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23번째 줄: 23번째 줄:
|-
|-
| colspan="5" |  
| colspan="5" |  
<div class="mw-customtoggle-moonjo"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text-align:center; color:#000;">'''[ 펼치기 · 접기 ]'''</div>
<div class="mw-customtoggle-yungeun"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text-align:center; color:#000;">'''[ 펼치기 · 접기 ]'''</div>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moonjo" style="background:none; border: 1px solid transparent;width:100%; text-align:center;">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yungeun" style="background:none; border: 1px solid transparent;width:100%; text-align:center;">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background:none; margin: 0px -15px 0px; border: 1px solid transparent; align:center; font-size:100%; ">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background:none; margin: 0px -15px 0px; border: 1px solid transparent; align:center; font-size:100%; ">
{| style="margin-left:-2px; margin-right:-15px;margin-bottom:-12px;width: calc(100% + 5px);text-align:left;margin-top:-2px;"
{| style="margin-left:-2px; margin-right:-15px;margin-bottom:-12px;width: calc(100% + 5px);text-align:left;margin-top:-2px;"

2022년 5월 24일 (화) 01:20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틀:역대 북강성 성장 틀:역대 평흥광역시장

초대 북강성 성장
윤근 | 尹勤
출생 1883년 5월 6일
함경도 북청군 신포읍
(現 조선성 북청시)
사망 1951년 9월 19일 (향년 68세)
북강성 평흥시
재임 초대 북강성 성장 (관선)
1924년 4월 10일 ~ 1940년 12월 7일
[ 펼치기 · 접기 ]
시호 효경공 (孝景公)
작위 북하후(北河侯)
→ 평성공 (平城公)
→ 북강왕 (北江王)[1]
본관 파평(坡平)
편초(扁草)
가조(加助)
신장 191cm
부모 부친: 윤재서, 모친: 이씨
배우자 안희랑
자녀 2남 4녀
학력 함흥종합교습소
한성국립대학교 법학부
정당 무소속
약력 평양부 수석정무계원
6대 평성도호부사
초대 북강총독
화영상사 이사
2대 평흥국립대학교 총장

개요

한국의 관료, 정치인, 사업가. 북강성평흥의 아버지로 불리며 변방중의 변방이었던 북강 지역을 개척하는게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가난한 잔반 출신으로 성공한 지역정치가, 기업인이 되었으며 실제로 왕 작위까지 받았었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후대의 지역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현재도 북강성의 도시마다 그의 아호나 시호를 딴 길과 지명이 있으며 평흥의 대학 세곳의 창립자이자 지역 대기업인 화영철강의 공동설립자로서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유년기

1883년 함경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홍서로 고려 초의 문신 윤관의 33대손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윤근의 집안은 이미 중앙 관직에 진출한지 수세기나 지난 뒤였으며 귀족 작위를 받지 못해 평민으로 분류되는 잔반 계급이었다. 아버지는 서당을 운영하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얼마 안있어 그만둔 뒤 어부일을 하였고 모친은 이씨로 농민 출신이었으며 손으로 가잿도구등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둘 다 벌이는 썩 좋지 못해 늘 가난하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윤근, 윤형 형제는 열살이 조금 넘어서 신포읍내의 단천신문사에서 신문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잔반이라도 학문적 소양은 갖춰야 한다는 부모님의 교육관과 신문사에서 일하는 조건이 겹쳐 윤근은 신문물은 물론 국제 정세등에 대하 기초적 소양을 갖춘 2세대 ‘신사(新士)’계급으로 성장해 나갔다.

또한 윤근과 윤형 형제의 똑똑한 모습에 호감을 느낀 단천신문사 주필 김계영은 당시 각각 14살, 12살이었던 윤근과 윤형을 자신의 지인들이 소액의 교육비를 받아 운영하고 있던 함흥종합교습소에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훗날 함흥종합교습소는 윤근에게 인수되어 화영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가 윤근 사후인 1966년 효경고등학교, 효경중, 효경초로 분리개칭된다. 윤근은 교습소에서 우수한 학업성취도를 보여주었고 1900년 전국중등고시(현대의 수능에 해당)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1891년 처음 실시된 이후 늘상 지방 유력가 귀족 자제들이 수석을 차지해왔지만 윤근이 최초의 평민 출신 중등고시 수석이 되어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앙정부에서도 국가의 상업을 독점해나가며 점차 비대해지는 귀족층을 견제하기 위해 윤근을 적극적으로 치켜세워주었다. 광종 황제의 칙령으로 윤근은 한성부국립대학교에 특별입학 했다. 중등고시는 당시 입학시험이 아니어서 대학에 입학하려면 따로 시험을 쳐야 했으나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 광종 황제는 특히 변방의 가난한 집안 출신 소년이 전국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감명깊게 여겼다고 한다.

  1. 1946년 작위 반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