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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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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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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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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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우산국 건주위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한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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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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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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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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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명화
시대

만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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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산융
동호
고조선 예맥 숙신
산융
동호

요동군
고리국
흉노 부여
전한
요동군 · 현도군
~4세기초 고구려 부여 읍루
(부여)
오환
선비
후한
요동군 · 현도군
동연
서진 읍루
4~6세기 전연
전진
후연 물길
북연
북위 거란 실위 고구려 두막루 말갈
(고구려)
동위
북제
북주
7~9세기
말갈
발해 말갈
(발해)
10~12세기 동란국 발해부흥운동 여진
오국부
 
 
13세기 동요
후요
동하
몽골 제국

요양행성 · 동방 3왕가 · 심왕
14~16세기 북원 여진족
고려 요동 군벌 우량카이 삼위
여진족
17~18세기 후금
조선
요동도독부
삼위시대
후금 네르친스크 조약
19세기 대한제국 대청제국 러시아 제국
20세기  
식민지 만주
대한제국
대금민국 임시정부 연해주 공동통치령
대한제국·대일본제국
트란스아무르 공화국
전러시아 극동정부
연합국 점령하 대한 소비에트 민정청 러시아 차르국 소련
대한국 | 북간 7도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 대금민국

틀:몽골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틀:중국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틀:러시아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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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대남)
(선말한초)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대금

대청
대청제국
(괄호는 외왕내제 왕조)

대한제국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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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통치기관
만주 만주(满洲) 만주총독부
동몽골 몽고번(夢姑邦) 몽고도독부
프리모리예 숙신도호부(肃慎都護府) 숙신도호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
웨이하이 위해 -
* 숙신도호부는 1923년 나선통감부로 업무 이전
* 몽고번은 1942년 몽고목(蒙古牧)으로 편입
괴뢰국 · 군정청

틀:식민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틀: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아침해의 원유관)


틀: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아침해의 원유관)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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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지도자
유럽 나치 독일 |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에리히 레더 · 빌헬름 카이텔 · 하인리히 힘러

이탈리아 왕국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베니토 무솔리니 · 피에트로 바돌리오
살로 공화국 | 베니토 무솔리니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 살러시 페렌츠
루마니아 왕국 | 미하이 1세 · 이온 안토네스쿠
불가리아 왕국 | 보리스 3세 · 시메온 2세
슬로바키아 제 1 공화국 | 요제프 티소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 에밀 하하
크로아티아 독립국 | 안테 파벨리치 · 토미슬라브 2세
노르웨이 크비슬링 정권 | 비드쿤 크비슬링
비시 프랑스 | 필리프 페탱
모나코 공국 | 루이 2세
세르비아 구국정부 | 밀란 네디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 이반 미하일로프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 안드레이 블라소프
로고트 자치국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벨라루스 중앙 라다 | 라다슬로 아스트로스키


핀란드|그리스국 |알바니아 왕국 |핀도스 공국|류블랴나 주|덴마크 보호령
아시아 일본 제국 | 쇼와 덴노 · 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 도조 히데키 · 우가키 마토메 · 스즈키 간타로

대한제국 | 고종 성황제 · 김창암 · 송병조 · 이동녕
러시아 차르국 | 타티야나 1세 · 그레고리 세묘노프
대명제국 | 함화제 주자홍 · 인루겅
베트남 제국 | 바오다이 황제
캄보디아 왕국 | 노로돔 시아누크
자유 인도 임시정부 | 찬드라 보스
버마국 | 바 우
필리핀 제 2 공화국 | 호세 라우렐
라오스 왕국 | 시사방봉
예케 몽골 울루스 | 고종 성황제 · 데므치그돈로브 · 운왕
왕정위 정권 | 왕징웨이 · 천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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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아번 | 고종 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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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도중 연합국으로 전향 간접적 지원 여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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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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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국기 국장
광명천지[1]
光明天地
(1899-1946)

본토 | 식민지| 괴뢰국, 번국 및 점령지
1875년 3월 29일[2]~1947년 10월 12일
칭제건원 이전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대한국 대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3]
중화민국[4]
몽골인민공화국[5]
상징
국가
애국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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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 17일 대조선국 건국
1866년 6월 1일 병인양요
1871년 4월 26일 신미사화
1873년 3월 1일 문명개화, 임신대경장 단행
1875년 3월 29일 대한독립선언서 반포, 대한국 선포
1890년 10월 3일 흠정대한국 국헌 반포
1893년 6월 24일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개전
1894년 10월 1일 칭제건원, 대한제국 선포
1904년 2월 8일 러한일 전쟁 개전
1909년 10월 24일 만한병합
1914년 7월 28일 제 1차 세계대전 참전
1923년 1월 21일 춘생문의 변
1925년 7월 11일 을축대홍수
1929년 9월 20일 대공황
1931년 7월 2일 만보산 사건 발발
1932년 8월 12일 몽골출병
1933년 12월 3일 한성진군 발발
1934년 5월 16일 일심 체제 출범
1937년 6월 25일 한중전쟁 발발
1939년 9월 1일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1941년 3월 17일 동시베리아 전쟁 발발
1945년 6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용, 연합국의 점령
1946년 11월 27일 대한국 헌법 제정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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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동북아시아 대한반도, 만주, 몽골, 중국, 동시베리아 일대 등
수도|최대도시
황경 한성부 (1875~1947)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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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반도 (1875~)
면적
8,238,625(1932)
17,935,188(1942)[6]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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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9,089,7000 (1940년)[7]
언어
공용어
한국어
지역어
러시아어, 중국어, 몽골어, 관화어, 만주어
공용문자
한자, 한글
민족
한민족, 만주족, 한족, 슬라브족, 니브흐족, 아이누족, 몽골족 등등
국교
유교(국체유학) (사실상)[8]
군대
대한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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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1875~1890)
→한국식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 과두정(1890~1933)
→한국식 입헌군주제 · 일당우위제 · 의원내각제(1934~1939)
→ 군사독재 · 일심 체제(1940~1945)
→의원내각제 · 연합군 군정(1945~1947)
국가 원수
대한제국 대황제[9]
역대 대황제
고조 태황제(1894~1899)
순종 효황제(1900~1929)
고종 성황제(1930~1945)
강조 경황제(1946~1947)
정부 수반
내각총리대신[10]
주요 정부수반
김홍집
박영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조소앙
이항구
김창암
이승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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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대한제국 원 (₩)[11]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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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광무(1875~1899)
융희(1900~1929)
성덕(1930~1945)
태시(1946~1947)
시간대
UTC+9

개요

대한제국, 통칭 대한, 한제혹은 제국주의 대한임신대경장 이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7년 10월 12일까지 유지됬으며, 동아시아에서 근대화 후 열강 등극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당대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패전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세기 중후기를 기점으로 일본 과 더불어 극동 정세의 중요한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위의 양국은 수교와 이후의 영일동맹, 영한동맹으로 묶인 이래 동아시아에서 협력적인 제국주의 패권을 추구했다. 이러한 기조는 후일 두 나라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새로히 동아시아의 질서를 개편한다는 대동아공영권 사상으로 귀결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2][13]

현대에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한제국이 패망한 관계로 직접적인 지배권이 더 남아있지는 않지만, 아직도 만주의 동남부 지역에선 한국어 및 그 파생 피진들이 일부 남아있다. 이는 동남부 만주 지역이 만주 전역이 한국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인 1894년부터 당시 대한제국의 본토인 '내지'로 편입되어 통치되었기 대문이다.

역사

사화 이전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14]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대대적인 순나라와의 밀무역과 새로운 교역국들과의 거래로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당시 왕이었던 고조는 안동김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서학을 통해 익힌 세계에 대한 식견[15], 흥선군과 풍양조씨 등과의 동맹을 통해 인형사마냥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가고 있는 상황이었고[16], 고의적으로 안동김씨가 개항을 망설일 때 은근한 동의의 시선을 보내 개항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무력에 제대로 된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향로가 지부상소를 하며, 개항 이후 궁에 틀어박힌 고조의 출궁과 세도정치 타파, 민생 구제를 위한 조선의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호소 올렸다가, 심기가 불편해진 안동김씨 자제 중 하나가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진압하던 도중 뇌진탕으로 죽게 만들어버린'궁내사대부박해'가 일어나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유교적 사대부들의 등까지 돌린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현은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신미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개화와 건원

실권을 잡은 근왕 세력과 고조는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조사하는 기간을 가졌고, 이때 순나라와 후송이 각각 버마전쟁과 아편전쟁으로 몰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정치적 숙청이 끝난 조선에 때마침 다시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일본의 내부상황을 알리면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개혁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해 조선은 서방에는 보빙사를 파견했고, 일본, 중국 2개국에는 통신사를 개편한 수신사와 영선사를 파견하여 동아시아적 개혁에 어울리는 방향성의 모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 서양, 일본 등을 방문한 유교적 인사들은 안동김씨가 자신들의 사비로 들여오던 문물 일부와 제물포의 네덜란드발 문물들만 보다가, 완전히 드러난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고, 여기에 중국으로 방문한 이들이 수도까지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기존 천하관이 마치 징을 울리듯이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파견된 완흥군이 흥선군에게 보고를 올리면서, 그를 많이 믿고 있던 흥선군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단순히 군사력 뿐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느끼게 됬고, 이를 통해 개혁인사, 보수인사 모두 개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 조건의 최소, 지배층의 구화주의 여론 대폭 형성과 기존 유교적 세계관의 변화가 충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은 두가지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첫째는 여진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을 보내던 남만주 일대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편입하여 새로운 3개의 도로 삼았으며, 두번째는 홍삼과 인삼무역을 통한 상당한 무역 수익이었는데, 당시 태평천국의 난에서 비롯된 순송전쟁 직후 양 국가 모두가 힘이 빠졌고, 그 과정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아편이 퍼지고 있던지라 중화 양국은 해결법이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홍삼이 아편 구제에 많은 효능을 보인다는 게 드러났고, 이를 안 조선이 홍삼을 대규모로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거둘 수 있었던 것. 특히 몇세기 전부터 요동과 황해 일대를 오가며 서서히 성장한 순상(順商)들이 돈을 쓸어담으면서 조선의 거둔 무역수익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설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고,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관복개편'으로 관복을 서구화하는것을 적극 장려하고[17], 원격제도를 시행하여 국유화한 서원을 통해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단 또한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명개화를 서로 지켜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묘한 동지의식이 꽃피면서, 외교관계가 상당히 돈독하게 발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존재로 육군 주력의 조슈 번의 대륙확장 계획을 무모한 일로 치부하며 폭주를 막을 수 있으니[18] 좋았고, 한국은 해양세력 동맹이라는 특징 덕에 자국의 새로운 3도 내에서 나는 철광석들 중 남은 것들을 쌀과 함께 팔 수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금나라와 순나라에 같이 대항해 줄 수 있는 국가의 존재를 좋게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동맹으로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흥아회가 대대적으로 아시아 대중에게 한일동맹을 홍보하면서 대중에도 동맹 여론이 서서히 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개혁을 계속하면서 힘을 더 키운 한국은 기세를 몰아 1885년 금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뒤 거절당하자 북진하여 남만주 영토를 더 접수했고, 90년대에 들어 순나라와의 관계가 개혁문제로 험악해지자[19], 서서히 일본과 손을 잡고 각각 북방과 남방에서 중국,만주를 공략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전쟁 준비 이전, 한국은 송나라와 비밀리에 송의 중립과 승전 시의 이득을 보장하는 밀약을 체결할 것을 권유하였고, 송나라가 이에 응하여 한국과 일본은 중국 내에서 또다른 적군을 맞닥트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만반의 준비를 치르고 시작된 개전이었으나 동남부 해안을 집어삼킨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순나라의 지방통제력은 처참하기 그지없었고, 끝내는 기존 목표였던 대만을 넘어 남양함대를 격파한 일본이 복건성에 군대를 상륙시키는 초과달성적인 전과를 내는, 순나라 기준에서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렇게 1893년 벌어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에서 한일동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한국은 더 나아가 심양궁으로 진격해 실권자인 예허나라 힝전 귀비를 궁에 유폐시켰다. 전후 체결된 조약에서 순나라는 후금의 독립 보장을 위해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중단할 것을 필수 조건으로서 촉구받았고, 일본에게 대만을 할양하고 푸젠성을 조차한 뒤 한국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금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이후, 2년 전부터 서서히 준비되고 있던 환구단의 건설이 완성되고 칭제 요구가 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빗발치자, 고조 이현은 환구단에 올라서 칭제를 한 뒤, 대한국 대군주, 혹은 부황으로서 사용하던 독단적 연호인 광무를 다시 제국의 연호로서 개원하여[20], 제국의 시대를 시작했다.

칭제 이후, 안동김씨 척결 직후 공신들의 공을 치하하며 지정되었던 별도의 직위에 대한 재개편이 신분제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존의 공신,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자들과 이름있는 반가들을 사족(士族)[21]이라는 하나의 귀족 집단으로 뭉쳤으며, 이후 그 중 손에 꼽을 만한 명문가 당주들과 직접 개혁을 실시한 공신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오등훈족(五等勳族)으로 다시 분류하여, 그 공과 명성에 따라 오등작으로 분류하였다[22]. 이후 몇년 전부터 설치가 논의되던 왕족 교육 기관인 수학원의 계획도 끝이 났으나, 노년의 나이에 업무를 과다하게 처리한데다가 측근이었던 대원군의 죽음이 탈이었는지, 광무제 고조가 결국 1899년 황태자 이훈을 정식 후계자로 선포하고 붕어했다.

영광과 전성기

1899년, 융희시대의 시작 이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한국인이 피해를 입자[23] 분노한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 열강들과 손을 잡고 순나라로 진군하기로 결정, 북경에 입성하여 10개국 연합군으로서 그 이름을 알렸고, 이에 1901년 맺은 천진조약에서 옌타이를 조차하고 대량의 배상금과 유교 문화재들을 받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은 한영일 동맹 체결과 더불어 점점 고조되고 있었고, 결국 한국의 대금민국 러시아 공사관 포위와 일본 연합함대의 사할린 공격을 시작으로 한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과는 정 반대로 한일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는 러시아 극동군의 무능과, 비정상적으로 육,해군에 투자한 한국군과 일본군의 특징, 그리고 유능하게 대처했던 한일 정부의 선택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끝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조약은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더이상 친러 외교로 생존이 불가능해진 대청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해삼위를 일본제국과 함께 공동통치하는 자치령으로 삼았다.

이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본토에서의 진격으로 사실상 붕 떠버린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철강과 군수품 등을 수출하여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내,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독점자본주의 국가로 거듭날 수준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중국 북부 지방의 시장에 한국산 물품을 대량 뿌려 시장 장악을 통한 이익을 톡톡히 보기도 했는데, 이렇게 호황이 계속되던 도중 외교적으로 엄청난 이들을 얻은 사건이 발생했다.

1917년대, 러시아 혁명이 백군의 열세로 흘러가자 제국 내부에서 백군을 지원하여 반공정신을 강하게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그 정책의 일환으로 비밀작전인 금관작전을 실행하여, 러시아 귀족 몇몇과 로마노프 황가의 황손들을 구출하여 해삼위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한 양국이 막대한 물자를 쏟아부어도 백군이 서부전선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한국과 일본은 고민 끝에 기존 백군 잔당들과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을 긁어모아 기존 연해주 자치령을 개편, 괴뢰정부인 극동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편입 이후 한국의 칭다오 문제, 일본의 장시성 문제와 겹쳐 영국과의 동맹이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미국의 압박 하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로 영국과 일본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공식적으로 한영일 동맹은 영국이 빠져나가며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1920년대 한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한성은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가장 발전한 도시로 거듭났고 거리 여기저기에서 벼락부자가 됬다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으며, 정계에서는 정당출신 총리들이 연일 임명되고 민주주의와 민권운동 열풍이 불었고 서양에서 들어온 최신 문화들과 발전한 대한의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한성 거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시기를 흔히들 융희 로망이라고 부르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 중 하나로 불린다.

사람들은 이 몽환의 단장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었고, 국민들의 해외여행도 증가하는 등 실제로 그런 듯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가 서서히 종막을 고하던 해, 그 단장이 마침내 아래로 내려갔다.

불황과 환란

몽환이 종막을 고할 조짐을 드러낸 것은 1923년, 황궁의 춘생문 앞에서 당시 예친왕이천 이 만주족 독립운동가에게 폭탄을 맞은 후, 그 후유증으로 끝내 4일 뒤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면서 시작되었다. 젊은 친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신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확산되던 중 1923년 당시 청년 총리였던 박중양이 테러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급한대로 원로였던 김옥균의 지시에 따라 당시 정치적 거물로 부상했던 이동휘의 비교적 현실적인 노선을 주목, 사회를 통제하고 동시에 서서히 고삐가 풀려가는 군을 통제할 목적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최초의 무신총리 내각이 집권한 가운데에 개화당은 정책적인 면에선 경제적인 회복과 민심의 조절, 그리고 공산주의 확산의 단절을 위하여 기존과 다른 친서민적인 경제정책 및 법안을 발효하려고 했으나, 사족들 및 기업가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했고, 결국 1925년 을축 대홍수로 발생한 한성부의 피해는 군부의 통제 방향성을 두고 반목하던 이동휘와 개화당의 고균계 인사들을 영영 떨어지게 만드는 게 일조했다. 이제는 개화당의 힘이 예전만치 못하게 되었다는 증거였고, 한편으론 극단주의에 고삐를 맬 방도가 사실상 증발했다는 뜻이였다.

1929년 미국에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을축 대홍수 이래 서서히 불안한 균형을 띄우던 보이던 대한제국의 경제는 결국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 제국은행 앞에서 서로를 밀치면서 먼저 돈을 확보하려다가 압사당한 사람도 속출했으며, 한강과 대동강의 파출소에서는 잇따른 투신자살 소식이 이어져서 들려왔다. 만주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극에 달했으며, 한성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던 좌익 인사들은 광화문 광장 앞에서 파업운동을 벌일정도로 기세가 성장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의 발흥과 경제의 불황으로 인한 민생의 악화는 이내 극단주의를 태동시켰다. 특히 의회제에 대한 불신여론을 기반으로 한 "초헌정치"를 주창하는 세력과 근황의 기치로 국정에서 군상대권을 드높여 난국을 타파하자는 여론이 고루 인기를 얻은 한편, 반공, 군비 확장을 통한 경제 부흥과 대한의 영광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사실상 이러한 사상이 자라는 자양분으로 거듭났다. 급기야 군부 출신 인사들과 이러한 총력전 체제에 대한 호감을 가진 정치인들이 각각 충정회일심회라는 정당을 형성하는 수준에 이르게 한 데 이어, 1930년 양 당은 새 연호의 개원을 기념하며 합병식을 거행해 충정일심회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 무렵, 본래 충정회에 몸을 담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충정일심회의 집권

백의단의 지도자는 김창암이었는데, 단호한 결단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행동력 등으로 인해 백의단의 지도자까지 맡은 인물이었다. 김창암은 백의단의 전권을 손에 쥔 뒤 한국을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 개조할 계획을 짜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서 유교 근본주의, 파시즘과 민족주의등을 고로 내세우며 전 계층의 지지도를 확보한 뒤,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백의단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던지라,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들 중 자신의 뜻에 동참할 것이고, 쿠데타에 협조할 인물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인물은 바로 대한제국군 군 내 파시즘 모임임 북진회의 수장 어담 장군이었다. 원래부터 백의단 내의 인사들과 고루 알고 지내던 장교이기도 했고, 현 시점에서 군에 대한 통제권 또한 발휘할 수 있는 이였기에, 김창암은 1930년 새해에 이범석과 밀담을 나누어, 한성을 시작으로 하는 진군을 통한 정권 장악을 모의하였고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라고 생각한 어담은 당시 후배였던 이범석의 설득에 넘어가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쿠데타는 12월 3일 전날인 1933년 12월 2일 저녁 10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간동안 어담을 위시한 북진회가 자신들이 소집한 인력들로 의회와 중추원 건물을 포위하였고, 이어서 군 일부는 백의단 인원들과 함께 한성 거리로 진입, 경복궁을 향해 진군하는 한성 진군을 개시하였다. 마침내 경복궁 앞에 도착하자 시위대와의 대치가 시작되었으며, 백의단 인원들은 황제에게 자신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단체로 지부상소를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이 자결을 권고한 12월 3일 아침 8시가 되기 20분 전, 끝내 성덕제는 김창암을 구국자로서 임명한다는 조서를 반포하여 상황을 종결시켰고, 이내 국내에서 치안위협이 발생할 수준이라면 절대로 정국이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라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수단을 통해 결국 목적을 달성한 백의단은 우선 해산했고, 비상계엄령이 해산된 이듬해 초경부터 홍보 활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황제의 지지를 받아 임시서리를 맡게 된 조성환을 통해 정치권을 견제하게 된 군부 또한 급격히 과격화되어 예산을 더 늘릴 것을 요구했으며,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이 출세를 위해 여기에 가세하면서 점점 김창암의 정치적인 기반은 커져만 갔다.

시간이 흘러 임시서리체제에도 한계가 옴에 따라 제 25대 내각총리대신의 임명기간이 다가왔고,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상황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개화당은 일전에 집권한 입헌대한당의 풀지 못한 숙제였던 경제 회복에 실패하고 원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은 바닥에 기는 상태였으며, 대공황의 피해를 막지도 못하고 그닥 유능한 총리가 나오지도 않았던 입헌대한당은 말할 것도 없이 저조한 지지율을 받았다. 애초에 보수 성향의 당 내 소수파로 전략한 황국협회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국가가 지정한 불법정당이 조선공산당은 논외 대상이 아니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근황 정신, 공산주의 탄압, 팽창과 개혁을 내세워 보수파, 향촌과 도시를 아울러 높은 지지도를 자랑하던 일심회가 집권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여기에 황실의 중심인 황제도 일심회에게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광무제 이후 권위는 올라갔으나 실권은 서서히 줄어들던 황제의 입지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새 황제, 성덕제 이영은 반공 성향도 일치하며 근황을 부르짖는 일심회에게 묘한 신뢰감을 느꼈으며, 이를 표출하기 위한 의사수단이 바로 김창암의 쿠데타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 이후 충분히 중추원 의원들을 규합시켜 정계에 입문한 김창암을 견제할 수 있었음에도 성덕제는 그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쿠데타 직후엔 내각에 불신임을 표해 해산하는 행보를 보여준 전적이 있었다.

그렇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방면에서의 유리한 입지와 신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가뜩이나 연전연승으로 인해 입지가 한껏 올라간 군부 내 다수파벌과의 연줄을 무기로 들고 나온 백의단, 이제는 충정일심회의 김창암이 의정원과 중추원에서의 표를 얻어내며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임명되었다.

군국주의와 폭주

집권 정당으로 거듭난 일심회는 기다렸다는듯이 본격적으로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을축 대홍수로 인해 침수된 건물이 즐비하던 한성 재건사업, 혹은 신설될 거대 시설 건축업등을 장려해 대규모의 인력을 요구하는 사업을 벌렸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난 국민들의 경제상황이 한 풀 나아지는 효과를 냈다. 동시에 1910년대까지도 한국의 역량 부족으로 한계가 어느정도 있었던 만주에 대한 수탈을 북만주 일대까지 더욱 가속화하여 한국인들의 재산을 불렸다.

그 외에도, 지지율 확보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됐다. 가령 사회문제로 부상하던 범죄자들과 소위 '조폭'으로 알려진 폭력배들을 대거 색출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처벌했고, 동시에 의회정치에 대한 불신은 권력을 김창암과 일심회에게 집중시켜 어느정도 해결했다.

그렇다고 일심회가 좌익 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였던지라, 원래 이들의 기반이 그랬듯 국가정책적으로 지방과 수도의 공산주의 활동을 황명을 내세워 탄압했고, 자신들의 기반 중 하나인 황제의 신뢰를 해치치 않기 위해 사족들 및 기득권을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재벌 대기업들에는 지원등을 통해 정부에게 협력한다면 막대한 이득을 주겠다고 꼬드겨 자연스레 합류하도록 유도했고, 사족들의 제산 제도도 거의 손 대지 않았던지라 결과적으로 중추원의 권위 자체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이는 기득권을 포섭해 일종의 일심회, 군부와의 연립을 수립시켜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김창암의 술수였다.

다만 일심회의 기준에서 거추장스럽다고 여겨진 제도 몇 가지가 변화했는데, 예를 들면 일반사족들의 처우 변화였다. 이들은 지방에서 약간의 경제적 혜택을 받는 등의 특권이 소소하게나마 있었으나, 김창암의 거국내각은 이를 "국고를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고 여긴지라 황제에게 결단을 요청했다. 황제는 이를 승인했고, 그 결과 오등훈족을 제외한 사족들은 문자 그대로 족보상의 차이만 있을 뿐인, 사실상의 평민으로 완벽하게 몰락했다. 이렇게 파격적인 경제정책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한국은 기존에 연달아 집권한 무능한 내각들이 수습하지 못한 세계대공황의 타격과 융희 버블이 터진 이후의 침체기를 회복한 듯 보였으며, 직후 군비에 투자되어 외부 확장을 위한 발판 자금으로서 서서히 준비되었다.

한편 1934년 결국 국력의 한계치로 인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대몽골공세에서 항복하자, 한국은 점령지의 핵심인 동몽골 일대는 별도의 도독부로 통치하기 시작한 뒤, 자신들이 확보한 몽골 영토에는 괴뢰국인 예케 몽골 울루스를 설립하여 관리했다. 이후 몽골에서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로 진출하며 몽골의 경제는 파탄났지만 역으로 한국의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보였으며, 지지부진했던 몽골 출병을 일격에 마무리한 충정일심회는 본격적인 대외확장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먼저, 충정일심회 집권 이후부터 '반공'과 '왕도정치'를 주 이념 중 하나로 내세운 한국은 1936년 일본제국에 이어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같은 파시스트 국가들과 함께 방공 협정을 체결했다. 이 당시 기준 한국의 일명 '반공충정'을 위한 군비 예산은 전에 비해 상당량 증가한 상황이었고, 일심회 외 타 정당의 활동은 놀라울 정도로 수축된 형국이었다.

동시기에 비대해진 한국군의 군사력은 주로 위해, 청도, 괴뢰국인 러시아 차르국과 예케 몽골 울루스 등으로 분산되어 해당 지역에서의 치안방위업무에 투입됐다. 그렇게 불안감이 고조되던 중 이듬해인 1937년 6월, 증강된 군비로 인해 당시 한국군이 주둔중이던 노구교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로 인해 대한제국군과 중화민국군간의 마찰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수류탄 중 하나가 실수로 폭팔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제는 이 일로 인해 한국군 측에서 사망자가 나왔었다는 것이였으며, 보고를 받은 군 수뇌부가 비대해진 군사력을 소비할 대상으로서 중국을 선정한 뒤 중화민국군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렇게 한국과 중국간의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되서 대명제국과 중화민국의 국경선 사이의 일본 관리 하 탄광에서 일어난 분쟁을 구실로 일본제국 또한 중화민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최종적으로 20세기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남쪽의 해안가가 사실상의 동맹국인 일본의 함대에 유린당하는 동안, 한국은 위해, 청도 및 몽골을 이용한 화북포위전략을 급히 수립했다. 그러나 급히 수립한 전략이었음에도 이미 충분했던 지리적 이점과 중화민국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장비수준이 겹치면서 북부 화북 지방과 동부 산둥반도 확보에 성공했고, 곧이어 북경을 함락시켜서 중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목적을 세우게 됐다.

그러나 내몽고군벌의 거두인 장쭤린과의 전투가 내몽고 군벌 측의 예상 외의 역진으로 인해 더뎌졌고, 동시에 내몽고군벌이 보낸 지원군이 화북의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면서 기초 목표였던 1개월 내의 북경 함락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렇게 했음에도 장쭤린이 번 시간은 기껏해야 1개월 남짓이었고, 이미 동남부 해안에서 일본군의 군세까지 막고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재빨리 북경을 버리고 동남 지역으로 도주했다. 결국 그 해 9월, 북경이 함락되었고 대한제국군이 입성했다.

이 때 몽골에서 악착같이 싸워대던 내몽고군벌과 국민당군으로 인해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증가한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대한제국 원수부가 점령지 내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지령을 보내는 일이 벌어졌다. 가뜩이나 화북 지방에서 조선시대부터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순나라에 대한 인식이 얼추 남아있던 한국군은 이내 이성을 잃어버렸고, 결국 국민정부를 따라가지 못해 북경에 남아있던 시민들을 학살하고,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등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의 아시아 전선에서 난징 대학살과 더불어 손에 꼽히는 사건인 북경 대학살이다.

이후 화북에 서서히 전선이 모이려던 찰나 일본군이 상하이와 동남부 해안가를 접수하면서 다시 시선이 해당 방향으로 집중됐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대한제국군은 프리모예에 있던 일본제국군 지부와 통신하여 난징을 치기로 합의했고, 이 기회에 동남부를 넘어 북상한 뒤 대륙으로의 진출로를 2개나 확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일본군이 수락하면서 두 제국의 난징포위작전이 시작됐다.

이내 난징은 한국군과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어 각각 동서로 분단됐고, 여기서 청더의 독가스 사용, 북경대학살 이후부터 계속해오던 학살에 익숙해진 한국군과 아사카 아스히코의 명령으로 인해 고삐가 풀려버린 일본군은 문자 그대로 난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난징 대학살). 이 사건의 여파가 워낙 컸던지라, 한동안 난징 일대의 성장세가 아예 마비되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국제사회의 비방을 불러온 것을 둘째 치고,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을 고려하던 중국 군벌들이 아예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혐오하는 결과를 가져와버렸다. 이에 중국 내 세력들이 전부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시작하자 일본은 점령지 중 상당수를 괴뢰국인 대명제국의 영토로서 합병시키는것으로 응수했고, 한국 또한 남경을 수도로 한 뒤 당시 장제스와의 권력다툼 끝에 한성부로 망명한 상태였던 왕징웨이를 데려와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 1937년 10월경 중국의 전통적 수도인 베이징과 난징을 모두 접수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은 난징정부와 대명제국을 통해 중국 이권을 분할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했고, 당시 추축국이었던 독일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북경과 난징에서의 참사를 겪은 국민당이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독일의 중재가 한국의 김창암과 일본의 고노에가 제시한 무리한 요구사항을 받지 못하면서 이미 시작부터 협상이 파토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협상을 거론한 지 채 1주일이 안되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파토난 중화민국과의 협상을 뒤로하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 협의하여 선택한 것은, 남부와 북부로 중국을 갈라 각자의 이권을 보장하는 거대한 양대 괴뢰정부의 수립이었다.

따라서, 양국은 중국 양분을 위한 다음 단계인 내륙으로의 침투를 시작했다. 일본은 창자,광저우, 선전, 포산 등의 동남부 지역들을 점령해가며 서서히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정주,무한과 개봉은 무자비한 공세 끝에 한국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일대에서 벌어진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로 인해 중국이 본 피해는 막대했지만, 역으로 장제스와 장쭤린의 지도 아래에 악착같이 서쪽의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버티는 전술을 가능하게 한 끈끈한 단합력을 만들었다. 그렇게 중국의 처절한 저항으로 인해 중국을 문자 그대로 집어삼킬 기세였던 일본과 한국의 공세가 점점 더뎌졌고, 이내 기존 점령지 자체도 비대해지면서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중국전선이 문자 그대로 최후의 1인까지 끌어모으는 중국을 상대로 한 끝없는 소모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쯤 되자, 굳건했던 김창암의 입지가 중추원 의원들과 타 의원들의 압박으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황제가 그에게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으니 이론상 반공의 성업을 달성할 때 까지 호국령인 그가 해임될 일은 없었지만, 중국에서의 전공 부진이 이 시기 제국군의 이범석과 3번째 거대세력으로 거듭난 백의사의 염동진을 위협하고, 나아가선 자신의 권위에 해가 될 것임을 김창암은 내심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가 이 맘때쯤부터 주장한 방공국경의 최종 달성을 위한 '신천지 계획'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한 군사적 증강이 러시아 정부와의 밀실논의와 함께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베리아 침공

이러던 와중, 1940년에 기어이 경고만 보내던 미국이 일본에 이어 한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끊겠다는 통보를 보냈다. 당시 오늘날 만주의 대경유전을 확보하지 못해 상당량의 석유를 미국과의 교역에서 싸게 수입하던 한국은 그 많은 군비를 운영할 자원부족에 시달리게 됐으나, 실질적으로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이 볼품없던 한국이 미국을 대상으로 할 수 있던 선택지는 딱히 없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기름을 모을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 결론은 신천지 계획의 실행을 통한 시베리아의 자원지대 확보였다. 이미 육상병력은 총력을 다해 유사시를 위해서 증강시켰던지라 지금 당장 소련에 쳐들어가도 대숙청으로 군대의 질이 볼품없어진 소련, 그것도 서방의 본토와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시베리아는 완전한 재패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론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이범석을 위시론 한 북진회의 개전론이 힘을 얻었다. 결국 그해 3월 대한제군은 할힌골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소련군의 극동 방면 정예 육군을 분쇄,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과 함께 북진하여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소련이 한국에게도 선전포고 하면서 동시베리아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41년동안 시베리아 전선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아직 봄날일 때 입성한데다가 미약한 극동군의 군대만이 방비하고, 게다가 본토의 역량은 독일과의 전쟁, 그리고 캄차카에서 일본과 맺은 불가침 조약으로 인해 소련이 동방에 집중하는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부라티야와 아후츠크 남부는 순식간에 점령당했고, 여기에 극동 방면에서 미국이 혹시나 접근할 일을 차단하기 위해 알래스카 인근으로 이륙한 한국 공군이 폭격을 가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여기에 동맹인 나치 독일이 거둔 연전연승 덕분에 소련이 다시 반격해올 걱정도 상대적으로 적었따.

42년까지 한국은 수많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바이칼 호 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당초 확장목표였던 신천지 계획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42년의 겨울동안 발생한 병력손실과 추위, 그리고 독일의 전세 약화로 인해 극동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된 소련으로 인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1년 미국 알래스카에 기적적으로 폭격을 성공한 이후부터는 미군도 간간히 동시베리아로 건너와서 한국과 대립하는 지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제력으로 확보한 자본과 만주의 철강과 기름을 모두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쟁에 끌어다 쓰면서 경제는 악화일로를 겪었다.

이러는 도중, 중국전선과 북방전선이라는 양면전선을 두게 된 충정일심회 내에서도 전쟁을 언제 끝내느냐와 권력지분을 두고 북진회와 일심회의 대립이 심화된 것을 기점으로 분열이 시작된데다, 이들의 독선적인 행보에 불만을 품은 의화군 이강, 양연군 이연 등의 거물급 종친계 일부가 민주파와 비밀리에 연대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3년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으로 대한제국군이 시베리아 전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끝

의의

식민지

대한제국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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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통치기관
만주 만주(满洲) 만주총독부
동몽골 몽고번(夢姑邦) 몽고도독부
프리모리예 숙신도호부(肃慎都護府) 숙신도호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
웨이하이 위해 -
* 숙신도호부는 1923년 나선통감부로 업무 이전
* 몽고번은 1942년 몽고목(蒙古牧)으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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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이전까지 대한제국에서 황제가 가지던 권력은 막강했다. 황제의 가족인 황실은 기존의 조선 왕조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황실궤범흠정국헌, 그리고 국체유학은 강력한 중앙권력과 더불어 이러한 황제와 황실의 막강한 권위를 보장하는 데에 일조했고, 절정에 달했을때의 황제는 사실상의 신으로 신격화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당대의 대한제국을 입헌군주국이 아닌, 전제군주제 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쉽게 말해, 당대 한국에서 주요 정치적 담론이였던 한국식 입헌군주제는 입헌군주제가 아니라는 것. 다만 의회정치가 기능하는 것 자체는 황제의 신격화와 권력과는 별개로 충분히 가능하였기에, 또 다른 주장에선 대한제국을 "전제정치와 의회정치가 동시에 존재했던 체제"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황제의 신격화는 대한제국이 패전하면서 미국의 주도 하에 황실궤범의 개정, 신헌법 제정, 유학순정지령을 통한 학문의 자유화 정책 등으로 혁파되었고, 대황제의 막강한 권력은 황실의 유지를 담보로 몰수되었다. 이 탓에 오늘날의 대한국 체제에서 대황제가 가지는 권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역대 내각총리대신


대한국 역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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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 대조선국 의정대신 · 대한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 시기의 내각총리대신은 대체로 시대에 따라 여러 변천사를 겪었다. 광무 시대에는 황제의 의사가 짙게 반영되어 중추원과 중신들이 뜻을 받드는 방식으로 뽑히는 경우가 주를 이루었으며, 융희 시대에는 광무 시대에 활동한 중신들이 원훈이 됨에 따라, 황제의 재가를 받는다는 형식 하에 총리의 임명에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황권우선주의 의식이 강했던 고종이 즉위 후 원훈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며 다시 무너졌고, 결국 이는 김창암의 정계 입성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어느 시대가 되었건, 기본적으로 총리대신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대황제의 신하로서 황제의 아래로 제약되었다. 황제권이 직접 위광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던 융희 시대에도 얼마든지 황제의 지시를 통해 내각이 해산된 경우가 있었으며, 또한 시대를 불문하고 내각에서 직접 대신을 탄핵시키는것은 총리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였다. 이와 같은 전근대적인 제도는 결국 대한제국 정치가 "한국식 민주주의"이상으로 진화하기 힘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김창암의 경우 임기 후 황제의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실적을 쌓은 덕에 얼핏 보기엔 황제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경우였으나, 이마저도 결국 공적이 새로히 쌓이지 않으면 붕괴할 것이 필연이였다는 한계가 존재하였다. 실제로 김창암은 시베리아에서의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는 데 실패하자, 끝내 총리직을 일심회의 다른 주요인사던 송병조에게 양도하고 하야하는 길을 택했다.

현대의 평가

현대 한국에선 대한제국이 인정해야 할 역사부터 자랑스러운 과거, 어둠의 시대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적인 인식은 부정적인 축에 속한다[24]. 후세의 이러한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대륙의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중국과 시베리아, 북태평양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한 한편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분명 한국의 근대화는 동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사건에 속한다. 이 시기 서구에서는 러시아의 대륙 진출을 견제할 의도에서 한국을 전근대적 세계관과 제도를 버리고 탁월한 개혁으로서 기적을 이룬 문명국이라며 연신 찬사를 거듭하였다. 당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동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도 중국인이나 만주인의 성격과 생활습관, 문화와 역사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과는 별개로 일본인, 한국인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사실상의 전제군주국이였음에도 대한제국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인 고평가를 받은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문호 개방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계몽에는 성공했을지언정 사상, 사회, 정치의 자유와 국민 계몽에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당대에는 분명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그 체제의 선진성과 자유도는 당시의 서구 열강이나 현대의 대한국과 비교할 때 현저히 낮았던 셈이다.

다만 악행의 수위는 치밀한 관료제 아래에서 집중적인 학살을 벌인 나치 독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평가받는다. 대한제국의 대외정책은 독일과 같은 타 민족의 전면적인 멸절과는 거리가 멀었고, 침략과 내분유도를 통해 주변국의 자주도를 대폭 낮춘 뒤 동군보좌제 등 외부 제도 도입을 통해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시키거나, 한성의 영향력을 짙게 밭는 괴뢰정부의 만드는 것이 목적이였다.

한국의 식민지배, 혹은 내정간섭을 받은 나라들의 한국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특히 식민지배로 인한 최대 피해국인 대금민국이나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같은 경우엔 전후 대한국에 대해서 감정의 골이 워낙 깊었고, 회복되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특히 냉전 시기 진영조차 제 2세계로 달랐던 대금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감정은 더 심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중금 2개국이 한국에 대한 원한을 풀기까지는 데탕트의 시작 이후에도 몇십년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다만 러시아 차르국의 경우에는 애초에 국가의 어버이 격 상징인 황실부터가 한국의 금관작전으로 목숨을 건진 로마노프 왕가 황통이고, 소련을 바로 코 위에 두고있는 상황에서 전후에도 강도높은 친미, 친영 및 친한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던지라 감정회복이 빠르게 된 편에 속한다. 실제로 2010년 방한 당시 몇몇 러시아 차르국 측 정치인들은 구 충장단에 참배하며 지난 전쟁에서 대한은 무고했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국가는 아니지만 우크라이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한제국이 나치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고, 대조국전쟁 당시에 우크라이나 반군에게 독일을 통해 간접적인 물자 원조도 한지라 평가가 매우 좋은 편. 그렇다고 구 한국군이 직접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적도 없던지라 현대에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대한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남아있다.

서양에서는 한국에 의해 유럽 본토가 입은 피해는 전무한지라, 제국주의 일본을 대하는 것처럼 다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예시로 유튜브 등지의 사이트에서 나치 독일의 군가는 재빠르게 검열당하는 데 반해, 양양가대한혼, 멸공의 횃불 등 대한제국의 군가는 큰 검열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 몇몇은 소련의 공산주의와 전면적으로 호각을 다투는 한편 미국에게도 북태평양에서 팽창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케케묵은 과거사로 싸우는 걸 건설적이지 못하게 여겨 중국이나 대금민국 등이 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을 '다 끝난 과거를 저열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태'라 여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직 소련에서는 대조국전쟁시기 독소전쟁과 한소전쟁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전쟁범죄를 겪기도 하였고, 이전부터 소련과 한국의 관계가 전러시아 제국정부 시절 러시아 차르국 문제 등으로 좋은 편이 아니였던지라 반한 감정이 종종 남아있는걸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시론 미국이 있는데, 이 지역도 알류샨 열도 전역이나 알래스카 폭격탓에 한국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 이 탓에 구 세대와 지역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에는 반한감정이 남아있다.

대금민국과 중국의 거센 반한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들은 현재의 대한국을 구 대한제국과 정권, 이념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25] 여기서 대금민국의 경우 신냉전이 한창인 현 국제정세에서 친 소련적인 면모를 견지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금한 양국간의 문화적인 관계 개선은 허서리 굴마훈 총리가 시행했던 개방정책을 시점으로 신냉전 시대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신냉전 이후 서구 진영으로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다. 최근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전쟁피해 호소가 가장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인민정부의 경우엔 일본에 의해서 본 피해가 더 많은지라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

일본 제국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일본 제국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흔히들 알려진 두 국가간의 긴밀한 관계는 사실상 이때부터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면 된다. 거의 몇백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서로간의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악감정 또한 소멸하였으며, 이후 각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한편 교류가 가속화되며 패권과 풍조에 기반한 새로운 외교관계가 정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기타


  1.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리라'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칭제건원 이후 지정된 표어다. 건원 이전의 외왕내제 시절에는 홍범의 14조라는 표어를 사용했다.
  2. 칭제건원을 통해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확정한 것은 1894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부황 칭호 등 외왕내제 체제와 대한이라는 국명 자체는 쓰였기에 학계에서는 해당 시기도 대한제국의 역사로서 간주한다.
  3. 대한제국령 만주, 치치하얼 시(제원부(齊原府)), 만주 4도 등
  4. 대한제국령 청도, 위해 등
  5. 몽고번 등 몽골 동부지방
  6. 외지, 식민지, 점령지, 본토 및 번국과 괴뢰국들가지 포함한 최대 강역이다.
  7. 흔히 당시 대한 인구를 두고하는 '9천만의 총의로'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61,000,000명 이상)와 만주, 몽고, 그 외 번국 거주민들을 포함했다.
  8. 표면적으로는 흠정국헌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닌 500년 사직을 이어온 대한의 국시라고 주장하였으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성리학과 비교했을 때 종교의 성질을 더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 탓에 기존 토속신앙, 불교 및 기독교 등 거대 종교를 제외한 이교 신자, 국체유학을 인정하지 않거나 정부에 터놓고 반대하는 재야 유학자는 비국민으로 매도당했으며, 정부의 압제에 의한 국교적 위치가 강제되었다. 이는 한성대학 인문학부 명예교수이자 종교학자인 손봉호 교수의 주장과도 상동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체유학 문서 참고.
  9. 만주 가한, 예케 몽골 울루스 대칸, 대조선국 국왕 겸임
  10. 1940년을 전후로 일심회 일당제가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체제적 특징이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
  11. 만주몽고 번 일대에서는 만주 원, 몽고 원 등이 통용되었다.
  12. 19세기 이전까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가들은 시시각각 분쟁을 일으켰으나, 시간이 지나며 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근대화와 팽창의 필요성이라는 공동의 과업 앞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13. 양국은 또한 제국주의 시대에서 당대의 서양 열강들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속하는 극동 출신의 열강국가들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이나 일본은 모두 기존 질서의 개편을 통한 패권 확보에 매달렸고, 그리하여 각각 영토의 팽창과 태평양의 재패라는 목표를 내세우게 된 셈이다.
  14.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15. 이전까진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붕 후 고조의 서재에서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출판된 여분의 세계지도와 서양 서적들이 밝혀지면서 개인적으로 서학에 관심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 즉위하기 전의 관리시절에 접한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일자는 불명.
  16. 흥선군일기(興宣君日記)에서 완림군의 방문에 대한 구절이 꽤 자주 언급됐고, 얼마 후 완림군이 보위에 올랐다. 기록을 보면 여기서 정치적인 담판을 내 당시 원래 계획대로 완림군을 선출하거나 향렬상 최고 우위인 경운군을 선출하기도 애매했던 그를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17. 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세간에서 지배적이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문명개화 열풍이 절정에 달한 융희 시대 이전에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관은 어느정도의 예외를 두더라도 군문과 관련된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고, 나중에 이는 문관에게도 강요되었다.
  18. 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
  19.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20. 이는 일세일원제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택이였다는 학계의 여론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칭제를 통해서만 자주 국체를 선포할 시 그 이전의 대한국 시기는 자주독립국이 아니였다는 의도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한 조치라는 추측도 있다.
  21. 속어로는 귀족이라는 말도 꽤 널리 사용됬다.
  22. 다만, 이는 여전히 가세 자체는 비대했던 세도가들도 포함됬다. 예를 들어 안동 김문의 유력자였던 사영 김병기는 김병기 후작으로 봉해졌고(시호:문충공(文忠公))다. 물론 사실상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기반이 사그러든 상태였기에, 더 이상 작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음모는 없었다.
  23. 적어도 현실주의적인 행보와 조선 시대부터의 친선관계로 인해 친한적인 정서가 강했고,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이전까지는 나름 급진개혁적 시도도 있던 송나라와는 다르게, 순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 한국 물건을 풀어 어지럽히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백인, 일본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착취자였다. 때문에 의화단의 난 당시 피해를 보게 된 것.
  24. 이는 현재 대한국에게 우호적인인 미국, 영국이나 전통적인 우방인 한편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일본도 매한가지다. 그나마 대한제국과 패권적 연관성이 있는 과거가 있는 일본에선 특별히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조는 드문 편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에 대한제국과 전쟁을 치른 입장인지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다.
  25. 다만 서구의 인식과는 별개로 구한국대한국이 완전히 다른 국체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애초에 현대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광무, 융희, 성덕 등 시대로 구분하지 전혀 다른 국체로 보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반도계 왕조국가에서 국체가 교체될 시 일어나던 왕조의 교체가 정치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는 기존의 나치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서독과 동독으로 새로 정부를 꾸린 독일, 기존의 내각제 시스템은 유자하지만 무솔리니를 스스로 내쫓고 왕정을 폐지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유산을 청산한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