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마지막 제국)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1월 26일 (토) 22: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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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Empire of Japan
국기 국장
임의 치세는 천대에 팔천대에
(君が代は千代に八千代に)
쇼와 유신 이전 지구통합 이후
일본 왕국 지구 집정 연합
섹터 닛폰 (섹터 니혼)
상징
국기
황실기
국화
국화
황실 상징
국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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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쇼와 유신
1941년 태평양 전쟁
1945년 대한국의 영토 반환

지리
수도
교토
최대도시
도쿄
면적
382,960km²
위치
지구
동북아시아 일본 열도 및 부속도서
주변국
대한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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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1억 1391만 명
공용어
일본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법정 문자)
민족
일본인 98%
그 외 2%
국교
신토 (사실상)
종교 분포
신토 42%, 기독교 11%, 그 외 47%
군대
일본제국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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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양원제, 의원내각제
국가 원수
헤이세이 덴노[1]
행정 수반
기시 노부오[2]
여당
자유민주당
경제 체제
수정자본주의 시장경제
통화
일본 엔(円)
위치
수도 교토의 전경


개요


대일본제국

임의 치세는 천대에 팔천대에
君が代は千代に八千代に


대일본제국 (Empire of Japan)

파도는 멎었고, 위협은 가셨다. 많은 피가 흘렀음에도 야마토인들은 끝까지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나약하지만 이제 그들은 저문 해 따위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 한켠에 이 기억이 있는 한, 성공할 수 있다는 기억이 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떠오르는 해일 것이다.


임의 치세는, 천대에 팔천대에!
-위대한 해의 고향, 대일본제국 선포 이벤트

대일본제국은 동아시아의 국가이다. 수도는 교토이며, 최대 도시는 도쿄이다.

1936년 일어난 쇼와 유신으로 일본 왕국을 무너뜨리고 탄생한 국가로, 비교적 늦게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역사

격동의 개화기

1868년부터 1871년간의 보신전쟁은 프랑스군의 참전을 시작으로, 많은 서구 열강들이 뛰어든 국제전으로 비화했는데 이를 위해 도막파와 좌막파 모두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영토와 이권들을 무분별하게 매각, 일본 근대화의 동력 완전 상실로 이어졌다. 긴 전쟁으로 빚더미 위에 앉아버린 일본은 중앙집권을 시도할 힘도 부족했으며, 역도 무리의 본진을 쳐 부순것이 아닌 천황을 사로잡아 전쟁을 종결시킨 것 이기에, 졸렬한 일본의 대외정책은 다시금 반외세 감정을 자극해, 1877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 중앙의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한 막부는 토벌군을 파견할 수 없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가고시마에 입항했던 대한제국의 운양호가 근왕의용대의 공격으로 불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 대한제국의 "구주 출병"이 결정되었다. 1878년 진행된 구주 출병, 또는 조선대습래는 초장부터 난항을 겪었다. 사세보에 상륙한 선발대가 무리하게 내륙 지방으로의 진군을 시도하다 수백의 사상자를 내며 패퇴하였으며, 해로를 통해 가고시마로 향한 2군은 사쓰마 번의 해안 포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상륙을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쓰마 번은 대한제국 해군의 해상 봉쇄를 뚫을 능력이 없었으며, 절차부심하여 3만의 병력을 소집하여 다시금 상륙한 대한제국군을 일전의 경험으로 우습게 본 사쓰마군이 야전에서 패배하며 구주 출병은 일단락된다

구주 출병이 진행되는 동안, 존왕파가 패배하며 투자한 자본의 원금도 회수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 영국은 일본왕국에 영수증을 들이밀며 상환을 요구했다. 쇼군은 프랑스와 미국을 믿고서 영국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사전에 이야기를 끝마친 미국과 프랑스는 영국이 일본을 침공하는것을 사실상 방조했다.\n1877년 11월 7일, 대영제국 해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사도가시마에 포격을 가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점령했으며, 이듬해인 1878년 4월 7일에 조슈 번과의 거래를 통해 획득한 이권의 보호를 명분으로 주코쿠 지방에 영국군이 주둔했다. 막부의 개입 요청에도 프랑스와 미국은 응하지 않았다.

한편 보신전쟁기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완전히 개방된 일본의 시장은 굉장히 취약했으며, 중앙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관료들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메이지 유신은 진선조의 쿠데타로 실패했으며, 쇼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각 번의 번주들은 외국과 개별적인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메이지 10년 4월 2일, 끊이지 않고 일어나던 풍수해와 화재의 피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정토진종을 구심점으로 대대적인 잇키를 일으켰다.

일향종의 난은 당대 사회에 팽배하던 반 서구, 반 기독교 감정에 편성하여 서구 열강의 조계지와 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사태로 확대되었으며 결국에는 서구 열강들의 개입을 불러왔다. 우여곡절 끝에 이 일향종의 난이 끝나자 열강들은 아와지 조약을 맺어 사실상 일본을 아무것도 못하는 시체국가로 만들었다. 다른 말로는 일본 분할이라고 불리는 아와지 조약은 각 열강들이 담당한 구역에서의 치안을 책임지는, 막부를 하나의 국가로도 보지 않는 처우였었다. 명분이야 일향종의 난이 또 일어날 것을 방지하는 조약이었지만 사실상의 국권피탈이나 마찬가지인 셈.

이 아와지 조약은 계속 열강들의 힘으로 유지되다가 1902년 러시아가 한러전쟁에서의 패배로 이탈함으로 휘청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결국 1920년 대한제국이 중국 청도를 반환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영-조 결렬 이후로 사문화된 아와지 조약은 미국이 재한적 재무장을 허가하면서 완전히 파기되었다.

다시 돌아가서, 아와지 조약은 사실상 번국들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덕분에 번들은 전부 멋대로 서구 열강하고 거래를 트면서 독자적인 근대화에 돌입했고 당연히 일본 전국을 도는 철도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막부 역시 시체라곤 하지만 최대한 직할지를 개발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막부의 수도는 당연히 교토인데 영지가 없는 고산쿄는 그렇다 쳐도 고산케는 에도 방면에 많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사실상 유일하게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인 고산케의 지지를 잃을까봐 막부의 개발은 집중되지 못하고 동경과 서경 양쪽으로 분산되었다.

당연히 이런 분산 개발은 개발 역량의 치명적인 낭비였고 결과적으로는 관서와 관동 양쪽 지배자들의 감정이 서로 악화되는 결과만을 낳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도에 자리를 잡은 고산케와 고산쿄 모두 다 만약 쇼군의 대가 끊긴다면 다음 쇼군을 배출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뒤에서 온갖 협잡질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 천황이 당하였던 역할을 이제는 쇼군가가 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이나 되는 쇼군이 암살당하고 밝아오는 1936년, 새롭게 즉위한 쇼군의 앞에 아편이 든 차가 진상되었다.

쇼와 유신과 2차 세계대전

현재까지도 아편이 든 차를 누가 진상하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어떤 이들은 유신파가 쇼군을 암살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도쿠가와 일족 중 한 명이 일본을 장악하기 위해 쇼군을 독살한 것이라고도 말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1936년 1월 3일을 기점으로 쇼군이 공식 사망한 것이 알려졌고, 일본은 혼란의 상태에 돌입했었다. 교토에 잔존하던 도쿠가와 왕국군은 지휘체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도 없어 사방에서 일어나는 소요사태[3]를 진압하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유신회가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유신회는 본디 일본 국외에서 유학을 한, 일본 내 정계에서 비교적 젊은 지식인, 장교들이 꾸린 세력으로, 간사이와 세이난 전쟁 이후 완전히 중앙 세력에서 배제된 조슈-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들은 장교들을 이용하여 혼란 속 교토에서 정부를 장악하고 의회에서 일본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도쿠가와 일족을 몰아낸 후 유신회 고위층은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하기까지 하였으나, 아직까지 일선 장교 및 병사들은 유신회 고위층에서 교토 점거 후 어떠한 정부를 수립한다 제대로 된 말조차 없어 슬슬 혼란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유신회 고위층에서도 사실 공화정을 세울지, 군정을 임시로 할 지 논의가 갈렸던 때였다. 이 때 의외의 존재가 이들에게 찾아왔다. 바로 쇼와 덴노였다.

쇼와 덴노는 유신회가 교토를 장악하는 혼란의 시점에서 느슨해진 감시망을 피해, 황거에서 나와 직접 이들이 있는 의회로 향하였다. 일본에서의 천황은 곧 그들의 신이나 다름 없었기에 쇼와는 유신회 권력을 평소 친분이 있던 도조 히데키와 기타 장교진들의 열성적인 호응으로 장악하였고, 도쿠가와 막부 정부는 조적이고, 신정부와 천황의 친정을 통해 이들을 토벌하겠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리하여 일본 내전, 그리고 30년간 이어질 쇼와 유신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덴노라는 구심점과 에도의 막부라는 적을 확실하게 설정한 정부는 천황의 이름으로 오사카, 나고야를 빠르게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일본 왕국 치하의 삶이 좋지 않았던 국민들 또한 유신회의 이러한 '혁명'에 호응하여 막부군을 테러하거나, 각지에서 친유신회 잇키를 일으키는 등의 활동을 하며 막부의 치세가 종결되었음을 알렸다.

결국, 에도에 쇼와가 입성하면서 을병전쟁, 오헤이전쟁 등으로 불리는 일본내전은 끝을 알렸고, 유신회는 1937년 4월 16일 쇼와 헌법을 발표하면서 일본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렇게 막부를 무너뜨렸다 할지라도 아직 문제는 많이 남아있었다.

전후

재만 남은 폐허에서 일본이 부활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봤으면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패망 이후에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막으로 일본을 사용할 예정이었고, 흔히들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아는 국민당의 중국 내전 시작은 친미 북양정권을 위협하면서 미국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주기까지 하였다. 일본의 유일무이한 군주, 쇼와 덴노 또한 외교적으로 그런 안목이 있었다. 당시 그는 폐허가 된 조국을 되살리기 위하여 밤낮으로 자지 않으며 노력했으며, 미국의 경제 고문단을 초빙하여 특강을 듣는 등의 열의를 보여주면서 조국 재건에 혼신을 다하였다. 제3세계 일반적인 독재자들이 일신을 챙기기위한 것을 보면, 이는 경이로울 정도다. 무엇이 그에게 열의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는지는 온갖 추측 (유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신민'을 잘살게 해주어야 된다는 설,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는 애국청년설 등)이 난무하지만, 이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니 넘기도록 하곘다.

아무튼, 일본제국은 그리하여 차근차근 안정적인 전제군주정권 하에서 개발을 시작해나갔다. 관동과 관서의 각종 도량형 차이, 문화적 차이 등도 하나로 묶이기 시작하면서 1960년 전일본철도가 건설되어 비로소 근대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쇼와 경제개발'이라고 명칭되는 중공업 기반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일본 농촌의 폐습과 허름한 길을 재정비하는 신일본운동 혹은 새마을운동, 그리고 삼저호황을 통한 경제적인 발전은 일본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1988년 교토 올림픽은 그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며, 일본을 강대국 막차에 태워주었다. 가끔씩 불만의 목소리가 조금씩 나와도 예전 도쿠가와의 일본 막부시절과는 달리, 합법적이고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살아있는 신이라고 할 정도의 권위를 지닌 군주가 명을 내리니 조용히 참을 수 밖에 없었고, 더욱이 쇼와 덴노의 경제개발정책 또한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네가 천황폐하보다 더 잘살게 할 수 있느냐?' 라는 말 한마디라면 입을 다물게 되어 개혁과 개발에 대한 불만은 쇼와시절에는 묵인되었고, 이러한 계단을 넘어서 현대의 일본은 전쟁과 분열의 아픔을 딛고 세계 9위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도 뺄 수 없다. 1936년 쇼와유신을 일으킨 유신회는 쇼와 독재시절 수십년간 집권하면서 같이 경제개발을 이어갔으며, 해외 각지로 떠났던 일본인 이민자들을 조국으로 복귀시켜 조국근대화의 역군으로 삼는데 큰 공헌을 해주었다. 그러나, 쇼와도 늙어가고, 유신회 원로들 또한 영구집권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해 황태자를 꼭두각시로 하려 수작을 부리려고 하였으나, 쇼와의 서슬퍼런 두 눈에 걸려 유신회가 해체되고 자유선거를 실시함으로서 일본에도 민주주의가 찾아오게 되었다. 쇼와가 자유선거를 실시한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황태자 아키히토 (2017년 현재 헤이세이 덴노.)의 능력이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는 우려,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의 대에는 억눌려있을 뿐이지 일본인에게는 산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일본 정계가 고인 물이 되어서 썩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포함한 많은 고민 끝에 쇼와 덴노는 수백년만에 돌려받은 천황의 권력을 민정에게 이양했고, 불멸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일본제국군은 현대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전을 거름삼아 일신우일신을 반복해갔다. 규슈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도조 히데키 장군은 전후에 여러 육군사관학교를 세우고 자신이 겪은 전훈을 한가지로 묶은 '현대전대승백서'를 출간하여 교보재로 삼게 하였고, 규슈와 홋카이도의 한국과 섞인 이질적으로 보이던 문화에 대한 차별을 베트남전쟁의 파병으로 줄이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육군보다는 해군에 주력하면서, 발전된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쪽 한국의 전투경찰이 느슨한 기강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비해 모병제에 애국심이 투철한 이들이 모인 일본군의 정예라는 자부심으로 훈련에 임하니, 당연히 차별화되는 수 밖에.

고난을 겪은 일본도, 이리하여 하나의 날개를 되찾은 불사조가 되어 활활 저 하늘을 날아갔다. 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 현대 일본에게는 역사는 그 스스로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시대로 생각되고 있다.

황실

각주와 여담

  1. 1989년 즉위
  2. 입헌민정당, 2016년부터 재임
  3. 원래는 유신회 쪽에서 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사료가 공개 됨에 따라 번벌들이 주도했다 보는 것이 정설이다.