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평왕

리반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5월 3일 (금) 21:25 판 (새 문서: {{익평왕}} {{인용문|'''天下乙 手厓 捄爲理羅'''<small>(천하을손애구위리라)</small><br/>천하를 손에 담기 하리라.<ref>이두(吏讀) 표기로서 한문...)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42대 탐라군왕
초대 진해정윤
익평신성대왕

翼平神聖大王

청해진 대사 재직 당시 표준 영정
시호 익평왕(翼平王)[1]
별호 신성황왕(神聖皇王), 무종대왕(武宗大王)[2]
연호 청천(淸天, 848?~857?)[3]
생몰연도 787?~857 (71세?)[4]
성씨 장(張)
궁복(弓福), 궁파(弓巴)[5], 보고(保皐)[6]
출생지 신라(新羅) 무진주(武珍州) 완도(莞島)
사망지 천녕(天寧) 복성주(福成州) 대야현(大野縣)
역임 직책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 ?-828)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828-851)[7]
감의군사(感義軍使, 839-851)[8]
진해장군(鎭海將軍, 839-851)[9]
탐라군왕
耽羅君王(848-857)
진해정윤
鎭海正胤(855-857)
  1. 865년, 달고왕이 추숭함.
  2. 천녕사(天寧史) 익평 총서 기준
  3. 연호를 사용한 정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분분함.
  4.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학계에서 분분함
  5. 삼국유사》 기이편 신무대왕 구절에서 유래됨.
  6.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장보고(張保皐)로 표기함.
  7. 흥덕왕이 청해진 설치 승인 및 대사 직책을 제수함.
  8. 달벌 전투에서의 공로로 신무왕이 제수함.
  9. 선왕 즉위에 대한 공로로 문성왕이 제수함.

天下乙 手厓 捄爲理羅(천하을손애구위리라)
천하를 손에 담기 하리라.[1]

익평왕(翼平王, 787? ~ 857)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君王)이자 천녕(天寧)의 실질적 건국자이다. 본래는 신라(新羅) 사람으로서 당나라에서 무관으로서, 그리고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뒤 동중국해(東中國海)의 해적 격퇴 및 해상 무역을 주도했으나, 신라 왕실과의 혼인 문제로 암살의 위협을 겪은 뒤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탐라 및 일본(日本)의 부속 도서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857년, 구주(九州) 정벌을 위해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을 이끌었으나, 공성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달고왕(達暠王)과 측근들이 정벌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864년에야 천녕 건립에 결실을 맺었다. 이후 '익평'(翼平)이라는 시호로 추숭됨으로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각주

  1. 이두(吏讀) 표기로서 한문을 한국어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