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북강성
자치행정구역
[ 펼치기 · 접기 ]
평흥광역시
자치행정단위
[ 펼치기 · 접기 ]
북강성의 성할광역시
평흥광역시
平興廣域市 | Pyeongheung Metropolitan City
깃발 휘장
시청 소재지 중구 중앙대로 22-4
지역 북강
하위 행정구역 15자치구 4자치군 8행정군
면적 6812.44km2
인구 4,723,675명(2023)
인구밀도 693.4명/km2
시간대 UTC+9
시장 무소속 박한영(재선)
시의회
36석
5석
3석
2석
1석
1석
구장·군수
13석
3석
3석
중추원의원
1석
4석[1]
국민원의원
2석
1석
1석
지역번호

개요

북강성의 성할광역시, 성도이자 최대도시. 북강 지역 최대의 공업도시이다. 북강성의 모든 것이라 불릴정도로 평흥대도시권은 인구, 경제수준 모든 면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

1899년 할빈 조약으로 북강성 일대가 대한국에 편입된 직후 평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관찰사 안현이 처음으로 이곳에 부임하면서 도시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태평양 전쟁 직후만 해도 대형 도시가 아니었으나 소련과의 대치로 인해 남평시와 함께 전방에 물자조달을 위한 생산기지 역할을 맡게 되며 급성장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들어서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정부는 평흥제철소를 배경으로한 자동차 생산 공장이 설립을 추진하였고 이것이 성공하면서 재기에 성공, 현재는 반도체 생산까지 맡는 첨단산업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유출도 빈번한 편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성향도 비교적 쉽게 변한다. 80년대 초까지 사민-공산 연대의 텃밭에서 공산, 국민 양당체제로 변모했다가 21세기 들어와 젊은 진보층이 유입되면서 사민-공산이 다시 약진하고 있다.

정치

산업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노동운동이 상당히 발달한 편이며, 공산당의 커다란 지지기반중 하나이다. 공산당의 지역 민주주의 공략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부 일대에도 공산당 지지세가 상당한 편이며 국민당이 북강성 일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지역 두곳중 하나이다. 다른 한곳은 북강성 동부 지역. 이곳도 광산 노동자나 어민 친화적인 공산당이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현 평흥시장인 사민당 소속 박한영도 공산당의 지지선언에 힘입어 17년 지선에서 56%라는 득표율로 당선될 수 있었다. 진보적인 젊은층의 인구 유입도 상당한 편이라 평흥에서는 사민-공산의 끈끈한 연대가 유지되고 있다. 2019년 제43대 대한국 국민원 총선거에서는 공산당이 사민과의 연대를 포기하고 독자노선을 천명했지만 평흥내의 정치에서만큼은 사민당과 연대가 유지되고 있다.
2021년 1월 2일, 박한영 시장이 사민당 지도부의 무능과 분열, 지역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며 탈당하였다. 이틀전 사민당은 북강성과 솔빈성의 산업 시설 확충을 위한 예산 삭감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끝끝내 반대했지만 예산안은 446표중 307표로 새해가 밝기전 통과되었다. 박 시장은 당분간 당적을 갖지 않고 북강성의 사민당, 공산당과 협력하며 시정을 운영할 것이라 밝혔다.
21년 지선에서도 사민공산연대가 압승을 거뒀다. 박한영 시장은 무려 67.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시의회도 사민공산연대가 48석중에 41석을 차지했다.

경제

북강성 동부의 광산에서 채굴된 여러 금광석을 가공하는 제련 사업이 발달해있다. 사할린성에서 생산된 석유와 가스를 정제하는 각종 정유소와 또한 상당수 위치해있다. 성공구에는 한국 북부 최대의 제철소인 평흥제철소가 있으며 각종 군수품을 생산하는 공장도 남아있다. 이름도 공업이(工) 융성하는(盛) 곳이라는 의미에서 지었다. 이러한 금속 및 석유 가공업은 2021년 현재에도 평흥의 주력산업중 하나이며 80년대부터 시도된 주력 산업 다각화 이후에도 경제적 비중이 가장 크다.

1961년 독립한 외흥안령부에 대한 든든한 물자조달을 위한 생산 기지 역할을 해오며 공업, 그중에서도 철강에 관련된 산업이 상당히 발달해있다. 하지만 철강 산업은 1980년대 이후로는 점차 쇠퇴하는 추세이며 비교적 낙후된 동구와 서록구, 수지구에 각각 첨단산업 단지를 개발하여 차세대 산업에서도 앞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2021년 6월 2일에는 갈산구에 수소 생산 산업단지 1단계 공사가 완료되어 수소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총 3단계 건설계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단계와 2단계는 천연가스 개질을 통해 수소를 생산하며 3단계는 암모니아를 이용하여 탄소 배출이 없는 청정 수소 생산 최신 공정을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박한영 평흥광역시장은 2032년 3단계 공사까지 모두 완료될 경우 연 120만톤의 수소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행정

15자치구, 13자치군으로 구성되어있다.

2022년 6월 박한영 시장이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을 예고했다. 도시 전체의 인구는 소폭 증가세지만 습지복원등 여러 친환경 정책을 통해 습지 매립을 통해 성장한 정택군, 연지군, 동천군등 도심 외곽의 지역들이 커다란 타격을 받았고, 1990년대부터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택군은 인구가 1980년 6천여명에서 2022년 기준 942명으로 감소했고 동천군은 354명으로 리 수준에 불과해 두곳 모두 2010년부터 시의회 임명직 군수가 파견되었다. 이에 시의회는 행정구역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판단, 해당 안건에 대해 시장에게 검토를 요청했고 박 시장이 구체적 개편안을 내놓게 되었다.
주요 골자는 만명 이하의 인구의 군을 인근 군구와 통합하여 가능한 만명 이상의 기초행정구역만 존치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택군, 연지군, 동천군은 폐지가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창야군, 유정군, 갈산군, 간성군, 계문군도 개편 대상에 포함되었다.

특징

도시 구조

면적상 매우 거대한 도시라 단일 도시처럼 기능한다기보단 여러개의 도심과 그 주위지역을 모두 묶어 ‘평흥광역시’라는 거대 행정구역으로 묶은 것에 가깝다. 보통 도심은 서구, 중구, 남구를 중심으로 하는 제1도심, 그리고 서안구안창군의 제2도심, 동북부 간성군에는 인구 12만명 가량을 책임지는 소규모 도심 3곳으로 정의된다. 다만 간성구 도심이 규모면에서 다른 두개에 비해 크게 밀리는데다 두 도심에 비해 멀리 떨어져있으며, 빈약한 산업기반으로 인해 재정자립이 어려운 탓에 억지로 평흥으로 묶였다.

대규모 치수•개발사업

평흥을 대표하는 역사적 특징중 하나는 바로 대규모 치수 및 개발사업이다. 흑룡강 유역은 해마다 강의 지류가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고 평흥은 남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우수리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도시라 홍수 위험 관리나 도시 확장에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이에 1920년대부터 평흥의 행정가들은 정부에 치수사업 개시를 요구하였으나 당시에는 인구가 적고 변방중에 변방인 이곳을 신경쓰는 중앙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평흥의 치수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로 북부 전선에 대한 물자생산 기지로서 그 필요성이 높아진 때다. 1954년 평흥시 인구는 43만명으로 49년보다 4배로 늘었고 1960년에는 60만명에 이를정도로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겪는다. 정부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에 힘입어 평흥시는 치수사업에 착수했다. 1950년부터 1980년까지 2180km2에 달하는 흑룡강 유역과 여러 지류들이 매립되었고 수심을 깊게 하기위해 강바닥을 파냈으며 25개의 보가 건설되었다. 정택군연지군의 습지들은 대규모로 매립되어 각종 공장과 정유시설, 제철소가 건설되었다. 1960년에는 서울과 심양에만 있던 도시철도까지 착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치수 및 개발사업을 통해 평흥은 지금까지도 대도시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은 커다란 문제가되었다. 흑룡강 유역이 조선반도등 남쪽에서 온 철새들의 도래지였다는 것은 70년대 후반까지 정부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조류학자와 환경학자들을 사찰하여 흑표까지 작성하는등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1983년 김대중 총리와 유상민 평흥시장이 흑표에 이름이 올랐던 학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평흥의 환경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겠다고 밝히며 전환점을 맞았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철새도래지 복원 사업과 여러 환경정책등이 실시되어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스포츠

경제력도 상당하고 인구도 많은 도시이니 만큼 스포츠가 활성화되어있다.

평흥 FC

평흥광역시의 시민 축구단. 1956년에 창단되었으며 90년대까지 K리그1의 대표적인 강호중 하나였으나 00년대 들어 한동안 부침을 겪은뒤 10년대 중반부터 다시 부활하고 있다.

평흥 화영철강

평흥 FC와 지역 라이벌리를 형성하는 축구단. 1969년에 창단되었다. 기업구단에다 늦게 창단되어 시민구단인 평흥 FC보다 정통성면에서는 밀리지만 화영철강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창단된 후 항상 만만찮은 전력을 유지중인 강팀이다. 유입유출이 잦아 인구 구성이 자주 바뀌는 평흥 도심에서는 주로 화영철강을, 평흥에서 오래산 시민들은 평흥 FC를 응원하는 편이다.

평흥 화영 타이거즈

평흥의 유일한 야구단. 이 구단도 화영철강이 소유중이다.

여담

  • 2006년까지만 해도 20층 이상의 고층빌딩이 하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도시규모에 비해 스카이라인이 밋밋했으나 2007년 중구에 화영철강 신사옥이 건설되고 이어 2009년에는 평흥정부종합청사가 완공되어 여러 빌딩들이 속속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2021년 현재는 스카이라인이 굉장히 달라진 모습이다.
  • 구도심 지역은 전국에서 60년대 한국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다만 2010년대 들어와 옛 건물들이 헐리고 그자리에 신축 건물이 많이 들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1. 지역구 1석, 비례 3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