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화 이전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14]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대대적인 순나라와의 밀무역과 새로운 교역국들과의 거래로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당시 왕이었던 고조는 안동김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서학을 통해 익힌 세계에 대한 식견[15], 흥선군과 풍양조씨 등과의 동맹을 통해 인형사마냥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가고 있는 상황이었고[16], 고의적으로 안동김씨가 개항을 망설일 때 은근한 동의의 시선을 보내 개항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무력에 제대로 된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향로가 지부상소를 하며, 개항 이후 궁에 틀어박힌 고조의 출궁과 세도정치 타파, 민생 구제를 위한 조선의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호소 올렸다가, 심기가 불편해진 안동김씨 자제 중 하나가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진압하던 도중 뇌진탕으로 죽게 만들어버린'궁내사대부박해'가 일어나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유교적 사대부들의 등까지 돌린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현은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신미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개화와 건원
실권을 잡은 근왕 세력과 고조는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조사하는 기간을 가졌고, 이때 순나라와 후송이 각각 버마전쟁과 아편전쟁으로 몰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정치적 숙청이 끝난 조선에 때마침 다시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일본의 내부상황을 알리면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개혁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해 조선은 서방에는 보빙사를 파견했고, 일본, 중국 2개국에는 통신사를 개편한 수신사와 영선사를 파견하여 동아시아적 개혁에 어울리는 방향성의 모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 서양, 일본 등을 방문한 유교적 인사들은 안동김씨가 자신들의 사비로 들여오던 문물 일부와 제물포의 네덜란드발 문물들만 보다가, 완전히 드러난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고, 여기에 중국으로 방문한 이들이 수도까지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기존 천하관이 마치 징을 울리듯이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파견된 완흥군이 흥선군에게 보고를 올리면서, 그를 많이 믿고 있던 흥선군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단순히 군사력 뿐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느끼게 됬고, 이를 통해 개혁인사, 보수인사 모두 개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 조건의 최소, 지배층의 구화주의 여론 대폭 형성과 기존 유교적 세계관의 변화가 충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은 두가지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첫째는 여진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을 보내던 남만주 일대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편입하여 새로운 3개의 도로 삼았으며, 두번째는 홍삼과 인삼무역을 통한 상당한 무역 수익이었는데, 당시 태평천국의 난에서 비롯된 순송전쟁 직후 양 국가 모두가 힘이 빠졌고, 그 과정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아편이 퍼지고 있던지라 중화 양국은 해결법이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홍삼이 아편 구제에 많은 효능을 보인다는 게 드러났고, 이를 안 조선이 홍삼을 대규모로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거둘 수 있었던 것. 특히 몇세기 전부터 요동과 황해 일대를 오가며 서서히 성장한 순상(順商)들이 돈을 쓸어담으면서 조선의 거둔 무역수익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설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고,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관복개편'으로 관복을 서구화하는것을 적극 장려하고[17], 원격제도를 시행하여 국유화한 서원을 통해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단 또한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명개화를 서로 지켜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묘한 동지의식이 꽃피면서, 외교관계가 상당히 돈독하게 발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존재로 육군 주력의 조슈 번의 대륙확장 계획을 무모한 일로 치부하며 폭주를 막을 수 있으니[18] 좋았고, 한국은 해양세력 동맹이라는 특징 덕에 자국의 새로운 3도 내에서 나는 철광석들 중 남은 것들을 쌀과 함께 팔 수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금나라와 순나라에 같이 대항해 줄 수 있는 국가의 존재를 좋게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동맹으로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흥아회가 대대적으로 아시아 대중에게 한일동맹을 홍보하면서 대중에도 동맹 여론이 서서히 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개혁을 계속하면서 힘을 더 키운 한국은 기세를 몰아 1885년 금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뒤 거절당하자 북진하여 남만주 영토를 더 접수했고, 90년대에 들어 순나라와의 관계가 개혁문제로 험악해지자[19], 서서히 일본과 손을 잡고 각각 북방과 남방에서 중국,만주를 공략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전쟁 준비 이전, 한국은 송나라와 비밀리에 송의 중립과 승전 시의 이득을 보장하는 밀약을 체결할 것을 권유하였고, 송나라가 이에 응하여 한국과 일본은 중국 내에서 또다른 적군을 맞닥트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만반의 준비를 치르고 시작된 개전이었으나 동남부 해안을 집어삼킨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순나라의 지방통제력은 처참하기 그지없었고, 끝내는 기존 목표였던 대만을 넘어 남양함대를 격파한 일본이 복건성에 군대를 상륙시키는 초과달성적인 전과를 내는, 순나라 기준에서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렇게 1893년 벌어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에서 한일동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한국은 더 나아가 심양궁으로 진격해 실권자인 예허나라 힝전 귀비를 궁에 유폐시켰다. 전후 체결된 조약에서 순나라는 후금의 독립 보장을 위해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중단할 것을 필수 조건으로서 촉구받았고, 일본에게 대만을 할양하고 푸젠성을 조차한 뒤 한국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금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이후, 2년 전부터 서서히 준비되고 있던 환구단의 건설이 완성되고 칭제 요구가 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빗발치자, 고조 이현은 환구단에 올라서 칭제를 한 뒤, 대한국 대군주, 혹은 부황으로서 사용하던 독단적 연호인 광무를 다시 제국의 연호로서 개원하여[20], 제국의 시대를 시작했다.
칭제 이후, 안동김씨 척결 직후 공신들의 공을 치하하며 지정되었던 별도의 직위에 대한 재개편이 신분제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존의 공신,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자들과 이름있는 반가들을 사족(士族)[21]이라는 하나의 귀족 집단으로 뭉쳤으며, 이후 그 중 손에 꼽을 만한 명문가 당주들과 직접 개혁을 실시한 공신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오등훈족(五等勳族)으로 다시 분류하여, 그 공과 명성에 따라 오등작으로 분류하였다[22]. 이후 몇년 전부터 설치가 논의되던 왕족 교육 기관인 수학원의 계획도 끝이 났으나, 노년의 나이에 업무를 과다하게 처리한데다가 측근이었던 대원군의 죽음이 탈이었는지, 광무제 고조가 결국 1899년 황태자 이훈을 정식 후계자로 선포하고 붕어했다.
영광과 전성기
1899년, 융희시대의 시작 이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한국인이 피해를 입자[23] 분노한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 열강들과 손을 잡고 순나라로 진군하기로 결정, 북경에 입성하여 10개국 연합군으로서 그 이름을 알렸고, 이에 1901년 맺은 천진조약에서 옌타이를 조차하고 대량의 배상금과 유교 문화재들을 받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은 한영일 동맹 체결과 더불어 점점 고조되고 있었고, 결국 한국의 대금민국 러시아 공사관 포위와 일본 연합함대의 사할린 공격을 시작으로 한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과는 정 반대로 한일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는 러시아 극동군의 무능과, 비정상적으로 육,해군에 투자한 한국군과 일본군의 특징, 그리고 유능하게 대처했던 한일 정부의 선택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끝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조약은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더이상 친러 외교로 생존이 불가능해진 대청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해삼위를 일본제국과 함께 공동통치하는 자치령으로 삼았다.
이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본토에서의 진격으로 사실상 붕 떠버린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철강과 군수품 등을 수출하여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내,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독점자본주의 국가로 거듭날 수준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중국 북부 지방의 시장에 한국산 물품을 대량 뿌려 시장 장악을 통한 이익을 톡톡히 보기도 했는데, 이렇게 호황이 계속되던 도중 외교적으로 엄청난 이들을 얻은 사건이 발생했다.
1917년대, 러시아 혁명이 백군의 열세로 흘러가자 제국 내부에서 백군을 지원하여 반공정신을 강하게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그 정책의 일환으로 비밀작전인 금관작전을 실행하여, 러시아 귀족 몇몇과 로마노프 황가의 황손들을 구출하여 해삼위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한 양국이 막대한 물자를 쏟아부어도 백군이 서부전선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한국과 일본은 고민 끝에 기존 백군 잔당들과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을 긁어모아 기존 연해주 자치령을 개편, 괴뢰정부인 극동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편입 이후 한국의 칭다오 문제, 일본의 장시성 문제와 겹쳐 영국과의 동맹이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미국의 압박 하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로 영국과 일본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공식적으로 한영일 동맹은 영국이 빠져나가며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1920년대 한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한성은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가장 발전한 도시로 거듭났고 거리 여기저기에서 벼락부자가 됬다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으며, 정계에서는 정당출신 총리들이 연일 임명되고 민주주의와 민권운동 열풍이 불었고 서양에서 들어온 최신 문화들과 발전한 대한의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한성 거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시기를 흔히들 융희 로망이라고 부르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 중 하나로 불린다.
사람들은 이 몽환의 단장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었고, 국민들의 해외여행도 증가하는 등 실제로 그런 듯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가 서서히 종막을 고하던 해, 그 단장이 마침내 아래로 내려갔다.
불황과 환란
몽환이 종막을 고할 조짐을 드러낸 것은 1923년, 황궁의 춘생문 앞에서 당시 예친왕인 이천 이 만주족 독립운동가에게 폭탄을 맞은 후, 그 후유증으로 끝내 4일 뒤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면서 시작되었다. 젊은 친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신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확산되던 중 1923년 당시 청년 총리였던 박중양이 테러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급한대로 원로였던 김옥균의 지시에 따라 당시 정치적 거물로 부상했던 이동휘의 비교적 현실적인 노선을 주목, 사회를 통제하고 동시에 서서히 고삐가 풀려가는 군을 통제할 목적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최초의 무신총리 내각이 집권한 가운데에 개화당은 정책적인 면에선 경제적인 회복과 민심의 조절, 그리고 공산주의 확산의 단절을 위하여 기존과 다른 친서민적인 경제정책 및 법안을 발효하려고 했으나, 사족들 및 기업가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했고, 결국 1925년 을축 대홍수로 발생한 한성부의 피해는 군부의 통제 방향성을 두고 반목하던 이동휘와 개화당의 고균계 인사들을 영영 떨어지게 만드는 게 일조했다. 이제는 개화당의 힘이 예전만치 못하게 되었다는 증거였고, 한편으론 극단주의에 고삐를 맬 방도가 사실상 증발했다는 뜻이였다.
1929년 미국에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을축 대홍수 이래 서서히 불안한 균형을 띄우던 보이던 대한제국의 경제는 결국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 제국은행 앞에서 서로를 밀치면서 먼저 돈을 확보하려다가 압사당한 사람도 속출했으며, 한강과 대동강의 파출소에서는 잇따른 투신자살 소식이 이어져서 들려왔다. 만주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극에 달했으며, 한성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던 좌익 인사들은 광화문 광장 앞에서 파업운동을 벌일정도로 기세가 성장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의 발흥과 경제의 불황으로 인한 민생의 악화는 이내 극단주의를 태동시켰다. 특히 의회제에 대한 불신여론을 기반으로 한 "초헌정치"를 주창하는 세력과 근황의 기치로 국정에서 군상대권을 드높여 난국을 타파하자는 여론이 고루 인기를 얻은 한편, 반공, 군비 확장을 통한 경제 부흥과 대한의 영광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사실상 이러한 사상이 자라는 자양분으로 거듭났다. 급기야 군부 출신 인사들과 이러한 총력전 체제에 대한 호감을 가진 정치인들이 각각 충정회와 일심회라는 정당을 형성하는 수준에 이르게 한 데 이어, 1930년 양 당은 새 연호의 개원을 기념하며 합병식을 거행해 충정일심회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 무렵, 본래 충정회에 몸을 담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충정일심회의 집권
백의단의 지도자는 김창암이었는데, 단호한 결단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행동력 등으로 인해 백의단의 지도자까지 맡은 인물이었다. 김창암은 백의단의 전권을 손에 쥔 뒤 한국을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 개조할 계획을 짜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서 유교 근본주의, 파시즘과 민족주의등을 고로 내세우며 전 계층의 지지도를 확보한 뒤,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백의단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던지라,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들 중 자신의 뜻에 동참할 것이고, 쿠데타에 협조할 인물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인물은 바로 대한제국군 군 내 파시즘 모임임 북진회의 수장 어담 장군이었다. 원래부터 백의단 내의 인사들과 고루 알고 지내던 장교이기도 했고, 현 시점에서 군에 대한 통제권 또한 발휘할 수 있는 이였기에, 김창암은 1930년 새해에 이범석과 밀담을 나누어, 한성을 시작으로 하는 진군을 통한 정권 장악을 모의하였고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라고 생각한 어담은 당시 후배였던 이범석의 설득에 넘어가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쿠데타는 12월 3일 전날인 1933년 12월 2일 저녁 10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간동안 어담을 위시한 북진회가 자신들이 소집한 인력들로 의회와 중추원 건물을 포위하였고, 이어서 군 일부는 백의단 인원들과 함께 한성 거리로 진입, 경복궁을 향해 진군하는 한성 진군을 개시하였다. 마침내 경복궁 앞에 도착하자 시위대와의 대치가 시작되었으며, 백의단 인원들은 황제에게 자신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단체로 지부상소를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이 자결을 권고한 12월 3일 아침 8시가 되기 20분 전, 끝내 성덕제는 김창암을 구국자로서 임명한다는 조서를 반포하여 상황을 종결시켰고, 이내 국내에서 치안위협이 발생할 수준이라면 절대로 정국이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라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수단을 통해 결국 목적을 달성한 백의단은 우선 해산했고, 비상계엄령이 해산된 이듬해 초경부터 홍보 활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황제의 지지를 받아 임시서리를 맡게 된 조성환을 통해 정치권을 견제하게 된 군부 또한 급격히 과격화되어 예산을 더 늘릴 것을 요구했으며,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이 출세를 위해 여기에 가세하면서 점점 김창암의 정치적인 기반은 커져만 갔다.
시간이 흘러 임시서리체제에도 한계가 옴에 따라 제 25대 내각총리대신의 임명기간이 다가왔고,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상황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개화당은 일전에 집권한 입헌대한당의 풀지 못한 숙제였던 경제 회복에 실패하고 원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은 바닥에 기는 상태였으며, 대공황의 피해를 막지도 못하고 그닥 유능한 총리가 나오지도 않았던 입헌대한당은 말할 것도 없이 저조한 지지율을 받았다. 애초에 보수 성향의 당 내 소수파로 전략한 황국협회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국가가 지정한 불법정당이 조선공산당은 논외 대상이 아니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근황 정신, 공산주의 탄압, 팽창과 개혁을 내세워 보수파, 향촌과 도시를 아울러 높은 지지도를 자랑하던 일심회가 집권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여기에 황실의 중심인 황제도 일심회에게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광무제 이후 권위는 올라갔으나 실권은 서서히 줄어들던 황제의 입지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새 황제, 성덕제 이영은 반공 성향도 일치하며 근황을 부르짖는 일심회에게 묘한 신뢰감을 느꼈으며, 이를 표출하기 위한 의사수단이 바로 김창암의 쿠데타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 이후 충분히 중추원 의원들을 규합시켜 정계에 입문한 김창암을 견제할 수 있었음에도 성덕제는 그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쿠데타 직후엔 내각에 불신임을 표해 해산하는 행보를 보여준 전적이 있었다.
그렇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방면에서의 유리한 입지와 신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가뜩이나 연전연승으로 인해 입지가 한껏 올라간 군부 내 다수파벌과의 연줄을 무기로 들고 나온 백의단, 이제는 충정일심회의 김창암이 의정원과 중추원에서의 표를 얻어내며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임명되었다.
군국주의와 폭주
집권 정당으로 거듭난 일심회는 기다렸다는듯이 본격적으로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을축 대홍수로 인해 침수된 건물이 즐비하던 한성 재건사업, 혹은 신설될 거대 시설 건축업등을 장려해 대규모의 인력을 요구하는 사업을 벌렸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난 국민들의 경제상황이 한 풀 나아지는 효과를 냈다. 동시에 1910년대까지도 한국의 역량 부족으로 한계가 어느정도 있었던 만주에 대한 수탈을 북만주 일대까지 더욱 가속화하여 한국인들의 재산을 불렸다.
그 외에도, 지지율 확보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됐다. 가령 사회문제로 부상하던 범죄자들과 소위 '조폭'으로 알려진 폭력배들을 대거 색출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처벌했고, 동시에 의회정치에 대한 불신은 권력을 김창암과 일심회에게 집중시켜 어느정도 해결했다.
그렇다고 일심회가 좌익 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였던지라, 원래 이들의 기반이 그랬듯 국가정책적으로 지방과 수도의 공산주의 활동을 황명을 내세워 탄압했고, 자신들의 기반 중 하나인 황제의 신뢰를 해치치 않기 위해 사족들 및 기득권을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재벌 대기업들에는 지원등을 통해 정부에게 협력한다면 막대한 이득을 주겠다고 꼬드겨 자연스레 합류하도록 유도했고, 사족들의 제산 제도도 거의 손 대지 않았던지라 결과적으로 중추원의 권위 자체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이는 기득권을 포섭해 일종의 일심회, 군부와의 연립을 수립시켜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김창암의 술수였다.
다만 일심회의 기준에서 거추장스럽다고 여겨진 제도 몇 가지가 변화했는데, 예를 들면 일반사족들의 처우 변화였다. 이들은 지방에서 약간의 경제적 혜택을 받는 등의 특권이 소소하게나마 있었으나, 김창암의 거국내각은 이를 "국고를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고 여긴지라 황제에게 결단을 요청했다. 황제는 이를 승인했고, 그 결과 오등훈족을 제외한 사족들은 문자 그대로 족보상의 차이만 있을 뿐인, 사실상의 평민으로 완벽하게 몰락했다. 이렇게 파격적인 경제정책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한국은 기존에 연달아 집권한 무능한 내각들이 수습하지 못한 세계대공황의 타격과 융희 버블이 터진 이후의 침체기를 회복한 듯 보였으며, 직후 군비에 투자되어 외부 확장을 위한 발판 자금으로서 서서히 준비되었다.
한편 1934년 결국 국력의 한계치로 인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대몽골공세에서 항복하자, 한국은 점령지의 핵심인 동몽골 일대는 별도의 도독부로 통치하기 시작한 뒤, 자신들이 확보한 몽골 영토에는 괴뢰국인 예케 몽골 울루스를 설립하여 관리했다. 이후 몽골에서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로 진출하며 몽골의 경제는 파탄났지만 역으로 한국의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보였으며, 지지부진했던 몽골 출병을 일격에 마무리한 충정일심회는 본격적인 대외확장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먼저, 충정일심회 집권 이후부터 '반공'과 '왕도정치'를 주 이념 중 하나로 내세운 한국은 1936년 일본제국에 이어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같은 파시스트 국가들과 함께 방공 협정을 체결했다. 이 당시 기준 한국의 일명 '반공충정'을 위한 군비 예산은 전에 비해 상당량 증가한 상황이었고, 일심회 외 타 정당의 활동은 놀라울 정도로 수축된 형국이었다.
동시기에 비대해진 한국군의 군사력은 주로 위해, 청도, 괴뢰국인 러시아 차르국과 예케 몽골 울루스 등으로 분산되어 해당 지역에서의 치안방위업무에 투입됐다. 그렇게 불안감이 고조되던 중 이듬해인 1937년 6월, 증강된 군비로 인해 당시 한국군이 주둔중이던 노구교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로 인해 대한제국군과 중화민국군간의 마찰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수류탄 중 하나가 실수로 폭팔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제는 이 일로 인해 한국군 측에서 사망자가 나왔었다는 것이였으며, 보고를 받은 군 수뇌부가 비대해진 군사력을 소비할 대상으로서 중국을 선정한 뒤 중화민국군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렇게 한국과 중국간의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되서 대명제국과 중화민국의 국경선 사이의 일본 관리 하 탄광에서 일어난 분쟁을 구실로 일본제국 또한 중화민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최종적으로 20세기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남쪽의 해안가가 사실상의 동맹국인 일본의 함대에 유린당하는 동안, 한국은 위해, 청도 및 몽골을 이용한 화북포위전략을 급히 수립했다. 그러나 급히 수립한 전략이었음에도 이미 충분했던 지리적 이점과 중화민국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장비수준이 겹치면서 북부 화북 지방과 동부 산둥반도 확보에 성공했고, 곧이어 북경을 함락시켜서 중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목적을 세우게 됐다.
그러나 내몽고군벌의 거두인 장쭤린과의 전투가 내몽고 군벌 측의 예상 외의 역진으로 인해 더뎌졌고, 동시에 내몽고군벌이 보낸 지원군이 화북의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면서 기초 목표였던 1개월 내의 북경 함락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렇게 했음에도 장쭤린이 번 시간은 기껏해야 1개월 남짓이었고, 이미 동남부 해안에서 일본군의 군세까지 막고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재빨리 북경을 버리고 동남 지역으로 도주했다. 결국 그 해 9월, 북경이 함락되었고 대한제국군이 입성했다.
이 때 몽골에서 악착같이 싸워대던 내몽고군벌과 국민당군으로 인해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증가한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대한제국 원수부가 점령지 내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지령을 보내는 일이 벌어졌다. 가뜩이나 화북 지방에서 조선시대부터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순나라에 대한 인식이 얼추 남아있던 한국군은 이내 이성을 잃어버렸고, 결국 국민정부를 따라가지 못해 북경에 남아있던 시민들을 학살하고,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등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의 아시아 전선에서 난징 대학살과 더불어 손에 꼽히는 사건인 북경 대학살이다.
이후 화북에 서서히 전선이 모이려던 찰나 일본군이 상하이와 동남부 해안가를 접수하면서 다시 시선이 해당 방향으로 집중됐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대한제국군은 프리모예에 있던 일본제국군 지부와 통신하여 난징을 치기로 합의했고, 이 기회에 동남부를 넘어 북상한 뒤 대륙으로의 진출로를 2개나 확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일본군이 수락하면서 두 제국의 난징포위작전이 시작됐다.
이내 난징은 한국군과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어 각각 동서로 분단됐고, 여기서 청더의 독가스 사용, 북경대학살 이후부터 계속해오던 학살에 익숙해진 한국군과 아사카 아스히코의 명령으로 인해 고삐가 풀려버린 일본군은 문자 그대로 난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난징 대학살). 이 사건의 여파가 워낙 컸던지라, 한동안 난징 일대의 성장세가 아예 마비되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국제사회의 비방을 불러온 것을 둘째 치고,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을 고려하던 중국 군벌들이 아예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혐오하는 결과를 가져와버렸다. 이에 중국 내 세력들이 전부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시작하자 일본은 점령지 중 상당수를 괴뢰국인 대명제국의 영토로서 합병시키는것으로 응수했고, 한국 또한 남경을 수도로 한 뒤 당시 장제스와의 권력다툼 끝에 한성부로 망명한 상태였던 왕징웨이를 데려와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 1937년 10월경 중국의 전통적 수도인 베이징과 난징을 모두 접수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은 난징정부와 대명제국을 통해 중국 이권을 분할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했고, 당시 추축국이었던 독일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북경과 난징에서의 참사를 겪은 국민당이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독일의 중재가 한국의 김창암과 일본의 고노에가 제시한 무리한 요구사항을 받지 못하면서 이미 시작부터 협상이 파토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협상을 거론한 지 채 1주일이 안되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파토난 중화민국과의 협상을 뒤로하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 협의하여 선택한 것은, 남부와 북부로 중국을 갈라 각자의 이권을 보장하는 거대한 양대 괴뢰정부의 수립이었다.
따라서, 양국은 중국 양분을 위한 다음 단계인 내륙으로의 침투를 시작했다. 일본은 창자,광저우, 선전, 포산 등의 동남부 지역들을 점령해가며 서서히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정주,무한과 개봉은 무자비한 공세 끝에 한국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일대에서 벌어진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로 인해 중국이 본 피해는 막대했지만, 역으로 장제스와 장쭤린의 지도 아래에 악착같이 서쪽의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버티는 전술을 가능하게 한 끈끈한 단합력을 만들었다. 그렇게 중국의 처절한 저항으로 인해 중국을 문자 그대로 집어삼킬 기세였던 일본과 한국의 공세가 점점 더뎌졌고, 이내 기존 점령지 자체도 비대해지면서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중국전선이 문자 그대로 최후의 1인까지 끌어모으는 중국을 상대로 한 끝없는 소모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쯤 되자, 굳건했던 김창암의 입지가 중추원 의원들과 타 의원들의 압박으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황제가 그에게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으니 이론상 반공의 성업을 달성할 때 까지 호국령인 그가 해임될 일은 없었지만, 중국에서의 전공 부진이 이 시기 제국군의 이범석과 3번째 거대세력으로 거듭난 백의사의 염동진을 위협하고, 나아가선 자신의 권위에 해가 될 것임을 김창암은 내심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가 이 맘때쯤부터 주장한 방공국경의 최종 달성을 위한 '신천지 계획'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한 군사적 증강이 러시아 정부와의 밀실논의와 함께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베리아 침공
이러던 와중, 1940년에 기어이 경고만 보내던 미국이 일본에 이어 한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끊겠다는 통보를 보냈다. 당시 오늘날 만주의 대경유전을 확보하지 못해 상당량의 석유를 미국과의 교역에서 싸게 수입하던 한국은 그 많은 군비를 운영할 자원부족에 시달리게 됐으나, 실질적으로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이 볼품없던 한국이 미국을 대상으로 할 수 있던 선택지는 딱히 없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기름을 모을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 결론은 신천지 계획의 실행을 통한 시베리아의 자원지대 확보였다. 이미 육상병력은 총력을 다해 유사시를 위해서 증강시켰던지라 지금 당장 소련에 쳐들어가도 대숙청으로 군대의 질이 볼품없어진 소련, 그것도 서방의 본토와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시베리아는 완전한 재패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론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이범석을 위시론 한 북진회의 개전론이 힘을 얻었다. 결국 그해 3월 대한제군은 할힌골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소련군의 극동 방면 정예 육군을 분쇄,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과 함께 북진하여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소련이 한국에게도 선전포고 하면서 동시베리아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41년동안 시베리아 전선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아직 봄날일 때 입성한데다가 미약한 극동군의 군대만이 방비하고, 게다가 본토의 역량은 독일과의 전쟁, 그리고 캄차카에서 일본과 맺은 불가침 조약으로 인해 소련이 동방에 집중하는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부라티야와 아후츠크 남부는 순식간에 점령당했고, 여기에 극동 방면에서 미국이 혹시나 접근할 일을 차단하기 위해 알래스카 인근으로 이륙한 한국 공군이 폭격을 가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여기에 동맹인 나치 독일이 거둔 연전연승 덕분에 소련이 다시 반격해올 걱정도 상대적으로 적었따.
42년까지 한국은 수많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바이칼 호 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당초 확장목표였던 신천지 계획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42년의 겨울동안 발생한 병력손실과 추위, 그리고 독일의 전세 약화로 인해 극동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된 소련으로 인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1년 미국 알래스카에 기적적으로 폭격을 성공한 이후부터는 미군도 간간히 동시베리아로 건너와서 한국과 대립하는 지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제력으로 확보한 자본과 만주의 철강과 기름을 모두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쟁에 끌어다 쓰면서 경제는 악화일로를 겪었다.
이러는 도중, 중국전선과 북방전선이라는 양면전선을 두게 된 충정일심회 내에서도 전쟁을 언제 끝내느냐와 권력지분을 두고 북진회와 일심회의 대립이 심화된 것을 기점으로 분열이 시작된데다, 이들의 독선적인 행보에 불만을 품은 의화군 이강, 양연군 이연 등의 거물급 종친계 일부가 민주파와 비밀리에 연대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3년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으로 대한제국군이 시베리아 전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