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

Ernst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10일 (화) 13:22 판 (→‎전면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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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헝가리 혁명의 일부

독일 제국으로부터 보급된 장비를 착용한 주데텐란트 시민군
날짜1923년 2월 12일 ~ 1925년 2월 16일
장소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결과

1925년 프랑크푸르트 협정의 체결

교전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 해방전선
주데텐란트 독일인연합
헝가리 왕국 헝가리 왕국 (1924-)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헝가리 공화국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보헤미아 왕국
세르비아 보호령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인


프랑스 프랑스 제3공화국
폴란드 폴란드 제2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1924)
지휘관

오스트리아 제국 카를 1세
밀란 호자[1]
율리우 마니우[2]
루돌프 폰 아우엔[3]

헝가리 왕국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 공화국 쿤 벨러
카렐 크라마르[4]

알렉산다르 1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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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또는 제국 내전(독일어: Bürgerkrieg des Kaisertum)은 카를 1세 지지자와 제국 내의 독일인들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와 헝가리의 총리, 쿤 벨러를 중심으로 헝가리 공산당,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한 좌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내전이다.

1923년 2월 12일, 부다페스트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공산당 사병들이 시내의 라디오 방송국을 탈취, 헝가리 독립을 주장한 것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반란을 진압하려는 공통 육군란트베어(KK)에 반해 혼베드(KuK)을 중심으로 각 구성국의 독립주의자, 좌파인사들이 대항했고, 이후에는 독일 제국이 제국 내 독일인을 지원했고, 프랑스가 이를 견제하고자 헝가리를 지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국은 혁명의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주면서 국제 대리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후 1925년 2월 16일, 제국의 구성국 대다수가 독립 선언을 하자, 독일 제국의 중재로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열리면서 끝마쳤다. 이 내전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내전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었다. 독일인이 우세한 -공식적으로 제국의 밖이었지만, 암묵적으로 제국의 일부였던- 리히텐슈타인주데텐란트, -독일 연방에 속해있었던- 오스트리아 지역은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고,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폴란드에게 합병되었다. 세르비아 보호령은 내전으로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몬테네그로와 함께 연방 정부를 구성했고, -제3차 발칸 전쟁으로 잃었던- 제국령 세르비아를 합병했다. 보헤미아모라바 지역은 하나의 국가로 독립했으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사이의 완충지로 독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달마티아 왕국크로아티아로 분리되어 각각 독일 제국과 헝가리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배경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

1906년 포포비치가 제안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구상 지도

20세기 초반 이중 제국 형식을 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인헝가리인(독일인, 헝가리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44%를 차지했음)이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과 같은 소수 민족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특히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거주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자치권 행사가 제한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헝가리의 귀족이 1867년에 있었던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를 통해 수립된 다민족적인 제국이었지만 빈번한 시위와 폭동, 테러로 인해 불안정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급진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그가 제시한 개편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을 민족적, 언어적 구분에 맞춰 분류하고 구성국마다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이는 서로 다른 민족이 갖고 있던 권력, 권리의 행사에서 균형을 맞추고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 헝가리의 귀족들은 헝가리가 영토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계획은 큰 차질을 빚었지만, 대공의 계획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제외한- 소수민족 정당과 정치 인사 사이에서 이미 상당 부분 이야기 되어왔기에 1916년에 즉위한 카를 1세 또한 합중국 개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런 카를의 행보에 헝가리의 귀족은 빠르면 1920년대 중으로 비헝가리 민족들에 대한 지배권과 제국 내 민족적 특권을 빼앗길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들은 혹여나 일어날 권리 박탈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소수민족의 급진 독립주의자들을 계속해서 지원해주었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와 공산주의의 망령

1922년,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적백 내전이 마무리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출범했다. 이들은 제3인터내셔널로 알려진 국제 사회주의 단체를 통해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켜 독립적인 사회주의 정부를 꾸리는 것을 지원했다. 그 결과 헝가리 내에서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세력 또한 크게 늘어났다. 그들은 1920년 선거에서 헝가리 내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 있는 정치 단체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친볼셰비키파이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특사였던- 쿤 벨러를 중심으로 헝가리 혁명군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헝가리의 사회주의 전환에 있어, 첫 번째 과제는 헝가리의 독립이었다. 당대 인터내셔널의 영향을 받은 다수의 좌파 인사들은 공산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독립주의자를 겸했다. 따라서 이러한 행보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헝가리 귀족의 눈에 들었다. 비록 귀족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양립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제어할 수 있을 만큼만 헝가리 혁명군을 키우는 것이 이점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애초에 그들은 -'혼베드'로 불리는- 헝가리 정식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기에 독립 이후 혁명을 진압하기란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입장에서도 혁명군을 확충하고 선전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자금을 -그들이 알 수 없는 경로로- 확충할 수 있었기에 나쁜 일은 아니었다.

헝가리의 이권 투쟁에서 헝가리 귀족의 계획

헝가리는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에 이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른바 특권 국가였다. 그들은 슬로바키아 인과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을 왕국 아래에 두고 군림할 수 있었고, 정식적인 헝가리인을 위한 군대(KuK)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합중국으로 제국이 개편되면 이러한 특권은 해제되고 지배 하에 있던 민족들에게 특권을 나누어야 했다. 가장 먼저 영토부터 줄어들 것이고, 인구, 투표, 군대 모든 부문에서 특권이 해체될 것이란 건 자명했다.

따라서 헝가리는 특권 민족의 힘으로 그들의 주군카를 1세의 계획을 저항해야 했다. 또는 이전과 비슷하게 -대타협을 이끌어냈듯- 헝가리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압박하는 것이 방법이었다. 이마저 오스트리아에게 저지된다면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그들의 이권을 위해 제국의 탈을 벗기에도 충분했다.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경제적 인프라는 -이전과 달리- 오스트리아에 뒤쳐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합중국이 선포되면 즉시 그들이 가진 영토를 온전히 독립국 헝가리로 가져오기 위해 투쟁할 것을 각오했다.

내전 경과

부다페스트 혁명

헝가리의 독립은 헝가리의 귀족들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혁명군이 직접 소총을 보급받고 무장했다. 이후 1923년 2월 12일, 그들은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첫번째로 개국한- 라디오 방송국을 접수했다. 이와 동시에 역사 깊은 전화신문사인 히르몬도 전화국도 습격하여 장악했다. 그들은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트리아의 억압을 받은 모든 민족과 사회주의자에게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당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게 -뒤늦게라도 제한했지만- 상당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파장은 제국 전체에 막대하게 퍼졌다.

그러는 동안, 부다페스트 경찰서는 -불법 무력 행위를 일삼는- 헝가리 혁명군에 대항하여 투입되었지만, 이미 소련과 귀족들에게 상당한 자금을 받아 확충된 혁명군을 진압할 수 없었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경찰과 혁명군의 대치는 혁명군이 경찰의 방어선을 타개하고 철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헝가리의 귀족은 독립 선언이 있은 지, 이틀 동안 상황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오스트리아의 정치 인사들에게 추궁받았고, 그들의 독립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상당한 양의 전보가 오갔다. 다만 정확했던 것은 이미, 제국 내에서 소련의 물자로 무장한 혁명군이 몇몇 중심 도시의 치안을 마비시키고 장악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프라하, , 그라츠, 린츠, 브루노, 사라예보, 베오그라드와 같은 대도시에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일반 군대'가 진주하여 혁명군을 몰아내기 위해 총격전이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오스트리아 공산당이 '헝가리 혁명'에 동조하면서 곳곳의 정부청사를 습격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일주일 뒤, 헝가리의 독립 여부는 헝가리 귀족의 침묵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정도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 결과, 2월 21일부터 헝가리 왕국 국경으로 란트베어(KK) 병력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22일, 란트베어가 국경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전해들은 헝가리 귀족회의는 즉시, 혼베드(KuK) 사령부와 쿤 벨러를 부다페스트로 불러들여 회담을 진행했다.

전면전의 시작

1923년 2월 25일, 헝가리 혁명군은 공식적으로 혼베드(Ku)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헝가리 전역에 걸쳐서 혼베드 예비군이 징집되었다. 헝가리 내에 자리잡은 우익인사와 왕당파,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의 사도왕에 충성을 맹세한 제국의 '일반 군대'는 국경을 넘어 갈리치아부코비나 일대로 집결했다. 헝가리의 예비군 소집 소식은 즉시 카를 1세에게 보고 되었는데, 그는 헝가리를 진압하고 제국을 합중국으로 전환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참모총장이었던 아르투어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황제의 명령을 하달받아 헝가리가 예비군 징집 중인 27일 새벽을 기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혼베드 사단이 사격을 시작하면서 국경 일대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헝가리 전선

결과와 영향

같이 보기

각주

  1. 슬로바키아 국민당/(Milan Hodža)
  2. 루마니아 국민당/(Iuliu Maniu)
  3. 독일 국민당
  4. 국가 자유당/(Karel Kramá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