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 (아침해의 원유관)

커피와 사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29일 (목) 03:57 판 (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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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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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 2대 황제
융희제 이훈| 高祖 光武帝 李塤
출생 1874년 3월 5일
조선 한성부 경운궁 석어당
즉위 1899년 12월 5일 (25세)
대한제국 한성부 경운궁 환구단
사망 1929년 12월 13일 (55세)
대한제국 한성부 구로구 어용저
능묘 유릉(裕陵)
재위 제 27대 조선국 국왕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12월 13일
초대 대한제국 황태자
1894년 5월 3일 ~ 1899년 12월 5일
대한제국 제 2대 대황제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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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27대 국왕이자,대한제국의 2대 황제.

고조가 59세때 본 늦둥이 동생이인 공친왕 이원을 제외하면 장남에 유일한 아들이었던지라 안정적으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아버지인 고조의 뒤를 이어 제 2대 황제로 즉위했다. 막후공작, 권모술수에 능했던 선황에 비하면 너그러운 면모가 강했으며, 그의 치세에 대한제국은 호황과 불황을 동시에 맞았다.

젊은 나이에 즉위한데다가, 아버지에 비하면 권모술수에 능한 공신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던지라 이 시기 자연스레 왕권에 약화가 생기기도 하였고, 이는 이후 공신들의 정치독점에 반발하여 일어난 융희년 민권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는 배경에 기여하기도 했다.

생애

유년기

1874년 3월 5일, 고조와 순경효황후 조씨의 적자로서 태어났다. 이후 유아기 시절은 조선의 방식대로 교육을 받았으나, 12살이 되던 해 부터는 초빙된 서양 교사들 또한 교육에 참여했고, 이후 수학원에서의 학습을 완료했다.

당시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 출신 교사들이었는데, 이 여파로 아버지인 고조보다는 진보적인 면이 강한 군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청년기

수학원을 졸업한 이후 공식적으로 황태자에 책봉됬고, 1890년대부터는 쇠약해진 고조 대신 대리청정을 통해 국정에 일부 개입했으나, 공신들에 비하면 권력을 다루는 능력이 미숙하여 아버지에 비견될 수준의 재능은 보이지 못했다. 이때부터 종종 주변인물들에게 정치의 고단함에 대해 털어놓았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치 100단인 아버지의 동료진들 사이에서 고독한 심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지, 여동생들과 막둥이인 그의 동생 공친왕을 많이 귀여워했고, 자주 놀아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3년에는 그의 식사에 만주족 애국자가 독을 탄 커피를 섞어서 올렸으나 몰래 훔쳐서 마시던 시종이 즉사하는 바람에 음모가 발각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오히려 황실 측에서 만주에 대한 압박용으로 그를 1895년 심양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이후 1899년, 고조가 병사하자 공식적으로 즉위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그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을 파견했다.

즉위 이후

30년 동안 이어진 긴 치세동안 여러 일이 발생한것으로 유명하며, 의화단 전쟁 - 한러일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금관작전과 시베리아 출병 - 한일동맹 체결 - 미리견 위기 등 국내외를 포함하여 굵직한 사건사고가 있었다. 만주사에서는 만주한치시기 무단통치 - 3.1 운동 - 이동휘 총독의 문화통치를 겪었던 기간이며, 일본사에서는 역시나 중요하게 취급되는 메이지 시대 말기와 다이쇼 시대가 겹치는 기간이다.

광무제에 비하면 황제로서의 권위는 약했으나, 공신들과 의회의 결정에 충분히 반대할 수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안건에 동의하였다. 오늘날까지 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는 증거라고도 하고, 공신들과 정치인들에게 눌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였던 것의 증거라 주장하는 등 많은 논의가 오고가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확실한 결론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확실하게 그의 왕권이 약해진것은 1913년 박영효 내각의 비리가 밝혀지면서부터로, 이때 내각총사퇴를 기점으로 민주주의 열풍이 불어오자 신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질적인 입헌군주제 정착에 나섰다. 이 개정으로 바뀐 최종안은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업무의 범위를 줄이고, 중추원이 지명하지 않은 국회의원도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개정안이었고, 이 제도와 연전연승을 통한 경제적 대호황으로, 융희 낭만이라는 말이 생길정도로 그의 치세 중말기는 밝은 편이었다.

다만, 종종 공신들에게 조언과 자신의 의견을 말하곤 했다고 한다. 예시로 의화단 전쟁 당시엔 영토는 영유권을 확고히 하는 정도와 거액의 배상금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엔 협상국 참정론을 지지하면서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이 열강으로 진입할 길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중년기

노년기

노년에 들어서는 병세가 악화되어 누워있어야 했으며, 오히려 이때 전면에서 활동하던 때와 달리 많이 편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정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하필 이 과정에서 감기에 걸린 총리대신이 올린 문서로 옮는 바람에 병세가 확연히 악화되었다.

결국 1929년, 가족들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기의 악화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사후 묘호는 순종(順宗)으로 결정되었으며, 능묘는 유릉으로 결정되어 그곳에 묻혔다.

가족관계

평가

어록

여담

불교에 대해 흥미가 있었다고 하며, 융희실록에 따르면 실제로 연구도 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에 관심이 적어서인지는 몰라도, 비교적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예시로 전국순방 당시 서경 평양부의 유명 음식점을 잠시 방문해 직접 음식을 시식하기도 했으며, 주한일본공사로 새로 임명된 하라 다카시를 손수 환영하기도 하는 등의 행동이 있다.

영덕이라고 이름붙인 개 한마리를 키웠는데, 한러일 전쟁 승전 이후 영국 왕실에서 왕실 웰시코기의 새끼들 중 한마리를 선물한 것이 이 강아지다. 집무 시간이 아닐 때 순종이 직접 놀아주기도 하는 등 그의 사랑을 받았다고.

대중매체에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