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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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위대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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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대영제국의 황립 공영 방송인 BBC가 대영제국 신민 800만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의 명단을 공개한 순위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프레더릭 3세 아이작 뉴턴 빅터 피어슨 엘리자베스 1세 커트 코베인
6위 7위 8위 9위 10위
토머스 모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드레이퍼슨 에드워드 7세 리처드 해밀턴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브리타니아 제국 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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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왕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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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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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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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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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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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고냐 왕조
아폰수 1세 산슈 1세 페드루 1세 페르난두 1세
보르고냐 왕조
아비스 왕조
베아트리스 주앙 1세 두아르트 1세 주앙 2세
아비스 왕조
아폰수 5세 주앙 2세 마누엘 1세 주앙 3세
아비스 왕조
압스부르구 왕조
세바스티앙 엔히크 안토니우 필리프 1세
압스부르구 왕조
브라간사 왕조
필리프 2세 필리프 3세 주앙 4세 아폰수 6세
브라간사 왕조
페드루 2세 주앙 5세 주제 1세 마리아 1세
브라간사 왕조
미겔 1세 미겔 2세 미겔 3세 마리아 2세
브라간사 왕조
마리아 3세 페드루 2세 카를루스 1세 페드루 3세
브랜카로이즈 왕조
에두아르두 7세 프레데리쿠 5세 조르즈 4세 조르즈 5세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인도제국 제5대 황제
대영제국 제3대 황제
에드워드 7세 | Edward VII
중화제국 제3대 황제
순종 명황제 | 順宗 明皇帝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
信毅睿聖大孝至誠明皇帝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
인신의예성대효지성명황제
이름 에드워드 앨버트 패트릭 화이트로이드
Edward Albert Patrick Whitelloyd
출생 B.B. 21년 5월 5일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화이트로이드궁
대관식 16년 12월 5일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아일스버리궁
사망 60년 5월 17일 (향년 81세)
대영제국 캐나다 토론토 브로미치궁
능묘 헌릉(獻陵)
국적 대영제국
재위 연합왕국 국왕
8년 9월 11일 - 24년 12월 31일
대영제국 황제
16년 10월 18일 - 56년 10월 17일
중화제국 황제
16년 10월 18일 - 60년 5월 17일
인도제국 황제
16년 10월 18일 - 60년 5월 17일
대영제국 태상황
56년 10월 17일 - 60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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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化)
청(淸)
연호 천경(天慶)
존호 신서(伸瑞)
시호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
인신의예성대효지성명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
信毅睿聖大孝至誠明皇帝)
칸호 토로 게렐투
ᠲᠥᠷᠥ ᠭᠡᠷᠡᠯᠲᠦ
묘호 순종(順宗)
아호 광필(光苾)
부모 부군 프레더릭 4세 (B.B. 51 - 17)
엘리자베스 서튼 (B.B. 44 - 38)
자매 앤 앨리스 화이트로이드 (B.B. 17 - 59)
자녀 프레더릭 5세 (3 - 79)
신장 178cm
학력 세인트 조지 군사학교 (졸업)
종교 파일:캔터베리.png 성공회

개요

대영제국중화제국의 제3대 황제이자, 인도 제국의 제5대 황제이다.

상세

선황의 시대에 터진 경제 대공황을 수습하여 경제적 번영의 기초를 다졌으며, 재위 초에 대영제국-일본 전쟁이 일어났을때 대영제국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말년인 50년대에는 조용한 혁명으로 불리는 사회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전제군주적인 권한을 일정부분 감소시키고, 평민들의 권한을 확대하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창업군주인 프레더릭 3세와 더불어 대영제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로 꼽힌다. 대영제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것이 프레더릭 3세였다면, 에드워드 7세의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초강대국으로서의 대영제국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총 40년간 재위하여[1] 대영제국의 황제중 가장 오랜기간 재위하였으며,[2] 동시에 81세까지 장수하였기에 역대 대영제국의 황제중 가장 장수하기도 하였다.

생애

어린 시절

프레더릭 4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황제 섭정

대공황 수습

대영제국-일본 전쟁

대공황이 지속되면서 정치가 혼란해져, 군부가 정치권을 장악한 일본이 폭주하며 기존 패권이었던 조선-대만-만주 외에 중화제국 본토와 인도차이나까지 위협하자, 대영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령을 발표했다. 일본은 당시 대영제국으로부터 석유의 70%를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일본의 경제적 파산으로 이어지는 일이었다. 일본제국 군부는 더이상 대영제국과의 전쟁을 막을 수 없음을 선언하고, 대영제국의 해군 군사기지가 있던 하와이와 대영제국 동남아시아 중앙 군사본부가 있던 필리핀을 공격하였다.

전쟁 초반기에는 일본의 급습 때문에 필리핀이 함락되고, 태평양 주요 섬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중화제국 본토까지 일본에게 유린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인들의 주권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대영제국 식민지 주민에게 봉기할것을 종용했고 그 결과 곳곳에서 반영친일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본과 대영제국의 국력 차이는 매우 극명하였으므로 전쟁 자체가 일본에게는 매우 불리한 판이었다. 거기다가 일본은 점령지에서 학살, 강간, 약탈 등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지르면서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도 대영제국 식민지 주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에드워드 7세는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키고자, 식민지 주민과 대영제국 주민간의 평등 권리를 선언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화가 된다면 더이상 대영제국 본토 주민들의 특권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식민지 주민들이 없도록 식민지에도 본토와 똑같은 법률을 적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주민들에게도 큰 지지를 받으면서 일본의 처지는 약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7세가 직접 중화제국 본토를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하여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면서 국민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이 상황에서 소련까지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일본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5년 수도인 도쿄를 비롯하여 3개 주요 도시(도쿄, 기타큐슈, 니가타)에 핵공격을 받은 일본제국은 항복하였고, 만주, 대만, 조선 그리고 일본 본토가 모두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전후 대영제국의 영향력 확장

대영제국-일본 전쟁 종전 직후에는 영국의 반 식민지가 되어있던 포르투갈 왕국을 대영제국의 제후국으로 삼았다. 페드루 3세의 사망으로 브라간사 왕조의 혈통이 끊긴 상태에서 화이트로이드 황조의 수장인 자신이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직을 이어받게한 것이다. 이로서 대영제국의 패권은 남아메리카까지 뻗었으며, 얼마 이후에는 아르헨티나도 총독령으로 삼으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조용한 혁명

30년 인도차이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베트남과 라오스 지역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섰다. 이때는 그저 흔한 폭동으로 취급되어 진압되었으나 40년대에는 더욱 과격한 양상의 준내전이 벌어졌다.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특히나 독립 운동이 더욱 거셌던 것은 대영제국으로부터의 수탈 뿐만 아니라, 중화제국과 인도제국, 즉 "제2대영 본토" 출신의 유력자들까지 이들을 착취해갔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7세 본인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약속한대로 구조적인 수탈은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거의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랬기에 베트남, 라오스, 캄푸치아 일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크게 일어난 것이다.

대영 정부는 이를 유혈 진압하면서 거의 대학살에 가까운 진압이 이뤄졌다. 20만명 이상이 대영제국의 폭동적 시위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하여 인도차이나 내부에서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대영제국 내에서조차 비판 여론이 일었다. 대학생들의 인도차이나 유혈 진압 반대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내각이 교체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에드워드 7세는 이를 대영제국 체제 그 자체의 문제임을 인정하면서 내각과 손 발을 맞춰 개혁 정책에 착수하였다. 대영제국 내에서 팽배했던 인종차별의식의 폐지, 신분제로 인한 민권 제약의 완화, 군국주의적인 정책의 폐지, 동성애와 낙태의 합법화 등이 이때 이뤄졌다. 이런 일련의 사회 개혁 정책의 결과 대영제국은 성공회와 귀족이 중심이 되는 보수적 체제에서 비교적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국가로 변할 수 있었다.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었다고 일컬어지는 "밝은 20년" 시대가 이어졌다.

말년과 사망

55년 생전 퇴위를 발표하였다. 이는 대영제국 황제중 최초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사례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인기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이고 민간에서조차 반대 여론이 매우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의 건강은 이 시점에서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뜻을 굽혀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얼마 안있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한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56년 퇴위하였고, 그의 장남 프레더릭 5세가 황위를 이었다.

이후 4년간은 인도와 중국을 오가면서 요양 생활을 했고 대부분의 생활은 전통적으로 대영제국 황제들과 청나라 황제들의 요양지였던 원명원에서 하였다. 60년 3월, 간암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 고향에서 죽고 싶다며 대영제국 본토로 귀국하였으며, 2개월 후인 60년 5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성향

평가

역대 대영제국 황제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지 5세도 진보적이긴 하지만 사회 문제부터 경제, 외교 문제까지 에드워드 7세만큼의 진보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평이다.

동성애 합법화, 낙태 합법화, 인종차별법 폐지 등이 그의 치세동안 이뤄졌으며 그중 일부는 황제의 주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일설에 따르면 동성혼 합법화도 주장하였으나 성공회 및 정치권의 극심한 반대로 인하여 뜻을 접었다고도 한다. 동성혼 합법화는 조지 4세 치세인 86년에야 이뤄졌으니, 거의 40년을 앞선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성공회교도가 아니라 무신론자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생전의 기록을 보면 성공회 교도이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여담

각주

  1. 태상황으로 물러난 기간까지 포함하면 44년이 된다.
  2. 할아버지인 프레더릭 3세가 62년간 재위하긴 하였으나 이중 황제로 재위한 기간은 8여년 정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