1]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
Ludwig August I, 1807~1815 (초대)
카를 요제프 2세
Karl Joseph II, 1845~1873 (마지막)
입법 알렌슈타인 연방의회
Allenstein Bundestag
역사
 • 틸지트 조약 체결 1807년 7월 9일
 • 관세 동맹 수립 1807년 11월 6일
 • 빈 회의 1815년 6월 9일
 • 라스텐부르크 전투[2] 1866년 7월 1일
 • 통일 왕국 수립 1873년 4월 7일
지리
면적 66,370㎢
인구
1870년 어림 15,568,450명
기타
국교 가톨릭, 개신교
  1. 관세동맹 내 공식 칭호는 알베스트렌베르크에서의 국왕(König in Albestrenberg)이며,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의 대공이 해당 작위를 겸임한다.
  2. 보오전쟁쾨니히그레츠 전투 이전의 발발함.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독일어: Albestrenberger Bund)은 1807년부터 1873년까지 지금의 알베스트렌베르크 지역의 존속했던 국가이다. 틸지트 조약(Frieden von Tilsit)으로 동프로이센(Ostpreußen)과 서프로이센(Westpreußen)이 분리 독립된 뒤, 라인동맹(Rheinbund)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원정 당시에 러시아 제국과 비밀리에 협상함에따라 빌뉴스, 리트비아 일대로 확장하여 친러시아 면모를 보였다. 이후에 보오전쟁(Preußisch-Deutscher Krieg) 중 라스텐부르크 전투(Schlacht bei Rastenburg)에서 패배함에 따라 독일 지역 내 영향력을 잃고 연방에서 퇴출되었으며,[1] 그 뒤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 지역이 통일하여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 성립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카를 요제프 2세(Karl Joseph II)가 통일 왕국을 수립하면서 관세 동맹에 의거된 동군연합체적 성격은 소멸하게 되었다.

개요

성립 이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sche Kriege) 이전에 동프로이센튜튼 기사단국(Deutschordensstaat)의 정복 이래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773년의 하나의 주로 편입되었다. 서프로이센의 경우에는 뒤늦게 18세기 이후에 진행된 1차 폴란드 분할로 획득하게 된 영토였다.[2]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획득한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은 온건적 통치책을 펼치면서 폴란드인들이 믿고있던 가톨릭을 존중하였고[3] 학교 내에서의 폴란드어 교육을 허락하기도 했다.[4]

틸지트 조약과 관세 동맹의 수립

1806년에 독일 서남부의 국가들을 규합하여 라인동맹을 결성시킨 나폴레옹은 북독일의 중심국가였던 프로이센 왕국을 위협하게 됨에따라 프로이센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어 반나폴레옹 전선에 합류했다. 허나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군에 대응하지 못한 프로이센은 잘펠트 전투(Schlacht bei Saalfeld)를 시작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에서 연달아 패배함에따라 수도 베를린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을 포기하고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를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일라우 전투(Schlacht bei Preußisch Eylau)와 프리틀란트 전투(Schlacht bei Friedland)에서의 패배로 임시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마저 프랑스군에 함락됨에 따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게 되었다.

틸지트에서 이루어진 강화 조약은 프로이센으로서는 굴욕적이면서도 지나치게 가혹했다. 당시 프랑스 제국의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마저도 프로이센에 대한 지나친 패전 처우에 대해 반발했으나,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대항했던 프로이센에 대해 금전적, 영토적 배상을 요구하였고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의 강화 조건을 묵인할 수 밖이 없었다. 이렇게 성립된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의은 엘베강 서부 지역의 베스트팔렌 왕국,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프로이센 영토의 바르샤바 공국, 마지막으로 결사항전을 벌였던 동프로이센서프로이센을 묶어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으로 분리시키면서, 프로이센의 영토는 1/3 이하로 축소되었으며 상비군의 규모를 제한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국은 당시 프랑스에 협조적이었던 피슈하우젠(Fischhausen) 후작,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Ludwig August I)를 알베스트렌베르크 대공을 겸임하여 통치하게 했는데,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명목적으로 아샤펜부르크 후작과 더불어 라인동맹의 가맹국 대표로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제국의 독단적인 행태에 질린 나머지 비밀리에 러시아 제국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I)과의 협력을 제의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대등한 국가로 대우하지 않은 채, 러시아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수립하고 오스만 문제에 러시아를 배제한 일에 대해 적대감을 갖추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의 협력 제의를 적극 받아들일 수 있었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는 동-서 프로이센 내부의 제후국들을 중심을 별도의 관세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1807년 11월, 알베스트렌베르크 연방(Albestrenberger Bund)의 성립을 선포했다. 프랑스 제국은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1세를 친나폴레옹 인물로서 인식함에따라 이 사건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각주

  1. 당시 알베스트렌베르크의 동군연합적 체제는 자체적인 관세동맹을 중심으로 유지한 채로 독일 지역과의 경제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는 점에서 이중 관세동맹의 모습을 보였다.
  2. 이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서프로이센을 편입하기 이전까지 동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를 기준으로 월경지 영토로서 유지되었다.
  3. 프로이센 왕국은 전신인 프로이센 공국의 성립부터도 마르틴 루터의 세속국가 수립의 영향을 받아 첫번째 프로텐스탄티즘을 추구한 국가였다.
  4. 이런 온건 통치책을 펼친 프리드리히 대왕은 개인적인 일화로서 폴란드인과 폴란드를 '더러운 유인원'과 '야만인의 종속된 정부'라는 혹평을 한 만큼,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